소금장수의 재주
지은이: 김창완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제 1 부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
김 총각이 장가를 갔습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머슴살이를 하느라고 서른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삼 년 동안 공머슴을 살아 주고 주인
집 딸에게 장가를 든 것입니다.
노총각은 장가를 들어 되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랑이라는 사실도 깜박 잊고
는 기분 좋은 김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가 봅니다. 김 총각은 그만 술에 취해,
첫날 밤 신방에서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신부가 없었습니다. 신부를 찾느라고 온 집안이 발
칵 뒤집혔습니다.
"아니 저 정신나간 신랑이 있나. 신부가 없어져도 모르고 있었다니." 장모와 장
인은 신랑에게 딸을 찾아내라고 다그쳤습니다.
"자네 책임일세. 천금 같은 내 딸, 자네가 찾아내게." 김 총각은 이 어이없는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맸습니다. 넋을 잃고 앉아 있던 김 총
각의 눈길이 문득 병풍에 가 머무렀습니다. 그 병풍에 이런 글이 씌어 있었습니
다.
"신부를 찾으려면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으로 가라." 김 총각은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을 찾아 나섰습니다. 사흘 밤낮을 걸어갔더니, 안개가 자욱히 낀 곳에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김 총각은 그 집에 가서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이 어디
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지금 농삿일에 파묻혀서 대답해 줄 겨를이 없네. 이 농사를 다 지어서
거둬들일 놈 거둬들이고, 방아를 찧을 놈 방아 찧어서 곳간에 넣어 주면 가르쳐
주겠네." 하고 그 집 주인이 말했습니다. 김 총각은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을 알
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김 총각
은 일 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거둬들일 놈 거둬들이고,
방아를 찧을 놈 방아를 찧고, 곳간에 담을 놈 곳간에 넣어 주었습니다.
"주인어른, 이제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이 어딘지 가르쳐 주십시오." "암, 가르
쳐 주고말고, 저기 저 산너머 안개가 자욱히 낀 곳으로 가서 물어 보게." 김 총
각은 주인 노인이 가르쳐 준 산너머에 안개가 자욱히 낀 곳으로 갔습니다. 거기
가서 보니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이 어딥니까?" 하고 김 총각이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곳
에서도 역시 "나는 지금 농사를 짓느라고 정신이 없어 가르쳐 줄 여유가 없소이
다. 농사를 지을 놈 농사짓고, 거두어들일 놈 거두어들이고, 방아 찧을 놈 농사
짓고, 곳간에 담을 놈 곳간에 넣어 주면 그때 가르쳐 주겠소." 하는 대답밖에 들
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 총각은 그전처럼 그 집에서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어 주
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일 놈 거두어들이고, 방아 찧을 놈 방아 찧고,
곳간에 넣을 놈 곳간에 넣어 주자, 그곳에서도 저 산너머 안개 자욱히 낀 곳에
가서 물어 보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김 총각은 또 산너머 안개 자욱히 낀 곳에 가서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을 물었
습니다. 그곳에서도 전과 같은 대답, 전과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몇십 년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김 총각은 이제는 늙어서 머리가 허옇게 셌고 이
도 빠지고 허리도 구부러진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첫날밤에 잃어버린 신부를 찾아,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을 찾아 헤매느라고 청춘
도 다 가고 인생도 다 간 것 입니다.
그해에도 주인집 어른이 가르쳐 준 대로 저 산너머 안개가 자욱히 낀 곳으로
터덜터덜 찾아갔습니다.
집 앞에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 버드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집이었습니다. 어
딘선가 본 듯한 집이었습니다. 꿈속에서 본 집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살았던 집일까? 이제는 노인이 된 김 총각은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낯익은 듯
한 풍경을 보며 부르튼 발을 쉬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인네가 집에서 나와 우물가에 물동이를 놓고, 바가지로 우물물을 펴서
물동이에 담았습니다.
김 영감은 목이 말랐습니다. "여보시오, 아주머니. 물 한 모금 얻어먹읍시다."
젊은 여인은 물을 한 바가지 푼 후 버들잎을 쭉 훑어 물 위에 띄워서 노인에게
내밀었습니다.
김 영감은 손을 내밀어 물바가지를 받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첫날밤에 잃어버린 신부가, 그 꿈에도 못 잊던 신부가, 몇십 년을 찾아 헤매던
신부가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김 영감은 그만 정신이 아뜩하여 그 자리
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놀란 젊은 아낙네는 집으로 뛰어들어가 식구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람들
은 김 영감을 업어다가 방에 뉘어 놓고는 불을 지피고, 꿀물을 데워 입 안에 흘
려 넣었습니다.
젊은 아낙네의 늙은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간호했습니다. 김 영감이 겨우 눈
을 떴습니다.
"아이고 노인장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구려. 먼 길을 오시느라고 탈진하셨나
봅니다. 며칠 푹 쉬시면 좋아지리다."
할머니가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김 영감은 눈을 두리번두리번했습니다. 자기가
젊었을 때 머슴 살던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집 외동딸에게 장가들기
위해 3년 동안 공머슴을 살면서도 이쁘게 자라던 신부감을 보면 온갖 시름이 다
사라지던 옛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기가 어딘지요?"
"여기가 배미산 아래 두말 동네 아닙니까."
"그래요? 이 집이 뉘 집입니까?"
"원둑 밑에 논농사 많이 짓던 박 서방네 집입니다."
"당신은 그 박 서방하고 어떻게 되는 사이입니까?"
"제가 그 박 서방네 외동딸입지요."
김 영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우물가에서 봤던 새댁은 누구입니까?"
"제 딸입지요. 아주 오랜 옛날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우리 집 머슴에게
시집을 보냈지요. 그 머슴하고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신랑이 술
을 많이 먹고 곯아떨어졌길래 하도 미워서 병풍에다 '신부를 찾으려면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으로 오라'는 글을 써놓고 몸을 숨겼더랍니다. 장난이었지요. 신랑
은 신부를 찾으러 나가서 아직까지 종무소식이랍니다. 지금쯤 늙어서 돌아가셨
는지도 모르지요."
"그럼 그 딸아이는..."
"첫날밤을 지낸 게 임신이 되었더랍니다. 그걸 낳아 길러서 데릴사위를 보았지
요." "그럼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은 어디 있는 산인가요." "집 뒷산 배미산을 그
렇게도 부르지요."
김 영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주인집 할머니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습니다.
김 영감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서 같이 춤을 추었습니다.
"찾았구나. 찾았구나. 뱅뱅이 돌린 쳇바퀴산을 이제야 찾았구나."
소금 장수와 구렁이
"큰일났습니다, 선주(배의 주인)어른. 크, 큰일이..." "이 사람아, 숨넘어가겠네.
뭐가 큰일이란 말인가? 차분히 말하게." 선주 아저씨는 뱃사람의 놀라 더듬거리
는 모습에 자리를 당겨 앉으며 다그쳐 물었습니다.
"소금을 배에서 퍼내려고 이물(배의 머리) 쪽 짐 칸의 뚜껑을 열었더니요... 아,
글세..." 어마어마하게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소금 가마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는 것이었습니다.
구렁이 때문에 놀라 기겁을 하고 뒤로 나자빠진 뱃사람이 객줏집에 묵고 있는
선주에게 뛰어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주 아저씨는 뱃사람의 말을 듣는 순간 '구렁이 한 마리'가 머리에 떠올랐습
니다.
선주 아저씨는 신안군에 있는 장산도에서 소금을 이백 가마쯤 실을 수 있는
자그마한 짐배 한 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산도에는 개펄을 막아 만든 염전이 많았습니다. 선주 아저씨는 여름이면 염
전에서 나온 소금을 사서 배에 싣고 목포나 영산강을 따라 올라가, 영산포에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고, 그 돈으로 쌀을 사가지고 와 섬에다 팔아 이익을
남기는 안팎 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선주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배라야 고작 소금 이백 가마 정도밖에 실을 수 없
는 것이어서, 소금을 배 안 가득 싣고 가서 팔아도 남는 이문은 별게 아니었습
니다.
매년 그래 왔듯이 선주 아저씨는 이번에도 소금을 싣고 영산포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장산도에서 영산포로 가려면 섬과 섬 사이로, 섬모롱이를 돌고 돌아, 바람이
좋으면 돛을 올리고, 바람이 없거나 나쁘면 노를 저어서 사흘쯤 가야 했습니다.
배가 섬 사이를 빠져 나와 툭 트인 바다를 중간쯤 지날 때였습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한낮, 노를 젓느라 선주 아저씨도 뱃사람도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선주님, 저기 저것이 무엇입니까?"
배사람이 젓던 노를 쉬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유리같이 매끄러운 바
다 위로 작은 물결을 만들며 배를 향해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선주 아저씨도 주름살투성이인 이마에 손 차양을 만들어 얹고 그것을 바라보
았습니다.
햇빛에 반사되는 물빛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얼른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배 가까이 왔을 무렵에야 두 사람은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길이가 어른 팔로 두 길은 되고도 남을 만큼 큰 구렁이가 지친 표정으로 살려
달라는 듯 선주와 뱃사람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구렁이가 어떻게 해서 이 바다 가운데로 헤엄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런 걸
생각해 볼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저 녀석이 배 위로 올라온다면... 바람이
없어 배를 빨리 두망시킬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선주 아저씨는 정신이 아뜩했습니다. '구렁이는 영물이라는데... 살려 달라는
저 녀석을 모른 척 내팽개친다면... 혹시 복수하지는 않을까?'
선주 아저씨는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구렁이를 살려 주면서도
배 위로는 못 올라오게 할 수 있는 방법!
선주 아저씨는 손에 쥐고 있던 삿대를 바다에 던져 주었습니다.
풍덩!
삿대가 유리 같은 바다를 깨뜨리며 던져지자, 깜짝 놀란 듯 멈칫거리던 구렁
이는 이내 머리를 삿대 쪽으로 돌리더니 삿대를 친친 감고는 쉬는 것이었습니
다. 혀를 날름거리며 선주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해가 해남반도 너머로 기울자 바다는 온통 자줏빛으로 일렁거렸습니다.
바람은 불지 않고 검은 구름이 낮게 깔리며 별들을 차츰 가렸습니다.
밤중 무렵부터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저녁때쯤 배가 영산포에 닿았습니다.
선주 아저씨는 장마가 들기 전에 소금을 팔고, 쌀을 사서 다시 장산도로 돌아
가야 했습니다.
하루 줄이는 데 하루만큼의 돈이 남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놈의 구렁이 때문
에 소금을 배에서 퍼낼 수가 없었습니다. 날짜는 자꾸 가고, 객줏집에 내야 될
돈은 올라만 가는데, 이 일을 어쩐다...?
선주 아저씨는 울화통이 치밀어 술만 마셔댔습니다. 그 녀석이 어떻게, 언제
그렇게 감쪽같이 배에 올라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구렁이는 영물이라던데, 귀신처럼 재주를 부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그 녀석이 언제 어느 때 이 방에까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
다.
선주 아저씨는 날마다 뱃사람을 시켜 배에 가보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냥 그 자리에 있던가?"
"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던데요."
"큰일났군. 오늘이 벌써 보름째 아닌가? 소금 팔아 봤자 밥값도 안 되겠네."
그렇게 스무 날쯤 지났습니다.
서울에서 상인들이 내려와 소금을 몰아 산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장마가 들
기 전에 소금을 사가려는 상인들이었습니다. 장마가 들면 소금 생산이 중단되고,
그러면 자연히 소금 값이 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1천 가마씩을 실을 수 있는
커다란 소금배가 수십 척 내려와 소금이란 소금은 몽땅 사들였습니다.
소금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올랐습니다. 중간 상인들이 소금을 사가
지고 서울 상인들과 흥정을 하느라고 매점매석과 투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선주 아저씨는 더 이상 구렁이가 나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
다. 서울 상인들이 떠나고 나면 소금 값이 떨어질 게 뻔한 일이었습니다.
선주 아저씨는 몽둥이 하나를 단단히 움켜쥐고 배로 갔습니다. 몽둥이로 구렁
이를 두들겨 패서 내쫓고라도 소금을 팔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선주 아저씨와 뱃사람은 배에 올라가서 발소리를 죽이며 구렁이가 똬리를 틀
고 있는 이물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뱃사람이 몽둥이 끝으로 갑판에 있는 창고의 문을 열였습니다. 환한 빛이 창
고에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선주 아저씨는 몽둥이를 머리 높이 치켜 들고 창고 안을 노려보았습니다.
팔뚝보다 굵은 구렁이 똬리를 틀고 소금 가마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
다.
두 사람은 동시에 몽둥이로 구렁이를 힘껏 내리쳤습니다.
"얏! 이놈의 구렁이!"
그런데 구렁이는 몽둥이를 맞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몽둥이를 치켜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 아니, 이 사람아. 이건 구렁이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구렁이가 아니라
배에서 쓰는 굵은 밧줄이었습니다.
바다에서 보았던 구렁이에 놀란 가슴이, 어두컴컴한 창고 구석, 소금 가마 위
에 놓여 있는 밧줄을 구렁이로 잘못 보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선주 아저씨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소금 값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였거든
요. 아무튼 선주 아저씨는 그때 번 돈으로 이천 가마씩 싣는 소금배를 샀고, 장
사는 잘 되어 금방 부자가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구해 준 구렁이가 은혜를 갚은 것이라는 소문도 자자했습니다.
용이 못 된 총각 구렁이
다수리는 서북족을 가리고 선 대성산의 품에 있는 마을입니다. 동네 앞에은
남쪽으로 툭 터진 바다가 펼쳐져 있답니다. 그래서 다수리는 항상 포큰하고 따
뜻한 느낌이 드는 동네입니다.
다수리 사람들은 바다하고 살았습니다. 썰물 때면 게를 잡고 굴을 깨고 해초
를 뜯었습니다.
일 년에 두 번은 배를 타고 가물가물 건너다보이는 홑섬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싸들고 마음이 들떠서 배를 탔습니다. 일하러 간
다는 기분이 아니라 국민학생들 소풍 가는 기분처럼 마냥 들뜨고 기대에 부풀었
습니다.
그날 뜯어 온 해초를 다수리의 공동 재산으로 썼습니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홑섬에는 해초가 푸짐하게 잘 자라 어우러져 있게 마련
입니다.
굴도 자랄 대로 자라서 알이 굵었고 게도 살이 통통히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홑섬에 가는 일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홑섬에는 어른
두 사람이 껴안아도 남을 만큼 허리가 굵은 총각 구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 구렁이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구렁이를 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누구나 갖게 마련이었으며, 돌아올
때는 안도감과 함께 서운한 마음을 함께 가지고 오게 마련이었습니다.
다수리 사람들은 여름에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이 드는 일은 모두 홑섬에 사
는 총각 구렁이의 심술이라고 믿었고, 동네 처녀 가운데서 바람이 나거나, 노처
녀가 되도록 시집을 못 간 사람이 있을 땐 총각 구렁이의 심술이 더 심해진다고
믿었습니다.
홑섬으로 일을 갈 때 동네 처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의무적으로 따라가야
했습니다.
누가 시키거나 강제로 데려가는 건 아니었지만, 동네 처녀를 모두 데리고 홑
섬으로 가서 총각 구렁이의 심술을 달래야 한다는 생각이 오래 전부터 전해 내
려왔던 것입니다.
처녀들도 홑섬에 가는 일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없는 외출이었으므로 너도나
도 가고 싶어했고, 총각 구렁이에 대한 두려움은 들뜬 마음에 묻혀서 별게 아니
었습니다.
더군다나 무더기로 자란 미역, 톳 같은 해초를 뜯거나, 씨알 굵은 굴을 깨느라
정신을 팔다 보면 다른 잡념이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그해에도 앞마당에 심은 앵두나무에 처녀애들 입술 같은 앵두가 주렁주렁 열
리고, 앞마당처럼 펼쳐진 바다가 손거울인 듯 매끄러워진 늦은 봄날, 다수리 사
람들은 홑섬으로 가자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다섯 척의 작은 배에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탔습니다.
깡충거리는 강아지까지도 몇 마리 배에 올라타고 내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싣고 가기로 했습니다.
손에는 저마다 쑥버무리며 보리개떡이며 냉이무침 같은 별미를 장만해서 꾸려
들었고, 굴 깨는 연장, 대바구니 같은 것들도 가지고 왔습니다.
"아따, 날씨 한 번 좋구나."
쇠돌이 아저씨가 돛폭을 달아 올리며 말했습니다.
다섯 척의 작은 돛단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로는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
기도 하면서 바다로 나섰습니다.
좁쌀알만하게 보이던 홑섬이 자꾸 커져서 쌀알만해졌다가 밤톨만해졌다가 감
자알만해졌다가... 그렇게 금방 금방 커져서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쪽빛 바다는 손에 물이 들 만큼 고왔습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흐하하 호호호 웃음 소리들이 바다에 깔리면서 배들은
홑섬에 닿았습니다.
다수리 사람들은 흩어져서 해초를 뜯기도 하고 굴을 깨기도 했습니다.
해초와 굴이 너무도 푸짐하게 많아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로
일에 몰두했습니다.
일하던 자리에서 다수리 사람들은 집에서 싸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기도 했
습니다.
순심이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바다에 퐁당 빠졌다가 친구들이 손을 잡아 끌어
올린 작은 사고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순심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바위 틈에 쪼그리고 앉아서 옷을 말려 입느라
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덜 마른 옷을 입은 순실이의 새파란 입술에서는 바다 냄새가 나는 듯했
습니다.
이윽고 해가 서쪽 바다로 떨어져 잠길 무렵, 다수리 사람들은 수확물을 배에
싣고 배에 올랐습니다.
돛을 올리고 배들이 홑섬을 떠나려 할 때였습니다. 마른 하늘에서 번개가 치
더니 갑자기 소슬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습니다. 그러고는 홑섬의 하늘 위로
금빛 찬란한 햇살 한 줄기가 솟아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꼼짝 않고 두려움에 떨면서 그 빛의 용틀임을 보았습
니다.
"어머나, 저거 총각 구렁이 아냐?"
순심이가 손가락으로 빛줄기를 가르키며 말했습니다.
"얘가 방정맞게 무슨 말이냐?"
정실이네 할머니가 순심이를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하늘로 치솟던 빛줄기는 어마어마하게 큰 구렁이가 되어 홑섬으로 떨
어지고 말았습니다.
구렁이가 홑섬으로 떨어지자마자 광풍이 몰아치면서 사나운 빗줄기가 쏟아지
기 시작했습니다.
거울 같던 바다는 금방 산산조각이 나고 사납게 들끓었습니다.
"큰일났다. 총각 구렁이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데, 순심이 때문에 용이 되지 못
하고 말았어. 저 총각 구렁이의 심술을 막을 사람은 순심이밖에 없다. 순심이를
배에서 내려 홑섬에 두고 가는 수밖에 없겠다."
그 중 나이가 많은 텁석부리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다수리 사람들은 싫다고 울부짖는 순심이를 배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순심이를 배에서 끌어내리고 나니, 다시 바람이 자고 비도 멎었습니다.
같이 가자고 울부짖는 순심이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따라왔지만, 다수리 사람
들은 무서워서 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후 아직까지도 총각 구렁이를 본 사람도, 순심이를 본 사람도 없었습니다.
홑섬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옛날 그대로 그냥 그 자리에 떠 있습니다.
연평바다가 생긴 이야기
연평바다는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는 커다란 섬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그 섬
은 제주도보다 커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말하자면 군(고을)이 일곱이나 있는
아주 큰 섬이었습니다.
그 섬에 대대로 덕을 쌓고 선을 베풀며 살아온 농사꾼이 있었습니다.
덕을 쌓고 선을 베풀다 보니 살림이 자꾸 줄어들어, 이제는 겨우 자기네 식구
먹고 살 정도로 옹색해졌습니다.
살림이란 원래 악착같이 재물을 탐하고 욕 얻어먹을 정도로 인색해야 모아지
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쌍한 사람 도와 주기를 대대로 해왔으니, 아무리 큰 살림
이라도 버텨 낼 재간이 있겠습니까.
살림이 기울자 대대로 이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살아온 늙은 머슴이, 그해
농사가 다 끝나고, 겨울이 다가온 어느 날 주인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주인어른, 이제는 나 같은 머슴이 있어야 할 만큼 농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주인어른 식구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데 저까지 입을 축낼 필요가 없을 것 같습
니다. 저도 이 집을 나갈까 합니다."
머슴의 말을 들은 주인을 펄쩍 뛰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겨울이 와서 짐승들도 저 살 구멍을 찾아가는 때
집을 나가다니."
"저는 지금 꼭 떠나야만 합니다. 그러니..."
"안 될 말이야. 정 가겠다면 그동안 자네가 머슴살이한 새경을 계산해 줄 테니
기다렸다가 새경을 받아 가지고 가도록 하게."
주인이 머슴의 새경을 계산해 보니 자기 집 살림을 몽땅 다 주어도 모자랄 만
큼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머슴은 새경 한푼 받지 않고 그냥 떠나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주인어른, 우리 같은 못난 사람들이 대대로 주인어른의 은혜를 입고 살아왔습
니다. 하루 세 끼 배부르게 먹여 주셨고, 몸 가릴 옷을 주셨고, 등 따습게 잘 방
을 주셨습니다. 그 은혜만도 하늘 같은데 새경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내 집안이 몰락하여 한 살림 떼어 줄 형편도 못 되고, 참으로 답답하네. 정
그렇다면 이 엄동에 길손 노릇하려면 갈아입을 옷이라도 있어야 할 터이니, 옷
을 새로 지을 동안만이라도 기다려 주게."
주인은 큰며느리에게 머슴의 솜옷을 짓게 하고 작은 며느리에게 솜버선을 짓
게 했습니다.
솜옷과 솜버선이 다 지어진 날 머슴은 집을 떠났습니다. 떠나면서 주인에게
"주인어른의 따뜻한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천기를 누설하
는 것이니 귀담아들으십시오. 이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말고 꼭 시행하셔야
합니다."
"천기를 누설하다니... 무슨 말이오?"
"내년 사월 초파일 날 연못의 잉어가 죽어서 떠오르면 지체하지 말고 집을 떠
나셔야 합니다. 떠나실 때는 이 지팡이를 짚고 가십시오. 이 지팡이가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만 가면 됩니다. 이 지팡이가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는 데까지 가셔
야 합니다."
머슴은 주인에게 동백나무 지팡이를 하나 건네 주고는 집을 떠났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어느덧 사월 초파일이 다가왔습니다.
큰아들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아버님, 웬일인지 연못의 잉어들이 죽어 물 위
로 허옇게 떠올랐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문득 집을 떠나며 하던 머슴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집안 식구를 모두
모아 놓고 "머슴이 집을 떠날 때 '잉어가 죽어 떠오르면 지체하지 말고 집을 떠
나라'고 했다 나도 그 말이 긴가민가했는데 잉어가 저렇게 죽어 떠오른 걸 보니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구나. 모두 서둘러 집을 떠나도록 하자." 하고 말했
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큰아들은 "원 아버님도, 아무것도 모르는 머슴의 말
을 듣고, 대대로 내려온 이 살림 다 팽개치고 빈 몸으로 정처도 없이 떠나다니
말이 됩니까.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떠나기를 반대했습니다. 작은아들도
반대했습니다.
"너희들이 집에 남겠다면 나하고 막내만 떠나겠다."
주인은 머슴이 놓고 간 동백나무 지팡이를 찾아 짚고 집을 떠났습니다.
대문 밖을 막 나서자, 이상도 하지요. 지팡이가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
제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쯤 걸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장터
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장기가 들어 국박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막걸
리 한 잔을, 아들은 국밥 한 그릇을 청해 먹었습니다.
그들이 국밥집에 들어설 때 관상쟁이 한 사람이 국박 집에서 요기를 하고 있
었습니다. 관상쟁이가 장터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 오늘 안으로 죽을 상이
었습니다.
'이상하다. 사람들이 모두 죽을 상으로 보이다니, 혹시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관상쟁이는 국밥집 아주머니에게 손 씻을 물을 한 대야 청해
놓고, 대야 물에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
기 또한 오늘 안으로 죽을 얼굴이 아닙니까?
관상쟁이는 크게 놀라서 국밥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습
니다. 그때 한 노인네가 어린애를 데리고 국밥집 문을 들어서는데, 이 두 사람은
죽을 상이 아니었습니다.
관상쟁이는 '옳다. 저 사람만 따라가면 나도 살길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
하고 두 사람 뒤만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요기를 마치고 지팡이를 짚고 나섰습니다. 관상쟁이는 그들
의 뒤를 따랐습니다.
장터를 벗어나 큰 들판을 건너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꼬불꼬불 오솔길을 걸었습니다. 산이 가팔라서 오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
습니다. 마침 옹달샘이 있어서 손으로 물을 퍼서 먹었습니다.
"에퉤퉤... 물이 왜 이렇게 짜지."
옹달샘 물이 바닷물처럼 짜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지팡이가 앞으로 나아가서 다리를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산봉우리를 행
해서 자꾸 올라갔습니다.
칠부 능선쯤 올랐을까요. 펑퍼짐한 바위가 있는데 저 지팡이가 바위에 콱 박
히더니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바위 위에 앉아서 땀을 식혔습니다. 관상쟁이는 바위 아래
소나무 그늘에 앉아서 땀을 식혔습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청명하던 날씨가 음산해졌습니다. 미친 돌
개바람이 저쪽 서해 바다에서부터 휘몰아쳐 왔습니다.
뽀얀 물안개가 햇빛을 가렸습니다. 서쪽 수평선에서는 굉음이 들려 왔습니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던 세 사람은 입이 딱 벌어진 채 닫기지 않았습니다. 거대
한 물너울이, 마치 만리장성이 밀려오듯 그렇게 덮쳐 왔습니다.
물너울은 순식간에 작은 섬들을 삼키고, 이 큰 섬에도 덮쳐 왔습니다.
그들이 살던 마을을 삼키고 장터를 삼키고 들판을 삼키고, 그렇게 엄청나게
밀려오던 물너울이 이제는 그들이 있는 산으로 덮쳐 왔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꼬옥 껴안고 눈을 감았습니다. 관상쟁이는
소나무를 껴안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더니 한 순간 세상이 고요해
졌습니다.
"차르르 찰싹, 차르르 찰싹."
잔물결치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리고 짭조름하고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겼
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눈을 가만히 떠보았습니다. 아아, 이럴 수가. 상전벽해(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됨)라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일까요. 방금 전까지 있던
세상은 없어지고 그냥 끝없이 끝없이 넓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습
니다.
바다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바위 바로 아래에까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바위
아래 있던 소나무도, 소나무 아래 앉아 있던 관상쟁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위에 꽂혀 있던 지팡이에서 싹이 돋고 동백꽃이 피어났습니다. 햇살은 눈부
시게 내리쏟아지고, 연평바다는 끝없이 짙푸른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
게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아홉 오라비 찌르르 계모서모 찌르르
섬에서 살던 어떤 사람이 부인을 여의었습니다. 갯가에 나가 고둥을 줍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 바다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아들을 아홉이나 두고 끝으로 고명딸을 두었습니다.
남편은 부인의 삼년상을 치르고, 남편을 바다에 빼앗긴 과부와 다시 혼례를
올렸습니다.
계모가 들어오자 아들 아홉은 모두 육지로 돈벌이를 나가고, 집에는 고명이라
는 막내딸 하나만 남았습니다.
계모는 하나 남은 딸마저 보기 싫어서 구박을 했습니다. 밥도 자기들만 방에
서 먹고 딸은 부엌에서 혼자 먹게 했습니다. 고명이는 서러워서 눈물에 밥을 말
아 먹었습니다.
고명이가 훌쩍이며 밥을 먹다가 흘린 밥알을 어미 잃은 쥐새끼 한 마리가 주
워 먹었습니다. 고명이는 자기 신세와 비슷한 쥐새끼가 불쌍해서 끼니때마다 밥
알을 던져 주었습니다. 쥐는 고명이와 친해졌습니다.
고명이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면, 쥐가 무릎 위로 올라와 재롱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새끼 쥐가 강아지만하게 컸습니다.
어느 날 계모는 고명이를 죽여 없앨 궁리를 했습니다. 계모는 쑥버무리를 만
들어 고명이 몫에 비상을 섞었습니다. 그러고는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고명이에
게 쑥버무리를 주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고명이는 여느 때처럼 쑥버무리를 한
조각 떼어 쥐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쥐는 그 쑥버무리를 먹고 뱅뱅뱅 돌다가 고
꾸라져 죽었습니다.
깜짝 놀란 고명이는 쑥버무리를 먹지 않았습니다. 계모는 쥐 때문에 자기 계
획이 실패한 것을 알고는 화가 났습니다. 죽은 쥐를 가져다가 통가죽을 벗겨 내
고는 바지랑대 끝에 가죽 벗긴 쥐를 매달아 들고 동네방네 외며 다녔습니다.
"처녀가 애를 낳았다네. 동네 사람들 이것 보소. 고명이가 애를 낳았다네."
고명이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고명이가 자기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고 변명했지만 먹혀 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고명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날뛰면서 고명이의 머리채를 끌고 마을로
나갔습니다.
마을 앞에, 썰물 때면 개펄이 드러나고 그 개펄을 따라 건너가면 바위섬이라
는 작은 홑섬이 있었습니다. 밀물이 들면 바다 가운데로 잠기는 섬입니다. 그 바
위섬으로 고명이를 끌고 갔습니다.
참외밭을 지나갔습니다.
"아부지, 아부지. 참외 하나 따묵고 죽을라요."
"죽을 년이 참외는 무슨 참외."
수수밭을 지나갔습니다.
"아부지, 아부지. 수수 한 모개 끊어 묵을라요."
"죽을 년이 수수는 무슨 수수."
옹달샘 옆을 지나갔습니다.
물 가운데 바위섬에 다다르자 아버지는 고명이를 바다에 밀쳐 넣었습니다. 고
명이가 바다에 풍덩 빠지자, 물보라 속에서 새 한 마리가 솟아오르며 "아홉 오라
비 찌르르 계모서모 찌르르" 하고 울었습니다.
그 때 육지로 돈벌이 나갔던 아홉 오라비들이 돈을 벌어 고향에 오면서, 고명
이한테 줄 선물을 한 궤짝씩 지고 오고 있었습니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고향 마을입니다. 그들은 고갯마루에서 그리운 고향 마을
을 내려다보며 땀을 식혔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아홉 오라비의 어깨에서 어깨로 옮겨
앉으며 "아홉 오라비 찌르르 계모서모 찌르르" 하고 울어대는 것이었습니다.
"동생들, 이 새소리가 맹랑하지 않나?"
"형님, 우리 고명이한테 무슨 일이 난 모양입니다."
아홉 형제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막내를 동네에 내려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한참 후에 막내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형님들, 큰일났습니다. 우리 고명이가
계모의 모략에 빠져 죽었답니다." 하고는 분에 못 이겨 숨을 몰아 쉬는 것이었습
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우리 고명이의 넋이 새가 되어 우리에게 하소연하였구나.
고명아, 불쌍한 우리 고명아. 이 오라비들이 네 원수를 갚아 주마."
아홉 형제는 고명이에게 주려고 사오던 선물을 모두 모아 불사르고는 독사,
독거미, 지네들을 잡아서 빈 궤짝에 가득 담아 지고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한 얼굴로 아홉 형제는 아버지와 계모에게 인사를 했
습니다.
"아버지, 우리 고명이가 눈에 안 보이는데 어디 갔습니까?"
"안산에 나무하러 갔는 모양이다."
안산에 가봐도 고명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샘에 빨래하러 갔는 모양이다."
샘에 가보아도 고명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묵정밭에 고구마 캐러 갔나 보다."
묵정밭에 가보아도 고명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위섬에 굴 깨러 갔는 모양이다."
바위섬에 가보아도 고명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라비들은 동생 찾기를 포
기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선물을 사왔습니다. 선물 구경이나 하십시오."
"뭣을 이렇게 많이 사왔냐?"
아버지와 계모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방안에 가득 쌓인 선물 궤짝 아
홉 개를 풀어헤쳤습니다.
아홉 형제는 얼른 방문에 가로막대를 대고 못질을 해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집
에 불을 질렀습니다.
아홉 형제는 불길에 싸인 집을 보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포르릉 날아오르며 울었습니다.
"아홉 오라비 찌르르 계모서모 찌르르"
@바보의 효자 연습
어느 마을에 마누라를 잘 때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어째서
마누라를 매일 때리느냐고 물으면 여자는 사흘만 안 때리면 백여우가 된다고 하
면서 여자는 꼬투리가 잡히는 대로 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죽을 때도 바보 아들을 불러 놓고 "여자는 사흘만 안 때리면 백여우가
된다." 하는 유언까지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들은 바보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믿
고 저희 어머니를 틈만 나면 때렸습니다.
어머니는 남편한테 맞고 살아온 것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아들한테서까지
맞고 살자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원님에게 찾아가 하
소연을 했습니다.
"사또, 아들놈이 제 아비 하던 식으로 나를 때리니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그
녀석을 잡아다 단단히 혼을 좀 내주십시오."
원님이 듣고 보니 아들녀석 하는 짓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당장 포졸
을 보내 아들녀석을 오라를 지어 붙들어 왔습니다.
"너 이놈. 이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라고. 어머니를 때리다니, 천벌을 받을 놈이
구나."
원님이 호령호령하면서 꾸짖었습니다.
"사또,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여자는 사흘
만 안 때리면 백여우가 된다고 유언을 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 유언을 따른다고 해도 어머니를 때리다니!"
"사또, 우리 어머니가 백여우가 되면 어떡합니까. 백여우가 되지 말라고 때렸
습니다."
바보 아들의 대답을 들은 원님은 기가 막혔습니다. '저런 멍텅구리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멍텅구리 나름대로 효심이 있는 놈이라는 생각
도 들었습니다.
"어머님께는 효도를 다해서 섬겨야 하는 법이니라. 앞으로 삼 년 동안 건넛마
을 효자네 집에 가서 살면서 어떻게 어머니를 모시는지 잘 배우도록 하라."
원님은 효자로 소문난 건넛마을 효자네 집으로 바보를 보냈습니다. 바보는 삼
년 동안 효자네 집에서 머슴을 살면서 어머니 모시는 법을 배웠습니다.
겨울 아침이면, 효자는 새벽부터 어머니의 옷을 자기가 입고 있다가,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벗어서 입혀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무명 옷을 아침에 입으면 살갗에 닿는 감촉이 섬뜩섬뜩해서 좋지 않느니라.
그래서 내 몸의 온기로 옷을 따뜻하게 데워서, 어머님이 입으실 때 찬 기운이
없으라고 그러는 것이다."
효자가 바보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효자가 자기 몸으로 데운 따뜻한 옷을 입혀 드리면 어머니는 "아따, 내 아들
참 효자로다." 하며 아들을 칭찬 해 주고 아주 기분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효자는 또 아침 문안을 드리고는 잠자리에 손을 넣어 보며 "어머님, 어젯밤에
춥지는 않으셨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따, 내 아
들 참 효자다. 방이 따뜻해서 아주 잘 잤다." 하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아따, 내 아들 참 효자다."라는 말을 입버릇
처럼 했습니다.
효자 공부를 삼 년 동안 한 바보도 어서 집에 가서 나도 저렇게 어머니를 모
셔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삼 년을 다 채우고 바보가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제가 이제 효자 노릇 잘하겠습니다. 이것 좀 잡수십시오."
바보 아들은 새경을 받은 돈으로 인절미를 사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습
니다. 매일 자기를 때리던 아들이 돌아온다고 하니, 원님에게 고해 바쳤다고 해
서 더 때리지 않을까 몹시 걱정하고 있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 하는 짓거리가 옛날과는 너무 딴판인데다 웬 찹쌀떡을 내놓으
니 어머니는 더럭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놈이 나를 죽이려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놈, 원님한테 고해 바쳤다고 나를 죽일 셈이구나. 인절미에다 독약을 섞은
것이 틀림없다." 하면서 어머니는 인절미를 마당에다 내팽개쳤습니다. 바보 아들
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바보는 어머니에게 저녁 문안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전에 없던
짓이라 어머니는 더더욱 의심이 생겼습니다. 바보는 문안을 드리고 손을 이불
밑에 넣어 보며 "어머니, 방은 따순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너 이놈, 이제는 내 방까지 뺏을 작정이구나." 하고 야단
을 쳤습니다.
반찬을 해다 놓고 "간이 맞습니까?" 하고 물으면 "내 반찬까지 뺏어 먹으려고
하는구나." 했고 아침에 어머니 옷을 입고 있다 벗어 드리려고 하면 "아이고, 내
옷까지 뺏어 입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효자 노릇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효자란 부모가 만들어 주
는 것이고, 부모 자식간에 서로 사랑하고 믿는 마음이 도타웠을 때 가정의 평화
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자식 또한 부모 모시기가 힘들어지는 것
입니다.
바보는 어머니의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쩔쩔맸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 바보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효자다운 효자 노릇 한
번 못해 보고 말았습니다.
제 2 부
게으름뱅이 장가가기
옛날에 밥만 먹고 똥만 싸는 게으름뱅이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별명도 '똥개'
였습니다. 나이는 장가들 때가 지났는데도, 워낙 게으르다는 소문이 나서 아무
집에서도 사위를 삼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하루는 '똥개'를 불러 놓고 야단을 쳤습니다.
"이놈아, 남들은 네 나이에 장가들어 자식을 몇씩이나 낳고, 부지런히 일해서
한 살림 모아 가지고 사는데, 너는 어째서 밤낮 요 모양 요 꼴로 게으름만 피우
고 있느냐." 하면서 더 이상 먹여 살릴 수 없으니 집에서 나가라고 다그쳤습니
다.
"어머니, 내일부터 떼밭을 팔 테니 곡괭이를 빌려다 주십시오."
게으름뱅이가 일하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기뻤습니다.
"그래라. 내 당장 빌려다 주마."
어머니는 곧장 이웃집에서 곡괭이를 빌려다 주었습니다.
똥개는 곡괭이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서며 "나 일하러 나가니까, 어머니는 점
심때 밥 많이 해가지고 오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게으름뱅이 아들이 난생 처음 일하러 나가는 모습에 감격해서 쌀밥
을 짓고, 호박잎을 따다가 살짝 데쳐 무치고, 열무김치를 새로 담그고, 달걀부침
도 하고, 걸게 장만해서 함지박에 담아 이고 아들이 떼밭을 일구는 곳으로 갔습
니다.
가서 보니, 똥개는 곡괭이로 뗏장을 딱 하나 일구어 놓고는 소나무 밑 그늘에
누워,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점심 함지를
팽개치듯 땅에 내려놓고, 주걱으로 똥개의 뺨을 때려 잠을 깨웠습니다.
"한나절 내내 뗏장 하나 파놓고, 그것도 일이라고 해 놓고 잠만 자다니, 넌 평
생 빌어먹기 십상이다."
"어머니, 세월에 좀 먹는 것 아니니까, 날마다 천천히 이만큼씩 파가면 언젠가
는 큰 밭이 될 테니 너무 서두르지 마셔요."
똥개는 천하태평이었습니다. 똥개는 점심밥을 아귀가 미어지게 먹어댔습니다.
빈 함지를 이고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자, 또 뗏장 하나를 파놓고 낮잠을 실컷
자고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똥개는 매일 떼밭을 일구러 나갔고, 어머니는 어쨌건 일하러 나가는 아들이
신통해서 점심 장만에 온 정성을 다했습니다.
똥개는 날마다 아침 나절에 뗏장 하나, 저녁 나절에 뗏장 하나, 하루에 겨우
두 장을 파고, 배 터지게 점심 먹고 그 자리에다 똥을 가득가득 싸두었습니다.
그럭저럭 한 달쯤 지난 뒤 똥개가 어머니에게 "어머니, 떼밭 다 팠으니 조를
심어야겠습니다. 이웃집에 가셔서 조 두 알만 얻어다 주셔요." 하고 부탁했습니
다.
어머니는 기가 막혔습니다.
"이놈아, 떼밭 판다고 네가 먹은 밥만 해도 서 말은 되겠다. 좁쌀 두 알이라
니..."
"어쨌거나, 내일은 파종을 할 테니 그렇게 해주셔요."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이웃집에 가서 조 두 알을 얻어다 주었습니다.
똥개가 심은 조 두알이 싹이 터서 자랐습니다. 똥을 하도 많이 싸두었던 밭이
라, 거름이 잘되어서인지 조가 탐스럽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똥개는 날마다 조
밭에 가서 조 밑에 똥을 누고 조에다 오줌을 누곤 했습니다.
어느덧 조가 모가지를 내밀고 여물기 시작했습니다. 조 모가지가 어떻게나 큰
지 똥개 팔로도 안을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하루는 또 어머니에게 "어머니, 오늘은 추수를 하러 갈 터이니 이웃집에서 도
끼 좀 빌려다 주셔요." 하고 부탁했습니다.
"조를 베려면 낫을 가지고 가야지 도끼는 웬 도끼란 말이냐?"
"어쨌거나 도끼를 빌려다 주셔요."
똥개는 어머니가 이웃집에서 빌려 온 도끼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갔습니다.
도끼로 조 밑둥을 찍어서 넘어뜨렸습니다. 아침 나절에 하나, 저녁 나절에 하
나, 그렇게 조 모가지 두 개를 도끼로 찍어 양 어깨에 하나씩 메고 집으로 왔습
니다.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일 년 내내 지은 농사가 조 두 모가지인 것
도 그랬지만, 조 모가지가 또 그렇게 큰 데에도 말문이 막혔습니다.
"똥개야, 네가 평생 처음 네 힘으로 농사지어 얻은 재산이 조 모가지 두 개 아
니냐. 그걸 들고 이제는 집을 나가 너도 독립해 살아라."
"그러지요, 뭐."
똥개는 두말 없이 조 모가지 두 개를 어깨에 메고는 집을 나갔습니다.
어디 만큼 갔는데 해가 저물었습니다. 마침 마을이 있어서 그 중 대문이 가장
큰 집으로 갔습니다.
"지나던 길손입니다. 하루 저녁 자고 가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집은 빈 방이 없어서 재워 줄 수 없구려."
"외양간도 좋으니 재워 주십시오."
겨우 허락을 받은 똥개는 외양간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똥개는 주인에게 조
모가지를 맡겼습니다.
이튿날 아침 똥개는 주인에게 가서 잘 잤다고 인사를 하고, 어제 저녁에 맡긴
조 모가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마루 밑에 넣어 둔 조 모가지를 꺼내 보니, 쥐들이 밤새 조를 다 먹어
치우고 빈 껍질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걸 어떡하지, 쥐가 다 까먹고 말았네."
"주인어른, 그러면 내 조 모가지를 먹은 쥐라도 잡아 주십시오."
"그렇게라도 하지요."
주인은 온 집안 식구를 동원해서 쥐 한 마리를 잡아 똥개에게 주었습니다. 똥
개는 쥐 뒷다리를 끈으로 묶어 질질 끌고 또 정처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또 해가 저물었습니다. 마침 마을이 있어서 그 중 대문이 가장 큰 집에 가서
하루 저녁 재워 주기를 청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똥개는 주인에게 가 잘 잤다는 인사를 하고 맡겨 놓은 쥐를 달
라고 했습니다.
"어허, 이걸 어쩐다. 우리 집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어버렸구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 고양이를 저에게 주십시오."
"가져가시구려."
똥개는 고양이 목에 끈을 달아 끌고 갔습니다. 또 해가 저물었습니다. 마침 마
을이 있어서 그 중 대문이 가장 큰 집에 가서 하루 저녁 재워 주기를 청했습니
다.
"빈방이 없어서 못 재워 주겠습니다."
주인이 거절했습니다.
"외양간도 좋고 나무청도 좋으니 자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럼 짚을 깔고 나무청에서 주무시오."
"고맙습니다. 주인어른, 이 고양이 좀 맡아 주십시오."
똥개는 고양이를 주인에게 맡겨 놓고 나무청에서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 주인에게 찾아가 잘 잤다는 인사를 하고 맡겨 놓은 고양이를 달
라고 했습니다.
"이걸 어쩌나, 우리 딸이 부엌에서 고기를 구웠는데 고양이가 그 고기를 훔쳐
먹었던 모양이오. 화가 난 우리 딸이 부지깽이로 고양이를 한 번 때렸더니 죽
어 버렸다는구먼."
"죽은 고양이는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럼 따님이라도 내놓으십시오."
이렇게 해서 똥개는 조 두 모가지로 예쁜 마누라도 얻고 부잣집 사위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내외는 온갖 지혜와 부지런으로 살림을 모으고, 어머니를 잘 모시면서 행
복하게 살았답니다.
짐승 말을 알아듣는 신부
윗골 사는 천석이가 아랫골 사는 화순이한테 장가를 들었습니다.
신부집 마당에 차일을 치고, 신랑이 기러기를 안고 신부집으로 가 친영례(신랑
이 신부를 친히 맞음)를 치렀습니다.
신부는 족두리를 쓰고, 원삼 입고, 연지곤지 찍고, 정말 선녀처럼 아름다웠습
니다. 신랑은 기분이 좋아서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신랑이 웃으면 처갓집 보리 농사가 안 된다는데..."
동네 어른들이 놀렸댔습니다.
친영례를 마치고 신랑이 신방에 들었습니다.
화조 병풍이 둘러쳐진 방에 신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머리에 얹혀 있는 족두리를 벗기고 원삼 고름을 풀었습니다.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의 신부 그림자가 촛불에 흔들렸습니다.
신부가 눈을 칩떠보아서는 안 된다고 해서 눈에 꿀을 발랐습니다. 웃어서도
안 된다고 해서 입에 대추를 물렸습니다.
그렇게 신부는 그린 듯이, 조각인 듯이 있어야 하는게 법도였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저고리 고름을 막 풀려고 하는데 신부가 배시시 웃었습니다.
배시시 웃다가 입에 물고 있던 대추를 방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신랑은 그만
기분이 상했습니다.
첫날밤에 신부가 웃다니... 필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도대체 이렇게
못 배운 사람과 어떻게 일생을 같이 산단 말인가.
신랑은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나 자기네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말하자
면 신부는 첫날밤에 소박을 맞은 것입니다.
신랑의 아버지가 몇 달 후 사돈네 집을 찾아왔습니다. 소박맞은 며느리가 어
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아들의 말대로 정말 행실이 배운 데
없이 구는지 알아볼 겸해서 찾아간 것입니다.
자기 딸이 어떤 일로 해서 소박맞은 것인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신부의 아버
지는 사돈이 찾아오자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에 술상을 차려 놓고 두 사돈 영감이 마주앉아서 술잔을 건넸습니다.
마침 신부 화순이가 술병을 내오는데 마당의 감나무에 까마귀가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화순아, 저 까마귀가 뭐라고 하냐?"
아버지는 딸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신랑 천석이의 아버지는 부녀간
에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신부의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돈 어른 저 아이가 짐승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재주를 가졌답니다. 그래서
저 까마귀가 뭐라고 말하는 것인지를 물어 본 것입니다."
"오호, 그래요? 참 희한한 재주도 다 가졌구나. 그래 까마귀가 지금 뭐라고 말
하더냐?"
"네, 아버님. 저 까마귀가 하는 말이 금년 여름에는 난데없는 서리가 내리겠다
는군요. 그러니 아버님, 전답을 팔아서 곡식을 사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왜 전답을 팔아야 한단 말이냐? 그리고 또 왜 하필이면 곡식을 사두어
야 한단 말이냐?"
"여름에 서리가 내리면 곡식이 다 죽을 게 아닙니까. 그러면 분명 내년 봄에는
식량이 부족해서 난리가 나겠지요. 그때 식량을 풀어서 전답을 다시 산다면, 곡
식 값은 오르고 전답 값은 헐값일 테니 큰 장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럴 법한 말이다."
신랑 천석이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전답을 모두 팔았습니다.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해지신 모양이다. 사돈집에 갔다 오시더니 난데없이 전
답을 다 팔아 치우게."
집안 식구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어른이 하는 일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석이의 아버지는 전답을 몽땅 판 후 곡식을 사서 곳간에 쌓아 두었습니다.
장마가 개고 불볕이 쏟아지는 여름이 왔습니다. 들판의 곡식들은 하루 다르게
자라 올랐습니다.
초복이 지나고 중복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느닷없이 콩알만한 웁가이 쏟아
져 곡식들을 쓰러뜨리더니 그날 밤에는 또 세상이 하얗게 서리가 내렸습니다.
그렇게 우박과 서리가 내리기를 보름쯤 계속했습니다. 곡식은 모두 삶아 데친
것처럼 시들시들해지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너나없이 농사를 모두 망쳤으니 흉년이 들어도 보통 흉년이 든 게 아닙니다.
식량이 떨어지자 먹을 것이 없어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거나 쌀겨나 깻묵을 먹기도 하고 칡뿌리를 캐
다 먹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갯가에 사는 사람들은 게를 잡아다 삶아 먹었습니다. 곡식이라면 좁쌀 한 주
먹, 보리 한 뒷박도 금값이었습니다.
천석이 아버지는 곡식을 풀어 전답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쌀 한 말이면
논 한 마지기를 사기도 하고, 밭 두 마지기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헐값에
굴러 다니는 논밭을 마구 사들였습니다.
개오릿들도 다 사들이고 범바윗들도 다 사들이고 삼벳들도 다 사들였습니다.
아들 이름처럼 천석꾼이 될 만큼 전답을 사모았습니다. 큰 부자가 된 것입니
다.
새며느리의 말을 따라서 큰 부자가 된 아버지는 천석이를 불러다 놓고 "우리
가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은 다 네 아내의 말을 따른 덕이다. 그러니 네 아내를
데려오도록 해라."
천석이는 하는 수 없이 아랫골로 가서 신부 화순이를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습
니다.
둘이서 고갯마루를 넘어 윗골로 오는 길에 신부가 신랑에게 물었습니다.
"첫날밤에 아무 말도 없이 저를 버리고 가버렸던 이유가 뭡니까?"
"첫날밤에 신부가 배시시 웃었기 때문이오. 신부가 웃다니... 법도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요."
그때야 신부는 그날 밤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아하 그랬었구나, 그러고 생각하
니 또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호호호..."
신랑 천석이는 또 화가 났습니다.
"이것 보시오.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는 산길이기로소니 새댁이 그렇게 큰소리
로 웃다니, 당신은 참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첫날밤에 쥐가 하는 말을 듣고 웃었던 것인데..."
그러면서 화순이는 첫날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신랑이 막 신부의 저고리 고름을 풀려고 할 때 부엌에서 쥐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형님 부뚜막 위 냄비에 돼지고기가 있는데 뚜껑이 덮여 있어서 꺼낼 수가 없
습니다." 하고 아우 쥐가 형쥐에게 말했습니다. 형 쥐가 아우 쥐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이 바보야, 머리를 써라, 머리를 써. 부뚜막을 이로 갉아서 허물면 냄비
가 자빠질 거 아니냐. 그러면 뚜껑이 열릴 것이다."
쥐가 하는 말이 하도 어처구니없어서 신부는 그만 배시시 웃음이 나왔던 것입
니다.
신부 화순이의 말을 듣고 신랑 천석이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두 내외의 웃음 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져 메아리가 지고, 웃음 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푸르르 푸르르 날라올랐습니다. 날아오르면서 "지지배배 꼬르릉 배배
쫑" 하고 울어댔습니다.
"여보, 저 새들이 뭐라고 하는 거요?"
천석이는 신부의 손을 잡으며 물었습니다.
"아들 다섯, 딸 다섯, 열만 낳아라 그러는데요."
신부 화순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
홍수가 졌습니다.
갑자기 쏟아져 내린 폭우에 산골짝 개울이 넘쳤습니다. 엄청난 개울물이 몰려
드는 바람에 샛강에 갑자기 물이 불어, 외나무다리도 휩쓸려 가고, 강가의 버드
나무도 휩쓸려 갔습니다.
윗동네에서 돼지도 떠내려오고, 집도 떠내려오고, 때로는 사람도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홍수는 순식간에 물이 불어서 일어나기 때문에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가지 있었던 홍수보다도 더 큰 홍수가 졌습니다. 집들이 물에 잠겼다 떠
내려갔습니다.
강 아래쪽, 바다 가까운 포구 마을에 사는 김 서방도 저 윗동네에서 홍수에
휩쓸린 짐승이며 물건들이 떠내려오자 고기잡이배를 타고 구출작업에 나섰습니
다.
마침 멧돼지 한 마리가 떠내려오기에 건져 올렸습니다. 노루 한 마리가 떠내
려오기에 건져 올렸습니다. 구렁이 한 마리도 떠내려왔습니다. 홍수 때 제일 무
서운 것이 바로 구렁이입니다. 이놈은 다급한 김에 무엇이든지 가까이 있기만
하면 친친 감아 버립니다.
만약 사람이 홍수에 떠내려가다가 구렁이를 만나면 영락없이 구렁이에게 감겨
죽고 맙니다.
김 서방은 삿대로 구렁이를 건져내 강가에 던졌습니다. 정신없이 떠내려가던
구렁이는 강가의 버드나무를 잽싸게 감았습니다. 그러고는 김 서방을 향해 고맙
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나뭇잎을 타고 떠내려오는 개미도 한 마리 건져 올렸습니다.
김 서방은 또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도 건져 올렸습니다.
"어푸 어푸, 꼭 죽는 줄 알았는데... 아저씨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 서방은 배를 강가에 댔습니다. 노루도 멧돼지도 고맙다는 듯 고개를 주억
거리고 산으로 뛰어갔습니다.
물에 빠졌던 사람은 갈 곳이 없어서 김 서방이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보, 내 옷 한 벌을 이분에게 주구려. 옷을 갈아입어야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겠소."
김 서방의 부인이 장롱에서 옷 한 벌을 꺼내 왔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김 서방은 그에게 옷을 갈아입
히고, 뜨뜻하게 군불을 지핀 사랑방에서 뭄을 녹이게 했습니다.
조금 후에 정신이 든 그 사람은 김 서방에게 죽을 목숨 살려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저는 박가이옵고, 소금을 지고 다니면서 파는 소금 장수입니다.
소금 가마를 지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홍수를 만나 물에 떠내려왔습니다. 이
제 저는 소금 가마도 지게도 다 물에 떠내려 보냈으니 소금 장사도 할 형편이
못 됩니다. 형님으로 모시고 이 집에서 농삿일을 거들어 드리게 해주십시오." 하
고 간청을 했습니다.
"오갈 데가 없다면 내 집에서 같이 살도록 합시다."
김 서방은 마음이 좋았던지 흔쾌히 허락하고, 그들은 그날부터 '형님' '아우'하
며 한집에서 살았습니다.
김 서방네 집에서 부치는 논 열 마지기는 뒷마을 최 부자네 땅이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박가는 그 논을 김 서방에게서 빼앗아 자기가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까 하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박가는 뒷마을 최 부자에게 찾아갔습니다.
"지주어른, 저는 포구 마을에 사는 김 서방의 동생입니다. 우리 형이 농사를
짓지 않고 낚시질만 다녀 수확을 많이 거두지 못합니다. 지주어른께서 형님을
불러다, 떼밭 서마지기를 하루 만에 파라고 하십시오. 못 파면 논을 떼겠다고 해
서 저를 주십시오. 만약 떼밭을 하루만에 다 판다면 지주님네 땅이 늘어나서 좋
고, 못 판다면 게으름뱅이한테서 논을 떼서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아닙니까?"
지주가 듣고 보니 자기가 손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튿날 지주가 김 서방을 불렀습니다.
"내 듣자 하니 자네는 밤낮 강으로 낚시질만 다니느라 농삿일을 소흘히 한다
면서?"
"지주어른, 농사철에는 한 번도 낚시질을 간 일이 없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누가 그런 말을 했건, 자네가 농사에 게으름을 부린다니, 내 논을 자네에게
맡길 수 없네. 자네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시험해 봐야겠네. 내일 중으로 안산에
다 떼밭 서 마지기를 파놓든지, 못 파겠으면 논을 내놓게."
김 서방은 풀이 죽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아우를 불러 하소연을
했습니다.
"동생, 지주어른이 내일 중으로 떼 밭 서 마지기를 파놓으라니 이걸 어쩌면 좋
단 말인가?"
"형님,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가서 파보는 수밖에요."
"자네도 좀 도와 주겠나?"
"아이고 이 일을 어쩌지요. 저는 앞집에 품앗이를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요."
박가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습니다.
김 서방은 괭이를 메고 안산으로 가서 떼밭 팔 자리를 골랐습니다.
한나절 내내 떼밭을 팠지만 다섯 고랑도 파지 못했습니다.
"이 일을 어쩔거나. 영락없이 논을 떼이고 말겠구나."
김 서방이 탄식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멧돼지 떼가 수백 마리 나타나 꿀꿀
거리며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제인 큰 놈은 바로 홍수 때 살려 준 멧돼지였습니다. 아마도 이 산속
에 사는 멧돼지들의 왕초였던 모양입니다.
산 속의 멧돼지란 멧돼지, 암놈이건 수놈이건 새끼건 어미건 다 몰고 와서 주
둥이로 떼밭을 일구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떼밭 서 마지기가 일구어졌습니
다.
멧돼지 떼는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왕초 멧돼지만 남아서 꿀꿀거리며 김 서방에게 다가왔습니다. 김 서방은 "네가
지난 홍수 때 강물에 떠내려가던 멧돼지로구나. 오늘은 이렇게 내 일을 도와 주
어서 고맙구나." 하고 멧돼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멧돼지는 또 한 번 꿀꿀거리며 머리를 주억거리고는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김 서방은 괭이를 어깨에 메고 지주의 집으로 갔습니다.
"지주어른, 떼밭을 다 일구어 놓았습니다."
"뭐라고? 오늘 하루 만에 떼밭 서 마지기를 다 일구었다고?"
지주는 노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주는 헐레벌떡 안산으로 가보았습니
다. 아니나다를까, 떼밭 서 마지기가 일구어져 있었습니다.
박가가 지주를 따라와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꼼짝없이 땅을 내놓게 될 것입니다."
"알았네."
지주는 집으로 돌아와 깨 서 되를 김씨에게 건네 주며 말했습니다.
"이 깨를 떼밭에다 뿌리게. 깨농사를 지어야겠네."
김 서방은 깨를 가지고 가 떼밭에 뿌렸습니다. 깨를 다 뿌린 김 서방은 지주
에게 가서 또 보고를 하였습니다.
"아닐세. 떼밭에는 깨농사가 잘되지 않는다고 하니, 감자를 심어야겠네. 내일
해가 저물 때까지 깨를 다시 주워 오게."
"지주어른, 흙 속에 뿌려진 깨를 다시 주워 오다니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
닐까요?"
"못하겠으면 논을 내놓게. 그러면 될 거 아닌가?"
김서방은 집으로 돌아와 걱정을 했습니다.
"형님, 무슨 일로 그렇게 걱정을 하십니까?"
박가는 시치미를 떼고 걱정해 주는 척 물었습니다.
"지주어른께서 밭에 뿌린 깨를 다시 주워 오라지 않는가? 이 일을 어쩌면 좋
은가?"
"형님,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헛고생만 하시지 말고 논을 내놓으십시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김 서방은 이튿날 새벽같이 테밭으로 나가 깨알을 주웠습니다.
해가 다 저물도록 주웠지만 한 홉도 채 줍지 못했습니다.
그때 어디서 몰려왔는지 개미 떼가 새까맣게 몰려와 깨알을 흙 속에서 찾아
물고는 함지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깨 서되가 모아졌습니다.
'홍수 때 구해 주었던 개미가 나를 도와 준 모야이구나.'
김 서방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깨 함지를 들고 지주의 집으로 급
히 갔습니다.
"지주어른, 깨를 다 주워 왔습니다."
"어디 보세."
지주는 말문이 딱 막혔습니다.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흙 속에 묻
혀 있는 깨 서 되를 하루 만에 다 주워 왔을까?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주는 그
래도 심술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여보게 김 서방, 깨가 한 알이 모자라는군." 하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다리 하나가 없는 개미가 절뚝거리며 깨 한 알을 물고 막 문지
방을 넘으려다가 미끄러져 도그르르 나뒹구는 것이었습니다.
김 서방은 얼른 깨알을 주워 들고 "여기 있습니다. 이 개미가 다리 병신이라
이제야 도착했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지주는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떼밭 서 마지기를 하루 만에 다 팠으며, 어떤 방법으로
깨 서 되를 하루 만에 다 주워 왔단 말인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일세.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김 서방은 홍수 때 이야기부터 멧돼지 이야기랑 개미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었
습니다.
"자네의 마음씨가 착해서 하늘이 도우신걸세.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박가의 말만
듣고 자네를 괴롭혔네. 내가 잘못했네. 저 범골 논 스무 마지기도 자네에게 줄
터이니 부지런히 농사를 짓도록 하게."
"지주어른, 고맙습니다."
김 서방은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박가를 불러
"여보게 아우, 자네가 지주어른을 충둥질해 나를 시험한 덕으로 논 스무 마지기
를 더 부치게 됐네. 그러니 전에 부치던 열 마지기는 자네가 부치도록 하게."
김 서방은 그렇게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농삿일도 끝나고 그해 겨울이 가까워 오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노루 한 마리가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와 김 서방 집으로 왔습니
다.
"아니, 너는 내가 지난 여름 홍수 때 물에서 건져 준 노루가 아니냐? 그 사이
새끼까지 낳았구나."
노루는 머루알 같은 눈을 껌벅거리며 김 서방의 바짓가랑이를 입으로 물고 끌
었습니다.
"그래그래, 나보고 따라오라는 뜻이로구나."
김 서방은 노루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노루는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가더니 어느 바위 밑을 앞발로 파는 것이었습니
다.
"그래그래, 거기를 파보란 말이지?"
김 서방은 노루가 파던 바위 밑을 팠습니다. 한 자쯤 파들어가자 뭔가 손에
걸렸습니다.
'이게 뭘까?' 하고 손에 걸린 것을 들어내 보니, 그것은 금은보화가 가득 든
가죽 자루였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파묻어 둔 보물임에 들림없었습니다.
그것은 파묻어 둔 지가 매우 오래 된 것이었습니다. 가죽 자루의 주둥이를 묶
었던 명주끈이 다 삭아서 쉽게 부스러졌습니다.
"이걸 날 보고 가져가란 말이냐?"
노루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노루는 자기의 목숨을 살려 준 사
람에게 은혜를 갚은 것입니다.
"고맙다. 너도 새끼를 잘 기르고 건강하게 살아라."
김 서방은 노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보물 자루를 짊어지고 산에서 내
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식구들을 불러모아 놓고 노루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보물이 바로 노루가 준 것일세. 이 보물을 나 혼자 갖기에는 너무 많으니
반은 아우에게 주겠네."
김 서방은 아우 박가에게 보물의 반을 떼어 주었습니다.
"자네도 사고무친(의지할 데가 없음)한 사람, 이 보물로 전답도 사고 장가도
들고 해서 편안히 잘살아 보게."
박가는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김 서방이 나누어 준 보물을 가
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박가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김씨가 가지고 있는 보물
까지도 탐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웠던 마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김 서방 몫의 보물까지도 자꾸 눈앞에 어
른거렸습니다.
'보물을 몽땅 내가 차지할 방법이 없을까?'
자꾸 그 생각만 떠올랐습니다.
박가는 살짝 집을 빠져 나와 관가로 갔습니다.
"사또, 포구 마을에 사는 김 서방이 어디서 났는지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있
습니다. 분명히 어디서 훔쳐 온 듯싶습니다." 하고 고발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김 서방이 붙잡혀 가면, 나머지 보물과 살림을 몽땅 자기가 다 차지할 속셈이었
던 것입니다.
원님은 당장 포졸을 풀어 김 서방을 잡아들였습니다.
"듣자 하니, 네가 어디서 금은보화를 도둑질해 많이 가지고 있다는데, 어디서
훔친 것이냐?"
"사또, 그것은 제가 훔친 것이 아니라 노루가 가르쳐 주어 얻은 것입니다."
"이런 미친놈이 있나. 노루가 어떻게 그런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단 말이냐?
헛소리하지 말고 바른 대로 아뢰어라!"
원님은 김 서방에게 곤장을 치고 담금질을 하는 등 고문을 하면서 바로 대라
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김 서방은 '노루가 가르쳐 준 것'이라고 밖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
다.
김 서방은 기절할 만큼 고문을 당한 뒤 감방에 갇혔습니다. 온몸은 상처투성
이였습니다.
김 서방이 감방에 갇혀 쇠창살 사이로 비쳐 드는 달빛을 보며 탄식하고 있는
데, 스르르 하며 풀잎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김 서방은 '이것이 무슨 소린가' 싶어 귀를 기울였습니다. 웬 구렁이 한 마리
가 스르르 기어오는데, 입에는 풀잎 하나를 물고 있었습니다.
"오라, 너는 지난 홍수 때 내가 물에서 건져 준 구렁이로구나."
구렁이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그러고는 입에 물고 온 풀잎
을 상처에 대주는 것이었습니다.
풀이 닿은 곳은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시면서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었습니다.
"고맙다, 구렁아. 네가 은혜를 갚는다고 약초를 가져왔구나."
구렁이는 혀를 몇 번 날름거리더니 스르르 풀잎 가르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습
니다.
김 서방은 구러이가 물어다 준 풀잎 덕분에 상처가 다 나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원님은 다시 고문을 할 채비를 차리고 김 서방을 감옥에서 동헌
마당으로 끌어냈습니다.
몰골이 말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참 이상도 하지요. 엊저녁에는
반주검이 되었던 사람이 저렇게 멀쩡할 수 있단 말입니까? 원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네가 분명 김 서방이렷다! 엊저녁엔 온몸이 피투성이였는데, 웬 조화로 그렇
게 말짱하단 말이냐?"
"사또, 지난 여름에 제가 구해 주었던 구렁이가 약초를 물어다 주어서 이렇게
상처가 다 나았습니다."
"그 약초를 증거로 내놓아라."
김 서방은 허리춤에 꽂아 두었던 풀잎을 원님에게 주었습니다.
원님은 등창이 나 고생하고 있는 자기의 등에 풀잎을 갖다 댔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렇게 금방 낫다니. 그동안 백약이 무효였는데... 그것 참
신기하구나."
원님은 마침내 김 서방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또, 짐승은 구해 주어도 머리 검은 사람은 구해 줄 것이 못 된다는 옛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지난 홍수 때 제가 구해 준 건 멧돼지와 개미와 노루와 구렁이와 사람이었습
니다. 짐승들은 다 은혜를 갚는데, 사람은 배신을 했습니다. 노루가 준 보물에
눈이 어두워 나를 모함한 것 같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있나? 그놈을 당장 잡아오너라!"
그리하여 그 못된 박가는 붙잡혀 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거짓말 잘해 장가간 총각
옛날에 딸 하나를 둔 농사꾼이 살았습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머슴을 두어야 하고 머슴을 두려면 새경을 주어야 했습니다.
욕심쟁이 농사꾼은 어떻게 하면 새경을 주지 않고 머슴을 부릴 수 있을까 하
고 궁리를 했습니다.
'옳지, 좋은 방법이 있다.'
농사꾼은 동네에 소문을 냈습니다.
"우리 집에 와서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어 주는 총각을 사위로 삼겠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총각이 일 년 농사를 거저 지어 주고 사위가 되겠노라며 지원했습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 금지옥엽 같은 딸을 그냥 줄 수
야 없지 않은가. 농삿일이 끝나면 거짓말을 해서 나를 속이도록 하게. 내 입에
서 '그건 거짓말이지'하는 말이 나오도록 말야."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총각은 일 년 동안 거짓말을 연구할 시간이 있으니 그까짓 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모내기를 하고 애벌김을 매고 재벌김을 매고 손씻기김을 매고 거름을 하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한 해 농사를 지었습니다.
다행히 풍년이 들어 수확도 좋았습니다.
농삿일을 다 끝낸 초겨울 어느 날, 총각이 말했습니다.
"이제 일도 다 끝났으니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해보게."
"뒷산에 커다란 호랑이가 살지요."
"그래, 나도 젊었을 적에 보았지"
"어젯밤에 제가 그 호랑이하고 씨름을 했지요."
"그래, 나도 네가 총각 귀신인 줄 다 안다. 귀신한테 딸을 줄 수 없으니 그리
알아라."
총각은 일 년 동안 헛고생만 하고 헛물만 켜고 말았습니다.
욕심쟁이 농사꾼은 이듬해 역시 새경 없는 머슴을 그런 방법으로 부렸습니다.
그렇게 해마다 공짜 머슴을 부리다 보니 재산이 부쩍부쩍늘어나 그 마을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 떠돌이 소금 장수 총각이 이 마을에 와서 그런 사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거짓말 시합에서 이기고 말리라."
이렇게 장담한 소금 장수는 부잣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금년에는 제가 머슴을 살고 거짓말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거지?"
"걱정 마십시오. 거짓말 시험에 합격하면 분명히 사위 삼는 것이지요?"
"암, 사위만 삼는 것이 아니라 이 재산도 다 물려주지. 우리 내외야 이제 편히
봉양받고 살 나이 아닌가."
소금 장수 총각은 그 많은 농사를 짓느라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모를 내고, 김을 내고, 거름을 하고, 새를 쫓고 하느라고 앞논으로 뛰어갔다
뒷논으로 뛰어가고.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해에도 풍년이 들었습니다. 수확을 다 끝낸 어느 날 소금 장수는 "이제는 거
짓말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디 한 번 해보게나."
"제가 어젯밤에 잠을 자다 등이 가려워서 긁었지 뭡니까. 그런데 등에서 날개
가 돋아나더란 말입니다."
"그래. 내가 어젯밤에 문틈으로 자네 방을 들여다보니 정말 날개가 돋더구먼."
"응응, 그래 하늘에서 복숭아 잎사귀가 떨어지길래 네놈이 천도복숭아를 따는
구나 생각했지."
"그랬습니다. 천도복숭아를 한 바구니 따가지고 와서 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맞아. 장터 사람들이 밤중에 웬 천도복숭아 장수냐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나도
들었다네."
"복숭아 하나에 1만 냥씩 받고 팔았지요. 그걸 다 파니 돈을 다 지고 올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주인어른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지요."
"이 사람아, 그래서 나도 한 지게 지고 오지 않았는가."
"그렇지요. 주인어른께서도 한 지게 져 오셨지요. 저야 머슴 사는 몸이라 당장
쓸 데도 없고 해서 그 돈을 주인어른께 맡겼지요."
"그렇고말고. 내가 맡았지."
"이 거짓말 시험에서 제가 합격하면, 이 집 사위가 되니 별 문제가 없지만, 시
험에 떨어지면 그 돈을 찾아 가지고 가서 장사나 할 생각입니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니 그 돈을 돌려주십시오."
"돈? 무슨 돈을 자네가 나한테 맡겨? 그런 거짓말 말게."
"하하하... 장인어른, 절 받으십시오. 합격했지요?"
"..."
이렇게 해서 소금 장수 총각은 부잣집 사위가 되어 그 큰 재산을 물려받고 행
복하게 살았답니다.
@사위 속인 장인, 장인 속인 사위
곰보 딸을 둔 욕심쟁이 영감이 있었습니다.
딸의 나이 스물이 되었는데도 장가오겠다는 총각이 없었습니다.
노처녀로 늙어가는 딸을 볼 때마다 한숨만 푹푹 나왔습니다.
"아이고 저 원수, 저 꼴을 어찌 본담."
영감 할멈은 또 한 해가 저물어가자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새해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딸을 시집보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딸의 얼굴
을 보면 다짐은 어디로 가고 그저 난감할 뿐이었습니다.
얼굴이 얽어도 너무 심하게 얽어서, 자기 딸이 아니라면 영감 할멈까지도 고
개를 둘렸을 것입니다.
하루는 부인이 말했습니다.
"영감, 우리가 죽으면 재산을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고, 우리 딸에게 장가오는
사람에게 재산을 반 떼어 주겠다고 광고나 한 번 내봅시다."
"딸 주고 재산 주고? 내가 이 재산을 어찌 모았는데?"
"그렇지만 어떡하겠어요. 딸 시집은 보내야 할 것 아녜요?"
영감 역시 재산이라도 떼어 준다면 재산에 욕심낸 어떤 놈이 장가들겠다고 나
설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대문에다 "우리 딸에게 장가드는 총가가에게는 재산의 반을 떼어 주겠
다."는 글을 써붙였습니다.
그러고도 두어 달이나 지난 어느 날, 가진 것이라고는 머리에 서캐 서 홉하고
몸에 불알 두 쪽 달랑 차고 있는 총각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이 집에 장가들겠습니다."
영감이 총각의 몰골을 보니 갈 데 없는 상거지인지라 한심스러웠습니다.
"네가 재산에 눈이 어두워 장가든 다음에 '곰보하고 살기 싫다'고 우리 딸을
버린다면 나만 손해 아니냐. 우리 딸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겠느냐."
"저도 노총각입니다. 가난하다고 누가 저에게 지십을 와야죠. 저는 가난해서
장가를 못 가고, 이 집 처녀는 재산은 있으나 얼굴이 곰보라서 시집을 못 가는
사정이 아닙니까. 그러니 두 사람이 해로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영감은 더 따지거나 더 가리다가는 겨우 나타난 신랑감마저 놓칠지 모르므로
서둘러 혼례식을 올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재산을 떼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 하나를 낳을 때까지는
재산을 줄 수 없다."고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러고는 재 너머 떼밭 옆에 집을 하나 지어서 딸 내외를 내보냈습니다.
이듬해 딸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을 업고 친정에 왔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재산을 주셔야지요."
"아니다. 아들 하나 가지고는 아직도 사내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없다. 아들 하
나를 더 낳을 때까지 기다려라."
이렇게 뒤로 미루고 미루고 하다 보니 어느덧 아들 셋을 낳았습니다.
그래도 친정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보, 장인어른이 나를 속였으니 나도 그냥 있을 수 없소. 당신은 내가 시키
는 대로만 하시오."
"저도 우리 아버지의 거짓말 때문에 당신 볼 낯이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할 터
이니 말씀만 하세요."
"당신은 내일 장에 가서 달걀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사오시오. 그리고 털이 하얀
암탉도 한 ㅁ나리 사오시오."
이튿날 아내는 장에 가서, 장에 나온 달걀을 모두 긁어 모아 사들였습니다. 큰
함지에 수북했습니다. 또 어렵사리 흰 암탉을 한 마리 샀습니다. 요즈음엔 흰 탉
이 많지만 옛날 우리의 토종 닭에는 흰 닭이 아주 귀했습니다.
"부탁하신 대로 사왔습니다."
"수고했소. 내일은 친정에 가서 아버님을 모셔오시오."
그러면서 아내의 귀에 대고 '이리저리' 하라고 일렀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귀
엣말을 듣고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튿날 친정집에 간 딸이 "아버지, 오늘 점심은 저희 집에 오셔서 드십시오."
"왜? 무슨 날이냐?"
"애아버지 생일이랍니다."
"그래? 그럼 가야지."
딸은 부엌에서 점심 장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인하고 사위는 마루에 앉아서
농사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흰 암탉이 꼬꼬댁 꼬꼬댁 울면서 마당 가운데로 뛰어왔습니다.
"여보, 닭이 알을 낳은 모양이오. 당신이 알 좀 꺼내오구려."
부엌에 대고 사위가 말했습니다.
"아이 당신도, 그 무거운 걸 아낙네가 어찌 듭니까? 당신이 좀 꺼내 오셔요."
부엌에서 딸이 맞받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장인어른,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사위가 일어나 헛간으로 가더니 함지 가득 달걀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웬 달걀이 그렇게 많으냐?"
장인은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예, 장인어른. 제가 아주 귀한 암탉 한 마리를 기르고 있습니다. 이놈의 닭이
알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낳는답니다. 저 암탉 좀 보십시오. 색깔이 저렇게 하
얀게 신비스럽지 않습니까?"
딸이 밥상을 들고 나왔습니다.
밥상 위의 반찬이란 반찬은 모두 달걀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달걀찜, 달걀부
침, 달걀말이, 달걀국, 달걀장조림...
장인은 그 암탉이 몹시 탐이 났습니다.
"얘들아, 밥은 나중에 먹고... 저 닭을 나한테 팔아라. 내 아무리 장인이라고
거져 달라고야 하겠느냐?"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저 달걀을 팔아서 일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고, 돈이 날마다 모이는데 아무리 아버지 말씀이지만 팔 수 없습니다."
딸이 정색을 하고 거절했습니다.
"얘야, 저 개오릿들 기름진 논 스무 마지기를 줄 테니 나에게 팔아라."
영감은 욕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장인어른, 장인어른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반을 저에게 주신다면 몰라도, 그
렇지 않고는 팔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자. 내 재샌의 반을 줄 터이니 닭을 이리다오."
"좋습니다. 그럼 논문서를 주십시오. 논문서하고 맞바꾸도룩 하시지요."
영감은 급히 서두느라 짚신도 거꾸로 신은 채 집으로 뛰어가서는 논문서를 가
지고 왔습니다.
"옛다, 논문서 여기 있다. 닭을 이리 다오."
사위는 흰 암탉을 붙잡아 장인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영감이 암탉을 안고 집
으로 가려고 막 사립을 벗어나는데 딸이 급히 아버지를 부르며 뒤따라와 말했습
니다.
"그 닭은 물을 보면 알을 낳지 않으니, 가실 때 고랑이나 개울을 건너지 마십
시오."
"오냐, 알았다."
영감은 닭은 안고 집으로 갔습니다. 집으로 가려면 큰 개울을 하나 건너야 했
습니다. 개울을 건너지 않고 빙돌아서 가려면 몇 날 며칠을 걸어도 집에 갈 수
가 없었습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쩐담.'
영감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닭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는 개울을 건넜습니
다.
집에 와서 암탉의 발을 새끼로 묶어 마당에 매놓았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어
서 닭이 알을 낳기를 기다렸습니다.
한 사흘쯤 지나서야 알을 낳았는데 여느 닭처럼 달걀을 딱 하나만 낳는 것이
었습니다.
영감을 화가 나서 딸에게 쫓아갔습니다.
"달걀을 하나만 낳으니 웬일이냐?"
"아버님, 집에 가실 때 개울을 건너셨지요?"
"개울을 건너지 않고 어떻게 집에 갈 수 있겠냐. 그래서 손으로 눈을 가리고
건넜다."
"그러니까 그렇지요. 이제 그 닭은 버렸습니다. 아이고 아깝다. 괜히 팔라고 성
화시더니 보물 닭만 버려 놨네."
딸은 오히려 아버지를 나무랐습니다.
"닭이 그리 됐으니 땅문서를 도로 돌려다오."
욕심쟁이 영감은 땅이 아까워서 도로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장인어른, 제가 장가들 때 살림의 반을 주신다고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
셨지요. 그 약속을 지금에야 지킨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욕심쟁이 영감은 딸과 사위에게 속은 것이 분했지만, 어차피 떼어 주어야 할
재산이라 생각하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시집 식구 버릇 고친 며느리
식구마다 손버릇이 나빠서 동네 사람들의 물건을 자주 훔치는 집안이 있었습
니다. 이 집은 어떻게 된 집안인지 온 식구가 손버릇이 나빴습니다. 그리고 서로
얼마나 감쪽같이 '누구네 물건'을 훔쳐 왔는지를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그 사람들의 손버릇을 눈치채고, 물건이 없어지기만 하면 이
집에다 의심을 두고 감시했습니다.
그 집에서 막내아들을 장가들여 며느리를 보았습니다.
워낙 도둑놈의 집안이라는 소문이 났기 때문에 가까운 마을에서는 장가들 수
가 없어 아주 먼 어느 산골 마을에서 며느리를 얻은 것입니다.
며느리가 시집와 보니 참 한심스러웠습니다.
집안 식구들이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누구네 집에서 무엇을 훔쳐 올 것인가
만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동네 이장네 집에서 비단 한 필을 훔쳐 왔습니다.
식구들은 비단을 풀어놓고, 저고리를 해입자는 둥, 두루마기를 해입자는 둥 좋
아라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물건을 잃어버린 이장네 식구들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집집마다 뒤지고
다녔습니다.
다른 집들은 다만 형식적으로 슬슬 살펴보는 것이었고, 사실은 이 집 안을 샅
샅이 뒤져 아주 버릇을 고쳐 놓을 속셈이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옆집까지 수색해 오는 것을 보고, 이 집 사람들은 비단을 어디
에 숨겨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는 속으로는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당장 다가오는 화는 면해야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른 풀어 헤쳐진 비단필을 안고 부엌으로 가서 큰 가마솥
안에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부뚜막에 앉아 불을 지폈습니다.
이장네 식구들이 와서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부엌에까지 들어와 살강(식기나 기구를 얹어 놓은 선반) 밑도 들여다보고 물
항아리 안도 들여다봤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솥 안에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없는
데... 이상하다?"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돌아갔습니다.
시집 식구들은 모두 새로 들인 며느리 칭찬에 침이 말라습니다.
"저렇게 물건을 잘 감추는 며느리가 있으니 이제는 도둑질도 안심하고 맘껏
할 수 있겠다."
며느리는 기분이 여간 언짢지 않았습니다. 위기를 면하게 해주었더니 이제는
아주 한통속으로 같은 도둑놈을 만들 작정인 모양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 며칠 후, 이번에는 남편이 과부네 집에서 돼지를 훔쳐 왔습
니다. 멱을 따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털을 벗기려 하는데 과부네 집에서 돼지를
잃어버렸다고 야단야단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돼지를 잡아먹으려던 이 집 식구들을 또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자왕이었습니
다. 그러면서 "아가, 며늘아가. 어떡하면 좋겠냐?" 하고 며느리 얼굴만 쳐다보았
습니다.
며느리는 모른 척 내버려두어, 동네 사람들한테 혼 좀 나게 해줄까? 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얼른 털 벗긴 돼지를 등에다 업었습니다. 그리고 포
대기를 감고 돼지 머리에 털수건을 씌웠습니다.
남편을 시켜 돼지를 잡던 자국도 깨끗이 치우게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집 안으로 몰려들어왔습니다.
"이 도둑놈을 잡기만 해봐라. 아주 동네에서 쫓아내고 말리라."
동네 사람들은 집 안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돼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돌아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자 집안 식구들은 돼지를 삶아 맛있는 부분은 며느리에
게 주었습니다.
며느리는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옷보따리를 싸들고 와 "저는 이렇
게 도둑질이나 해먹고 사는 집에서는 살 수 없으니 친정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식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며느리를 놓치면 다른 며느리를 영영 얻을 수
도 없으려니와, 도둑놈 집안이라는 소문이 사돈네 고을에까지 펴질 것이 뻔했습
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손을 잡아 앉히며 말했습니다.
"아가, 우리가 지금까지 바르게 살아오지 못했구나. 앞으로는 도둑질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해서 살도록 할 터이니 돌아가겠다는 말을 거두어라."
"정말입니까?"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단단히 약속을 받고 옷보따리를 풀었습니다.
그날 이후, 동네의 어느 집에서도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
다.
제 2 부
@복이 삼백 섬 있는 개백정의 딸
옛날 어느 세도 있는 대감집에서 늘그막에야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대감이
이 귀한 아들의 사주팔자를 짚어 보았더니 복이 없어서 굶어 죽을 팔자였습니
다.
"이거 큰일났구나. 복이라고는 싸래기 한 톨 없으니 이 일을 어쩔거나." 하고
걱정을 하느라 식사도 못했습니다.
"아니 대감, 무슨 걱정거리가 있길래 이렇게 진지도 안 드십니까?"
부인이 대감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보인, 우리 아기 말이오, 사주팔자를 짚어 보니 복이라고는 싸래기 한
톨 없이 굶어 죽을 팔자니 이걸 어쩌면 좋겠소?"
"대감도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우리 아들이 복이 없으면 복 있는 며느리를
얻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부인, 고맙소"
대감은 온 동네, 이웃 부락, 이 고을 저 고을을 돌아다니며 복이 삼백 섬쯤 있
는 며느릿감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복을 많이 타고난 며느릿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이 세월은 자꾸 흘러 어느덧 아들이 장가들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어디서 삼백 섬 복을 타고난 처녀를 찾는단 말이냐?"
대감은 그날도 며느릿감을 찾기 위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개다리가
삐죽 나온 소쿠리를 인 처녀아이 하나가 마주 오고 있었습니다.
"아가, 네 이름이 뭣인고?"
"순이이옵니다."
"나이는 몇인고?"
"열여섯이옵니다."
"생일은?"
길가는 처녀아이를 ㅂ들고 생년월일을 물어 사주팔자를 짚어 보니, 이게 웬
떡입니까! 이 아이의 복이 삼백 섬이나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대감은 크게 기뻐하며 처녀아이를 앞세우고 처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처녀아이의 아버지는 개를 잡아 연명하는 개백정이었습니다.
옛날에, 갭정은 천민이라고 해서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천민에게는
말도 낮추어서, 양반이 천민을 사사로운 일로 죽여도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동
네안에 들어와서 살지도 못했고, 지기들끼리 모여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천민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 시절에 대감이 개백정네 집에 직접 찾아왔으니 사건이라도 보통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순이의 아버지인 개백정은 혼비백산하여 대감의 발 밑에 끓어
엎드렸습니다. 자기 딸 순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알았습니다.
"대감님, 이 미천한 것이 무슨 죽을 죄를 지었는지 모르오나, 우리 내외의 외
동딸이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개백정은 앞 뒤 사정을 알아볼 정신도 없이 무작정 살려 달라고만 빌었습니
다.
"아닐세, 자네 딸을 내 며느리로 달라는 부탁을 하러왔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쇤네로서는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대감은 개백정에게 자기가 지금껏 삼백 섬 복을 타고 난 며느릿감을 구하러
다녔다는 이야기며, 저 아이가 삼백 섬 복을 타고난 아이이니 며느리로 삼겠다
는 이야기와, 앞으로는 개백정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논밭을 떼어 주겠다
는 말을 차근차근 알아듣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감은 비록 신분이 어울리지 않는 며느릿감이긴 했지만,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찾았던 며느리감을 구해서 아들을 장가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장가들기 전날, 대감은 아들을 불러서 간곡히 타일렀습니다.
"비록 신분이 미천하기는 하다만, 그 아이 덕에 네가 살 것이니 아이 셋을 낳
을 때까지는 싸우지 말고 잘 위해 주어야 한다."
대감은 이 복 없는 아들이 혹 자기 아내의 신분을 들춰내 쫓아내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단단히 타일렀습니다.
아들은 속으로 '나 같은 양반이 개백정 딸에게 장가를 들다니' 하는 불만이 있
었지만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아무 말 못하고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어느덧 두 아이를 낳았고, 대감도 노환으로 세상을 떴
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지금까지 참아 왔던 아내에 대한 불만을 떠뜨리기 시작했습니
다.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개백정 딸은 할 수 없어." "개백정 딸이 오죽하겠
어." 하고 욕을 해댔습니다. 심지어는 "기어나가거라, 이 개백정 딸아." 라고 말
하며 발길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순이는 '시아버님께서 내 사주팔자를 보시고 삼백 섬 복을 타고
났다고 하셨는데 어디 가면 굶어 죽기야 하랴.' 는 생각이 들어 그 집을 뛰쳐나
오고 말았습니다.
아이들도 뺏기고, 빈 몸뚱이로 집을 나온 순이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몇 날 며칠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정신을 잃고 쓰
러졌습니다.
순이가 눈을 떠보니,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 자기가 누워 있고, 웬 총각이
근심스러운 눈으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아,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여기는 심심 산골이고, 나는 혼자서 화전을 일
구며 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두 부부는 열심히 일해서 개간을 하고 곡식을
가꾸었습니다. 남편은 또 사냥을 해서 짐승 가죽을 장에 내다 팔아 돈을 모았
습니다.
두 사람이 힘을 모아 개간한 땅이 끝없이 넓었고, 차곡차곡 모은 돈이 창고에
가득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재산이 불었습니다. 그 사이에 자식도 아들 둘
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그렇게 지난 세월이 한 10여 년 흘렀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습니다.
"동냥 한 푼 줍쇼."
웬 거리가 대문 앞에서 굽실거렸습니다.
순이가 쌀 한 바가지를 퍼들고 거지에게로 가서 동냥자루에 쌀을 부어 주다
가, 그만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습니다.
"아... 아 아니, 다... 당신은...?"
이게 웬일입니까. 그 거지가 바로 순이의 본남편이었습니다.
"아, 아니 당신 아니오?"
거지도 부잣집 마나님의 얼굴을 보고 자기 아내임을 알았습니다. 거지는 순이
의 발 아래 엎드려 흐느껴 울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구박하고 쫓아낸 죄로 신세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소. 당신이
집을 나간 뒤로 살림이 기울더니 내가 그만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소."
순이는 지금의 남편에게 지나간 사연을 이야기하고 많은 재산을 떼어 본남편
에게 주었습니다.
본남편은 그 재산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켜 노후를 편하게 살았다
고 합니다.
놀고 먹으려다 큰코다친 게으름뱅이
여름이 왔습니다.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땅에서는 뜨거운 김이 숨막히게 올라왔습니다.
뭉게구름이 산너머에 솟아올라 두둥실 떠가는 하늘, 잠자리 한 마리 날지 않
는 하늘, 여름 한낮은 모든 것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소금 장수도 소금 지게를 작대기로 받쳐 놓고,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낮
잠을 잤습니다. 버들잎 사이로 살랑살랑 볼어오는 바람이 잠을 재촉했습니다.
버드나무에서는 매미 소라기 자지러졌습니다.
소금 장수는 신경질이 났습니다.
"저놈의 매미 우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구먼!"
소금 장수는 선잠 깬 분풀이로 버드나무 밑둥을 발로 탕 찼습니다.
잠깐 매미 울음 소리가 그치는 듯하더니 다시 자지러졌습니다.
"저놈의 매미를 붙잡아다 소금섬 안에 넣어 고생 좀 시켜야지."
소금 장수는 매미를 잡으려고 버드나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아무리 소리나는 곳을 보아도 매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버드나무 잎사귀 하나를 가만히 잡아 보았습니다. 그러자 매미 올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소금 장수는 그 잎사귀를 따서 소금섬 안에 넣었습니다. 버들잎을 소금섬 안
에 넣는 순간 아! 소금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금 장수는 참 이상스러운 일도 다 있다고 혼자말로 고시랑거리며 소금섬을
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어머니, 제가 보이나 안 보이나 잘 보셔요."
소금 장수는 버들잎을 자기 이마에 붙였습니다.
"안 보인다."
"정말 제가 안 보입니까?"
"그래, 이것이 웬 조화냐?"
소금 장수는 버들잎을 이마에서 떼냈습니다.
"지금도 안 보입니까?"
"아니다. 지금은 네가 이 앞에 있지 않니."
소금 장수는 버들잎을 어머니의 이마에 붙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라, 이것이 바로 그 '매미 날개'라는 보물이구나. 매미가 탈바꿈을 하지 못
하고 한겨울을 지내면, 날개가 겨울에 내리는 눈에 바래서 투명해져 안 보이게
된다는 그 보물이야."
소금 장수는 버들잎을 이마에 붙이고 장에 나가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도 전혀 알은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안 보이는 모양이지?"
소금 장수는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굴비 가게에 가서 굴비 한 두
름을 들고 나왔습니다. 가게 주인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습니다.
굴비를 들고 집에 온 소금 장수는 굴비 반찬에 저녁을 잘 먹었습니다.
소금 장수는 그날부터 소금을 팔러 다니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장에 가서 쌀
도 가져오고 고기도 가져오고, 옷감도 가져왔습니다.
일하지 않고도 얼굴에 기름기가 돌도록 잘사는 것이 이상해서 한동네 사는 친
구가 소금 장수에게 물엇습니다.
"너는요즘 장사도 안 다니면서 무슨 재주로 그렇게 잘사느냐? 나에게도 그런
비법 좀 가르쳐 다오."
소금 장수는 자랑삼아 매미의 투명한 날개가 붙어 있는 버들잎 이야기를 해주
었습니다.
친구는 곧바로 자기 집으로 가서 아내를 줄랐습니다.
"여보, 나도 소금 장사를 할 터이닌 지게와 소금 한 섬을 구해다 주시오."
"이게 모슨 말씀이랍니까? 당신 같은 게으름뱅이가 소금 장사를 하시겠다니
요?"
"아무 말 말고 구해다 주시오. 그러면 비단 신도 사다 주고, 비단 옷도 사다
줄 터이니..."
아내는 좀 긴가민가했지만 게으름뱅이 남편이 스스로 장사를 나가겠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서, 이웃집에서 빚을 얻어 가지고 지게와 소금섬을 장만해 주었습니
다.
게으름뱅이는 소금섬을 지고 친구가 말하던 산모퉁이로 갔습니다.
매미 우는 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렸습니다.
게으름뱅이는 살금살금 버드나무로 다가가서 버들잎을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
래도 매미 우는 소리는 여전했습니다. 이놈도 잡아 보고, 저놈도 잡아 보고, 땀
을 뻘뻘 흘리면서 아무리 버들잎을 잡아 보아도 매미 소리는 그치지 않았습니
다.
"아이고 힘들어 죽겟네. 이 많은 잎을 언제 다 한 번씩 잡아 본단 말이냐. 에
라 모르겠다."
게으름뱅이는 버들잎을 손으로 쭉쭉 훑었습니다. 그러고는 소금섬을 거꾸로
들어 소금을 모두 쏟아 내고는 버들잎을 소금섬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버들잎을 한 섬 지고 온 게으름뱅이는 마누라를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앉혀
놓고 "내가 보이오?" 하면서 버들잎 하나를 이마에 붙였습니다. 아내는 '별 이상
스러운 장난도 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이는데요."
게으름뱅이는 또 다른 버들잎을 이마에 붙였습니다.
"보이오?"
"보여요."
"보이오?"
"보여요."
처음에는 장난스럽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는데, 너무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다
보니 짜증이 났습니다.
"보이오?"
"보여요."
"보이오?"
"보여요."
이러다간 날이 샐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졸려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이 장난을 끝낼 속셈으로 "아이고, 이제 안 보여요." 하고 거짓말을 했습니
다.
게으름뱅이는 "버들잎 하나 찾기 참 힘들다." 며 한숨을 후유 내쉬면서도 좋아
했습니다.
그 버들잎은 담배쌈지에 곱게 넣어 두고, 나머지는 모두 두엄더미에 갖다 버
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부자가 되어 일하지 않고도 편히 살 수 있으니 걱정 마시오."
게으름뱅이는 큰소리를 탕탕 쳤습니다.
이튿날 게으름뱅이는 장에 갔습니다. 담배쌈지에서 버들잎을 꺼내 이마에 붙
이고는 "자, 어디로 갈까?" 하면서 비단 가게로 들어가 다짜고짜 비단 세필을 들
고 나왔습니다.
"아, 아니 저놈 봐라. 웬놈이 아무 말도 없이 남의 비단을 들고 나가는 거야?
저놈 도둑놈이로구나 안 그래도 비단이 자꾸 없어지더니 저놈 짓이로구나."
비단 장수는 몽둥이를 들고 쫓아와 게으름뱅이를 내려 쳤습니다.
"도둑놈 잡아라!"
쌀 가게 주인, 고깃집 주인, 신발 가게 주인, 지금까지 물건을 자꾸 도둑맞아
이놈 잡기만 해봐라 하고 벼르고 있던 장터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서 게으름뱅이
를 사정없이 두들켜 팼습니다. 그러고는 꽁꽁 묶어서 관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게으름뱅이는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습니다.
장가 시험에 합격한 총각
하늘 나라의 옥황상제는 일곱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귀여움을 받
는 막내아들은 개구쟁이였습니다.
옥황상제는 이 개구쟁이 막내아들이 항상 걱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막내왕자는 꽃밭에서 나비를 잡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이 꽃밭은 옥
황상제가 아끼는 꽃나무만 심어둔 곳으로, 옥황상제는 일에 시달려 머리가 아프
거나 피곤할 때, 이곳에 나와 쉬곤 했습니다.
막내왕자가 막 하얀 나비를 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어디선가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 목화꽃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파랑새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목화꽃잎이 하를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옥황상제는 꽃잎이 다 떨어진 목화꽃을 보고 몹시 화를 냈습니다.
"누가 이 꽃을 망가뜨려 놓았느냐?"
옥황상제의 노염이 하도 커서 신하들은 벌벌 떨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
다.
막내왕자가 앞으로 나아가 무릎 꿇고 아뢰었습니다.
"아바마마, 소자가 파랑새와 숨바꼭질을 하다가 그만 발로 밞았습니다. 소자를
벌해 주옵소서."
옥황상제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벌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랑새만 지
상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파랑새 너는 왕자님을 잘 모시지 못했으므로 지상으로 귀양 보낸다. 지상으로
내려가 인간들이 먹다 흘린 밥찌꺼기나 쌀알, 또는 징그런운 벌레를 잡아먹고
사는 참새 노릇을 하라."
파랑새는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만일 왕자가 변명
해 주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죽음을 당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파랑새는 막내왕자에게 "이 은혜를 꼭 갚겠다."는 맹세를 남기고 지상으로 귀
양을 갔습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옥황상제를 화나게 하는 일이 벌
어졌습니다.
막내왕자가 좀 심심했던가 봅니다. 막내왕자는 호랑이한테 업어 달라고 졸랐
습니다. 호랑이는 "왕자님, 그러다 떨어지시면 큰일납니다." 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개구쟁이 막내왕자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괜찮아. 내가 너의 귀를 꽉 잡고 있으면 떨어지지 않아. 어서 업어 달란 말이
야."
호랑이는 하는 수 없이 막내왕자를 업고 뛰었습니다.
"하하하, 신난다. 더 빨리 달려! 더 빨리!"
왕자의 성화에 못 이긴 호랑이는 번개처럼 빠르게 뛰었습니다.
벌이 꿀을 따가지고 돌아오다가 왕자의 얼굴에 부딪혔습니다.
"아이고 따가와라!"
왕자는 호랑이 귀를 잡고 있던 손으로 뺨을 만졌습니다. 그 바람에 왕자는 그
만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왕자는 무릎에서 빠알간 피가 솟았습니다.
옥황상제는 막내아들의 상처를 보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저 불측한 호랑이를 당장 사형에 처하라!"
호랑이는 그냥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습니다.
"아바마마, 호랑이가 싫다는 걸 제가 졸라서 그리 된 일이오니 제발 목숨만 살
려 주십시오." 하고 울면서 막내왕자는 애원을 했습니다.
옥황상제는 어쩔 수가 없다는 듯 "막내왕자의 말을 받아들여 호랑이 너의 사
형은 중지하겠노라. 다만 너를 고양이로 만들어 인간 세상으로 귀양을 보낼 터
이니, 인간 세상에 내려가 쥐를 잡아먹으면서 살도록 하라. 그리고 꿀벌 너는 왕
자가 호랑이 귀에서 손을 놓게 한 장본인이니 파리로 만들어 인간 세상에 귀양
보내노라. 마지막으로 막내 너는 계속해서 말썽을 부렸으므로, 너도 인간 세상에
귀양 보내 가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게 할 터이니 그리 알라."
겨우 목숨을 건진 호랑이와 꿀벌은 막내왕자에게 "이 은혜를 꼭 갚겠다"는 맹
세를 하고 인간 세상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그날 밤, 인간 세상의 조선땅 신안군 장산면 도창리, 그 마을에서 제일 가난하
게 사는 김 서방네 집에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김 서방은 나이 오십이 되도록 자식 하나 없이, 두 내외가 날품을 팔아서 살
아왔습니다. 그러다 늦게 아들을 얻을 것입니다.
두 내외는 비록 가난하게 살망정 남에게 손해 끼치는 일, 남에게 욕 얻어먹을
일이라고는 해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씨가 너무 착해도 재산이 안 모아지는 모양
입니다.
김 서방네 내외는 온갖 정성을 다해 아들을 길렀습니다. 비록 가난할망정 대
감네 외아들 못지않게 금이야 옥이야 길렀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자랄수록 인물이 수려하고 빼어나게 총명했습
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 서당에 보낼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외동이는 글공부가
하고 싶어 서당 훈장네 집에 나무를 해다 주고, 시간이 나는 대로 서당 아이들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공부를 하는데도 다른 아이들보
다 성적이 뛰어났습니다.
어느 날, 서당 훈장의 심부름으로 큰동네 이 진사네 집에 갔습니다. 이 진사네
집 대문에 무슨 방이 붙어 있었습니다.
"나의 무남독녀가 인물이 아름답고 성격이 유순하며 그 총명함이 놀랍도다. 사
윗감을 구하노니, 원하는 자는 세 가지 시험에 응하라. 세 가지 시험에 모두 통
과한 선비를 내 사위로 삼겠노라." 하는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외동이는 이 진사네 집 마당으로 들어가다, 언뜻 별당으로 들어가는 아가씨를
보았습니다. 마치 한 송이 백목련인 듯 그 자태가 우아하고 기품이 있어 몹시
아름다웠습니다.
'아하 저 아가씨가 이 진사의 따님인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러고는 그 아가씨의 자태에 홀린 듯 마당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도 시험 치르러 왔소?"
그는 누군가 말을 거는 소리에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시험을
치르고 돌아가는 총각들인 모양입니다. 모두들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외동이는 사랑채로 가서 훈장어른의 심부름을 왔노라고 말하고 이 진사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나오던 외동이는 자기도 시험을 치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에는 시험을 치르러 온 총각들이 대여섯 명이나 앉아 있었습니다.
이 진사는 빨간 주머니를 총각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주머니 속에 첫 번째 문제가 들어 있다. 그 답을 내일 이 시간까지 가져오
도록 하라. 그 다음에 두 번째 문제를 주겠다."
외동이도 주머니 하나를 받아 들고 왔습니다.
집에 와서 주머니를 열어 보니 종이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꽃을 한 송이 가
져오라."는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꽃이라? 그 꽃이 무슨 꽃일까?"
외동이는 골똘이 생각했습니다. 밤새워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빨랫줄에 앉아 있던 참새 한 마리가 "짹짹짹" 울면서 외동이의 머리 위
를 세 바퀴 돌더니 어딘가로 날아갔다가 이내 돌아와, 외동이의 짚신 앞에 꽃
한 송이를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외동이는 시간이 다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 꽃을 들고 달
음박질쳐 이 진사네 집으로 갔습니다.
이미 다른 총각들은 꽃 한 송이씩을 들고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외동이가 막
방으로 들어서자 이 진사가 나와 "그래, 꽃들을 가져왔느냐?" 하고는 한 사람씩
가져온 꽃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한 총각은 난초꽃을 내놓았고, 한 총각은 모란꽃을 내놓았습니다. 또 한 총각
은 매화꽃을 내놓았고 한 총각은 국화꽃을 내놓았습니다.
외동이가 가져온 꽃은 목화꽃이었습니다. 화려한 꽃들 속에 놓인 목화꽃은 수
수해서 오히려 눈에 띄었습니다.
"너는 왜 이 목화꽃이 가장 좋은 꽃이라고 생각한느냐?"
이 진사가 목화꽃을 집어 들며 물었습니다.
"목화꽃은 꽃 모양이 질박 소담해서 착하게 생겼고, 꽃이 진 다음에는 목화송
이가 또 꽃처럼 하ㅇ게 피어나 두 번 피는 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얀 목화
송이는 우리들이 입는 옷의 원료가 되니 얼마나 좋은 꽃입니까?"
이 대답을 들은 이 진사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 합격한 것입니
다.
이 대답을 들은 이 진사는 두 번째 시험 문제가 든 파랑색 주머니를 외동이에
게 주었습니다.
"지난번 시험은 지혜를 묻는 문제였다. 이번 시험은 용기를 묻는 문제이니 잘
풀어 보도록 하라."
집으로 돌아온 외동이는 파란 주머니를 열어 보았습니다.
"호랑이 눈썹 하나를 뽑아 오라."
밤새워 걱정하느라고 잠 한숨 못 잔 외동이, 이튿날도 팔베개를 하고 누워 걱
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외동이의 손에 턱을 받치고 졸고 있던 고양이가 슬
그머니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양이는 살금살금 호랑이 굴로 들어가 새끼들 틈에 섞여 누웠습니다. 어미
호랑이는 사냥을 나갔는지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어미 호랑이가 들어왔습니다. 새끼 호랑이들은 어미 호랑이의 젖을
먹으려고 왔다갔다 부산을 떨었습니다. 어미 호랑이가 새끼의 수를 헤아려 보
려 해도 왔다갔다 서두르는 통에 헷갈려서 셀 수가 없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어미 호랑이는 귀찮았는지 젖을 새끼들에게 맡기고는 벌렁 누웠습니다.
젖이 간지럽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미 호랑이는 새끼들에게 젖을 물린 채
스스르 잠이 들었습니다.
고양이는 그 틈에 어미 호랑이의 눈썹을 하나 뽑아 들고 줄달음쳐 집으로 왔
습니다.
고양이가 구해다 준 호랑이 눈썹을 들고 외동이는 이 진사네 집으로 갔습니
다.
이 진사는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지혜롭고 용맹스러운 사윗감이 나타났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또 한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신부감이 직접 내기로 되었습니다.
가는 모시발 저쪽에서 신부감이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소리로 물었습
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질긴 것이 무엇인가요?"
외동이의 머릿속에 '쇠가죽?' '배닻줄?' 같은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어디
선가 왱 하는 소리를 내며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방바닥에 앉더니 몸으로 무슨
글자를 쓰며 돌아다녔습니다. 다 쓰고는 또 왱 하는 날개 소리를 내며 날아갔습
니다.
외동이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쇠가죽보다 질기고 배닻줄보다 질긴 것은 '부부의 정'입니다. 평
생을 살아도 닳지 않고, 날마다 새록새록 끈질기게 이어져 무덤에까지 이어지고
자손만대에까지 이어집니다."
이 진사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외동이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덥석 잡
았습니다.
"합격일세. 내가 바라던 훌륭한 사윗감일세."
외동이는 이 진사의 사위가 되어 평생 동안 부인과 금실 좋게 살았습니다. 자
손이 번창하여 한 마을을 이루었고,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에도 살고 있
고, 먼 미래에도 살아갈 것입니다.
며느리의 지혜
옛날 어느 고을에 형제가 살았습니다. 형은 수백 마지기 논을 가지고 있는 부자이고, 동생은 형
네 논들 틈에 끼여 잇는 논, 겨우 서 마지기밖에 없는 가난뱅이였습니다.
동생은 막내아들을 장가들여 새며느리를 맞았습니다.
새며느리가 시집이라고 와서 보니, 식구는 열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농사
라고는 겨우 논 서마지기뿐이라, 살림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새며느리가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농사지어 먹고 살기는 힘들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 논을 팔아 장사를 하면 어떨까요?"
"장사가 농사보다 낫겠지. 네가 좋은 궁리가 있다면 그렇게 하자꾸나."
시아버지도 며느리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며느리는 판자에다 '이 논 서 마지기를 팔겠습니다. 사고 싶은 분은 연락 바랍니다.'라고 써
서
논 가운데다 꽂아 놓았습니다.
형이 논을 돌아보러 나왔다가 이 팻말을 보았습니다.
형은 곧바로 동생네 집으로 갔습니다.
"여보게 동생 어쩌려고 단 하나뿐인 논을 팔려고 하나?"
"형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농사지어 이 많은 식구 입에 풀칠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
침 새며느리가 장사를 해보겠다고 해서 논을 내놓았습니다."
사람 욕심이란 아홉 가진 사람이 하나 가진 사람 것을 빼앗아 열을 채우고 싶어하는 법입니
다.
수백 마지기 논을 가지고 있는 형도 욕심이 끝이 없었나 봅니다. 자기 논 사이에 끼여 있는 동
생
네 논까지도 자기가 갖고 싶었습니다.
"동생, 정 그럴 생각이라면 나에게 팔게나."
그렇게 의논을 맞춘 형제는 한 마지기에 벼 스무 섬씩 쳐서 벼 60섬에 흥정을 마쳤습니다.
"동생, 내가 인부들을 시켜 논값을 지워 보낼 테니 그리 알게."
형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벼 60섬을 사람들을 동원해 지게에 지워 보냈습니다.
마당에 쌓인 볏섬을 헤아리던 새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로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님, 이럴 수가 있는지요. 이 벼는 삼 년 묵은 것인지 오년 묵은 것인지, 쥐가 다 까먹고,
좀이 다 먹고 그래서 겨하고 쭉정이만 남았습니다."
"아니, 뭐라고?"
식구들이 볏섬을 풀어헤치고 쏟아 보니, 정말 겨와 쭉정이만 남아 있고 쌀알은 제대로 된
게
없었습니다.
욕심쟁이 형이 가마니 수만 채워서 보낸 것입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쩔거나. 우리는 이제 폭삭 망했구나."
시아버지가 탄식을 했습니다.
"여자가 뭘 안다고 논을 팔자고 하더니 이런 꼴을 당한단 말인가?"
남편이 아내를 구박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 일을 잘 처리할 터이니 아버님은 모른 척 보고만 계십시오."
새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안심시켜 놓고 남편에게 "서방님은 제 부탁 하나를 꼭 들어주셔야 합니
다." 하고 말했습니다.
"무슨 부탁인지 모르지만, 헝클어진 이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다면 들어주겠소."
"서방님, 오늘 안으로 구렁이 한 마리만 잡아다 주십시오. 죽이지 마시고 산 채로 잡아야 합니
다."
남편은 아내의 부탁이 희한한 것이었지만 사정이 다급한 판이라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산에 가서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를 산 채로 잡아왔습니다. 새며느리는 그 구렁이를
쌓
아 놓은 볏섬 가운데서 맨 꼭대기 볏섬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새며느리는 시아버지 생일 잔치를 벌인다며 온 동네 사람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큰
집
식구들이 와서 보니, 자기 집에서 보낸 볏섬이 아직 마당에 쌓여 있었습니다.
맨 꼭대기 볏섬이 꿈틀꿈틀하는 게 이상했습니다.
형님이 새며느리에게 물었습니다.
"아가, 저 볏섬이 어째서 꿈틀꿈틀하느냐?"
"큰아버님, 큰아버님네 업이 저희 집으로 온 모양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집집마다 집을 지키는 구렁이가 한 마리씩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업이라고
불
렀습니다. 그리고 집안이 망하려면 업이 먼저 집을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자기 집 업이 동생네로 왔다니 이거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 집 업이 이리 왔을꼬? 아가 그 업은 우리 것이니까 도로 돌려다오."
"큰아버님도 별말씀 다 하십니다. 이미 저희 집으로 왔으니 저희 업이지 그게 어떻게 큰아버
님
네 업입니까? 그건 돌려드릴 수 없습니다."
"논값을 벼로 준다고 했지 업으로 준다고는 안 했다. 벼 한 섬을 더 가져올 터이니 바꾸어
다
오."
"저 볏섬은 큰아버님께서 지워 보낸 것이니, 업도 큰아버님께서 보낸 것 아닙니까. 바꾸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업을 나에게 팔려무나, 벼 열 섬을 주겠다."
"싫습니다. 이제 가만히 있어도 부자가 될 터인데 왜 팝니까?"
"그럼 벼 백 섬을 줄 테니 팔려무나."
"싫습니다."
"그럼 너희 논 서 마지기를 돌려줄 테니 저 업을 돌려다오."
"싫습니다."
"그럼 논 열 마지기를 줄 테니 팔려무나."
"싫습니다."
형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업이 집에서 나가 집안이 폭삭 망하는 것보다는, 살림의 반이라도
떼
주고 다시 찾아온다면 그까짓 반 살림이야 금방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가, 우리 논 가운데서 제일 기름진 저수지 밑 백 마지기하고 너희 논 서 마지기도 돌려
줄
테니 저 업을 나에게 팔아라."
새 며느리는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척하며 말했습니다.
"큰아버님께서 정 그리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일은 여기 모이신 동네 어른들
이
다 들으신 바이니 증인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대접을 잘 받은 터라 "틀림없이 증인이 되겠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형은 꼼짝없이 아까운 논 백 마지기와 새로 산 서 마지기를 넘겨 주고 말았습니다.
형은 구렁이가 든 볏섬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 곳간에 넣어 두었습니다. 볏섬 안에 갇힌 구렁
이
는 숨이 막혀 죽고 말았습니다.
형은 재산을 반이나 동생네에게 떼준 것이 아깝고 억울해서 그만 화병이 났습니다.
동생네는 백 마지기 농사를 잘 지어 해마다 땅을 늘렸습니다. 3년이 지난 뒤, 동생네는 수백 마
지기 땅을 가진 부자가 되었고, 형네는 병구완하느라고 자꾸 땅을 팔아 가난뱅이가 되고 말았
습
니다.
새며느리가 어느 날, 이바지(힘들여 만든 음식)를 한짐해서 머슴에게 지워 가지고 큰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큰아버님, 제가 큰아버님을 속였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큰아버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달린 논값을 쭉정이로 주신 것은 너무 과하신 처사였습니다."
"오냐오냐, 내가 잘못했다. 내 양심이 그렇게 나빴으니 오늘날 병도 걸리고 살림도 망한 것 아
니겠니."
"큰아버님, 너무 상심 마십시오. 우리도 이제는 논이 몇 곱절 늘어나서 부자가 되었으니 큰아버
님한테 받았던 논 백 마지기는 돌려드리겠습니다."
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카며느리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가, 너는 참 훌륭한 며느리다. 두 집을 다 살려 내고, 이 시애비 마음도 회개시키고... 네 은
공을 뭣으로 갚는단 말이냐."
형의 병은 그날로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두 형제의 우의는 두터워졌고 두 형제의 살
림
도 날로 불어나 떵떵거리며 잘살았습니다.
새끼 서 발로 얻은 큰 재산
옛날 어느 마을에 게으름뱅이 아들을 둔 과부가 살았습니다.
게으름뱅이 아들은 날마다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 요강에다 똥 누고 문턱 베고 낮잠만 잤습
니다.
과부는 외아들 하나 믿고 사는데, 나이가 들수록 아들이 게으름만 피우니 화가 났습니다.
"얘야, 이 똥개야. 너도 이제는 남들처럼 일 좀 해라."
"어머니, 나는 일을 해보지 않아서 일을 할 수가 없는데 무슨 일을 하지요?"
"정 할 일이 없으면 새끼라도 꼬아라."
"그럼 새끼를 꼴 테니 짚 좀 갖다 주셔요."
"아이고 내 팔자야."
과부는 신세 타령을 하면서 짚 한 뭇(장작이나 잎나무를 한 묶음씩 작게 묶은 단)을 갖다 주
었
습니다.
게으름뱅이는 하루 종일 문을 닫아걸고 열심히 새끼를 꼬았습니다.
저녁때 과부가 밭에서 돌아와, 아들이 새끼를 얼마나 많이 꼬았는지 보았습니다.
"그래, 새끼를 얼마나 꼬았느냐?"
"열 두발 꼬았습니다."
"어디 좀 보자."
게으름뱅이는 자기가 꼰 새끼를 양팔을 벌려 "한 발, 두 발, 열두 발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밥 빌어먹기 똑 알맞겠다. 그 새끼 가지고 집에서 나가거라."
게으름뱅이는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새끼 서 발을 들고 어디 만큼 걸어가던 게으름뱅이는 다리가 아파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었
습니다. 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파는 항아리 장수도 그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
고
있었습니다.
항아리 장수가 잠꼬대를 하면서 발로 지게를 건드렸습니다. 지게가 넘어지면서 항아리가 굴
러
떨어져 두 쪽으로 깨지고 말았습니다.
항아리 장수는 "아이고 이걸 어쩌나." 하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 새끼로 묶으십시오. 그러면 물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곡식은 담아 놓고 쓸 만하겠습니다."
게으름뱅이는 새끼를 항아리 장수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항아리 장수는 고맙다고 하면서 작은 물동이 하나를 게으름뱅이에게 주었습니다.
게으름뱅이는 물동이를 들고 어디 만큼 걸어갔습니다. 목이 말랐습니다. 마침 우물이 있어서 물
을 마시려고 다가갔습니다.
우물가에서 한 젊은 새댁이 울고 있었습니다.
"새댁은 웬일로 울고 계시는지요?"
"저는 시집온 지 하루밖에 안 된 새댁인데 처음 물길러 왔다가 물동이를 깨뜨렸답니다. 그래
서
어떻게 집에 들어가나 걱정이 되어 울고 있답니다."
"그래요? 마침 내가 물동이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이걸 드릴 터이니 가져가십시오."
새댁은 마치 토끼가 용궁에 갔다 온 것처럼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고마우실 데가... 제가 시집오면서 흑염소 세 마리를 가져왔답니다. 저기 저 흑염소가
제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를 드릴 터이니 가져가십시오."
게으름뱅이는 새댁에게서 흑염소 한 마리를 얻어 고삐를 끌고 길을 걸었습니다. 어느 마을
을
지나가는데 한 아주머니가 그를 불렀습니다.
"총각, 저기 흑염소 끌고 가는 총각!"
"저를 부르셨습니까?"
"저를 부르셨습니까?"
"내 사정 이야기 좀 들어 보시오. 우리 남편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약방어른께서 흑염소를
고
아 먹어야 낫는다는구려. 그 염소를 저에게 주시면 대신 소를 한 마리 드리리다."
"사람을 살린다는데 거절할 수 없는 일이지요."
게으름뱅이는 흑염소를 아주머니에게 주고, 대신 소를 얻어 가지고 또 길을 걸었습니다. 어디
만큼 산길을 가는데, 사냥꾼이 곰을 잡아서 몽둥이에 묶어서는 어깨에 메고 오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게으름뱅이를 불렀습니다.
"모를 내려면 논에 쟁기질을 해야 하는데 우리 집에 소가 없어 큰일입니다. 이 곰을 드릴 터
이
니 그 소를 저에게 주실 수 없겠습니까?"
"나는 쟁기질할 땅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게으름뱅이는 곰을 얻어 가지고 또 길을 걸었습니다.
가다가 보니 서울에 닿았던가 봅니다. 남대문 앞에 이르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데
로
갔습니다. 커다란 종이에 "공주님이 병에 걸리셨다. 웅담을 구해 오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
다."는 내용의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게으름뱅이는 곰을 가지고 궁궐로 갔습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큰 상을 내렸습니다.
게으름뱅이는 새끼 서 발로 큰 재산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제 복은 제가 타고나는 모양이
라
고 수군거렸습니다.
백여우 알아보는 지겟작대기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서른 살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간 노총각이 있었습니다.
노총각은 날마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 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습니다.
이날도 노총각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했습니다. 제법 푸르게 돋아난 연초록 나뭇잎의 솜털
이
화창한 햇살에 비쳐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 야들야들하고, 어린애 뺨의 촉감 같은 잎사귀가 몸에 스치면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기분
이
좋았습니다.
이름 모를 풀꽃들이 부끄러운 듯 피어나 산들바람에 가느다란 허리를 하느작거리고, 어디선
지
노랑나비 흰나비 들이 날아와 꽃 근처에서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습니다.
노총각은 나무를 반 짐쯤 하다가 땀을 식힐 겸, 지게를 비스듬히 뉘어 놓고 몸을 기댔습니다.
마음이 왠지 모르게 싱숭생숭했습니다.
'아이고 이렇게 좋은 날 장가도 못 가고 맨날 나무나 해야 하는 내 팔자라니...'
노총각은 자기도 무르게 한숨이 나왔습니다.
졸음이 슬그머니 찾아왔습니다. 눈꺼풀이 슬슬 잠기고, 사지가 녹작지근해졌습니다. 밭 밑에
무
더기로 피어 오른 진달래꽃 색깔이 옆집 순이의 치맛자락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꿈속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세상은 한껏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자잘한 다복솔 너머로 여우 한 마리가 왔다갔다하더니 재주를 한 번 팔짝 넘으면 처녀가 되었
다가, 또 한 번 팔짝 넘으면 여우가 되고, 다시 한 번 팔짝 넘으면 호호 백발 할머니가 되기도 하
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꿈속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진짜 같기도 했습니다.
여우는 힐끔힐끔 사방을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안심한 듯 재주를 팔짝 넘었
습
니다. 초록 저고리 빨강 치마를 입은 새댁으로 변했습니다.
새댁으로 변한 여우는 머리에 보따리 하나를 이고 화장 냄새를 솔솔 풍기며, 진달래빛 치맛
자
락을 봄바람에 팔락이면서 오솔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노총각은 눈을 번쩍 떴습니다.
'저건 백여우임에 틀림없다. 저 요망한 것이 누군가의 넋을 빼먹으러 가는 모양이다.'
이런 생각이 노총각의 머리를 스쳤습니다.
노총각은 나뭇짐도 내팽개치고, 손바닥에 침을 탁 뱉은 뒤, 지겟작대기를 단단히 쥐고 새댁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나무 뒤에 숨기도 하고 바위 뒤에 몸을 숨기기도 하면서 새댁이 눈치채지 못하게 뒤를 밞았습
니다.
새댁은 바삐바삐 걸어 재 너머 마을로 갔습니다.
재 너머 마을 꺽다리네 집에서 둘째딸을 시집보내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마당에 하얀 차일을 치고, 동네 사람들이랑, 친척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고기를 굽기도 하고, 부침개를 부치기도 하고, 떡메로 떡을 치기도 하는 등 음식을
장만하느라 부산스러웠고, 방이며 차일 아래는 음식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웃음 소리랑 떠드
는
소리로 왁자지껄했습니다.
잔칫집이 가지고 있는 활기차고 행복에 넘치는 시끄러움이 가득했습니다.
"아이고, 저 아인, 샛골로 시집간 이 집 큰딸이 아니냐?"
아낙네들이 보따리를 이고 들어오는 새댁을 가리키며 알은체를 했습니다.
내일 혼례식을 치를 신부인 듯한 어여쁜 처녀가 맨발로 뛰어나오며 "언니, 언니. 왜 혼자 오는
거유. 형부는 안 오시고." 하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네 형부는 집에 할 일이 좀 있어서 내일 오기로 했다. 아이고야. 너 시집갈 아이가 맨발
로...
이게 무슨 흉한 꼴이니, 어서 들어가자."
새댁은 동생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뒤따라온 노총각은 백여우가 능청떠는 꼴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낯선 사람인 노총각의 손을 잡아 끌어 상머리에 앉혔습니다.
"잔칫집에 오셨으니, 실컷 술이라도 드십시오."
"고맙습니다."
시골 잔칫집은 누구에게나 인심이 후했습니다. 상을 대충 치우더니 새로 안주와 술을 내왔습
니
다.
산길을 잔뜩 긴장하며 걸어온 참이라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말랐습니다.
노총각은 막걸리를 큰 사발로 거푸 석 잔이나 마셨습니다. 당장 트림이 '끄윽' 올라오고 술기
운
이 몸에 올랐습니다. 푹 꺼졌던 뱃골도 든든히 차오르고, 팔뚝의 근육이 불끈 솟아올랐습니다.
"여러 어르신네들. 술과 고기 안주와 떡을 주셔서 오랜만에 잘 먹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갈 수
는 없고, 제가 오늘 이 신부 댁을 위해 좋은 일을 한 가지 하고 가겠습니다."
"어,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그래 떡이라도 한판 쳐주고 가시겠습니까?"
"그런 일이야 이 동네 젊은이들이 다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남이 못하는 일을 해드리겠습
니
다."
"그게 무슨 일인데요?"
"이 지겟작대기를 보십시오. 이건 보통 작대기가 아닙니다. 이 작대기는 사람과 백여우를 구별
할 줄 하는 작대기입니다."
노총각은 지겟작대기를 쳐들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예로부터 혼삿집에는 신부 예쁜 것을 질투하는 귀신이나 백여우가 꾀는 법입니다. 혹 이 집
에
도 백여우가 둔갑해 가지고 와서 신부의 혼을 빼먹을는지 모르잖습니까. 여러분은 내가 하는
대
로 구경만 하시기 바랍니다."
노총각은 지겟작대기를 단단히 움켜잡고, 아까 새댁이 신부감이랑 들어간 안방으로 가서 문
을
벌컥 열었습니다.
신부의 손을 다정히 잡고 신부의 넋을 빼먹을 참이던 새댁이 깜짝 놀라서 물러앉았습니다.
"웬놈이냐?"
"웬놈은 웬놈. 너 이 요망스러운 백여우야. 내 손에 죽어봐라!"
노총각은 다짜고짜 지겟작대기로 새댁을 후려갈겼습니다.
신부네 집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작대기에 얻어맞은 새댁이 "캥" 하면서 널브러지는데, 세상에 별일도 다 있지요. 그건 이 집
큰
딸이 아니라 하얀 벽여우가 아닌가요.
사람들은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신부감 처녀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는 노총각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습니다.
"저의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 무엇으로 갚아야 할는지요. 비록 내일이 저의 혼례날이오나,
이
미 이 목숨은 그대의 것이니 그대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도리일 것 같습니다. 거두어 주
십
시오." 하고 간청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대표를 뽑아 이웃 마을의 신랑네 집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
을
설명하고, 이 혼사를 없던 걸로 해달라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신랑집에서도 신부의 뜻이 갸륵하고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튿날, 신랑이 바뀌어 혼례식이 올려졌습니다. 노총각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장가를 들게 된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읍내 최 부자가 새신랑을 찾아왔습니다.
"소문을 듣자 하니,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겟작대기가 영험하다면서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값
을 치를 것이니 그 지겟작대기를 나에게 파시오."
새신랑은 아주 높은 값을 불러 그 지겟작대기를 팔았습니다.
그후 새신랑은 그 돈으로 많은 논밭을 사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제 4 부
며느리의 효성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홀로 된 늙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갓난아이 하나를 둔 젊은 내외가 살았습니다.
며느리는 마음씨가 곱고 효성이 지극해서 시아버지를 잘 모셨습니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침 나절이 가고 저녁
나절이 가고, 해가 꼴깍 넘어갔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며느리는 기다리기도 애가 타서 뒷산으로 시아버지를 찾으러 갔습니다. 애기를 업고 산속으
로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로지 시아버지 걱정에 밤길이 무서운 것도 모르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느 바위 밑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눈에 파란 불은 켠 호랑이가 앉아 있고, 호랑이 앞에 시아
버지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호랑아, 우리 시아버님 돌려다오."
"싫다. 못 주겠다."
"호랑아, 우리 시아버님은 늙어서 고기도 질기고 맛이 없을 게다. 그러니 돌려다오."
"그럼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애기하고 바꾸자."
"그러자꾸나. 자, 우리 애기 줄 테니 시아버님은 돌려다오."
며느리는 '애기는 또 낳으면 되지만, 시아버님은 오직 한 분이시니, 애기하고 바꾸는 것이 좋
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며느리는 등에 업은 애기를 땅에 내려놓고, 시아버지를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들에 일하러 나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도 안 계시고 아내와 애기도 없고, 집
안
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웬일로 집 안에 아무도 없나?'
아들은 걱정하며 횃불을 들고 뒷산으로 갔습니다. 한참 만에 기절한 아버지를 모시고 오는
아
내와 만났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아버님이 나무하러 가셨다가 호랑이를 만난 모양입니다."
"애기는 어쨌소?"
"호랑이가 애기하고 아버님하고 바꾸자고 해서 애기를 호랑이한테 주고 아버님을 구출해 오는
길입니다."
아들은 그 자리에서 아내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효부요."
"아이고 당신도. 애기는 또 낳을 수 있지만 아버님은 한 분 아닙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
을 뿐인데, 칭찬은요. 당치 않으십니다."
"아니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이오?"
남편은 아내에게 큰절을 자꾸 올렸습니다.
아버지를 집에 모셔다 두고, 아들은 호랑이를 찾아서 뒷산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도 애기
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호랑이도 며느리의 행동이 감동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애기를 잡아먹지 않고 등에 태우고 서
울
로 가서, 자식없는 대감집 문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옛날부터 문 앞에 버려진 아이는 자식삼아 기르는 법입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대문 앞을 쓸던 마당쇠가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대감마님, 대문 앞에 웬 아기가 있는뎁쇼."
대감은 하늘이 보내 준 아들이라고 좋아하며, 그 아기를 아들로 삼았습니다.
아기 없는 집에 아들이 생겼으니 얼마나 귀하게 키우겠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하며 길렀습니다.
이제 이 아기는 산골에 사는 평민이 아니라 대김집 외동아들인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장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했고, 그 인물과 총명함이 뛰어나 공주에게 장
가
를 들었습니다.
대감 내외는 업동이가 잘된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의 친부모는 비록 아기가 호랑이밥이 된 것으로 알고 가슴 아파하며 살았지만, 뒤이어
아
들 셋, 딸 둘을 더 낳아 슬픔을 잊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아기가 임금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비록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하더라도, 얼마나 잘된 일입니까?
하느님네 쌀곳간을 꿰뚫은 왕대
옛날 옛적에 흥부 놀부네 같은 형제가 살았습니다. 동생은 흥부처럼 마음씨가 착했는데 가난
하
게 살고, 형은 놀부처럼 심술쟁이였는데 부자로 살았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동생이 마음씨가 착해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설 명절이 다가오는데 쌀 한 줌 없어, 어머니에게 따뜻한 쌀밥 한 그릇 지어 줄 형편이 아니
었
습니다. 동생은 그것이 가슴 아파, 나무라도 한 짐 해서 장에 내다 팔 생각으로 산으로 갔습니다.
동생은 지게통발을 지겟작대기로 두드리며 "설은 설은 다가오는데 우리 노모 어쩔거나."라는 말
을 노랫가락처럼 흥얼거렸습니다. 그러면서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참을 그러면서 걸어가는데 어디서 자기 말을 흉내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설은 설은 다가오는데 우리 노모 어쩔거나."
동생이 그렇게 말하면 "설은 설은 다가오는데 우리 노모 어쩔거나."
그렇게 누가 따라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은 발을 멈추고, 그 말을 흥얼거리면서 따라 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조그마한 개울에 남생이(자라) 한 마리가 엎드려서 자기 말을 흉내내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남생이를 잡아서 장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말하는 남생이 사시오. 말하는 남생이오." 하고 동생은 목청껏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남생이를 구경하려고 뱅 둘러섰습니다.
"남생이가 말을 한다고요? 어디 한 번 들어 봅시다."
장에 나온 사람들이 남생이 말을 들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설은 설은 다가오는데 우리 노모 어쩔거나."
동생이 그렇게 말하자 "설은 설은 다가오는데 우리 노모 어쩔거나."
남생이가 따라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는 남생이가 있다며 놀라워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마침 차례 지낼 물건을 사러 나왔던 큰동네 장 부자 영감이 이 남생이를 보고 욕심을 냈습니
다.
"여보게, 그 남생이 얼마에 팔 텐가?"
"네, 영감님. 이 지게로 지고 갈 만큼만 돈을 주신다면 남생이를 팔겠습니다."
옛날 돈은 엽전이었습니다. 꿰미에 꿴 엽전은 몹시 무거웠으므로 지게에 지고 갈 만큼이라
고
해도 그리 큰 돈이 아니었습니다.
장 부자는 남생이를 사가지고 가고, 동생은 돈을 지게에 잔뜩 지고 비틀비틀 걸어서 겨우 집
에
돌아왔습니다.
동생은 그 돈으로 쌀이랑 고기랑 사다가 설을 아주 걸게 지냈습니다.
"아가, 웬 쌀밥에 고기에 떡에 술이냐? 도둑질한 것은 아니지?"
늙은 어머니는 느닷없이 장만해 온 호사스런 음식을 보고 마음이 안 놓였습니다.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형님께서 어머님 대접에 쓰라고 돈을 한 짐 주어서 사온 것입니다."
동생은 말하는 남생이 이야기를 해도 믿을 것 같지 않아서 형님이 돈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두 아들의 효성에 마음이 흡족해서 아주 행복해했습니다.
한편, 말하는 남생이를 사간 장 부자는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는 남생이를 사왔다고 자랑을
했
습니다.
"아니 영감, 남생이가 말을 하다니요? 어디 한 번 들어 봅시다."
"아버님, 어서 시켜 보십시오."
부인, 며느리, 아들, 딸, 종, 머슴 들이 모두 모여서 어서 말을 시켜 보라고 졸랐습니다.
장 부자 영감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남생이 말 한 번씩 듣는 데 열 냥씩이다." 하고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이 아버님도, 식구들한테서 돈을 벌 생각은 마시고 내일부터 동네 타작 마당에 나가셔서
동
네 사람들한테 돈을 받으십시오."
"그러셔요. 그러고 장날에는 장에 나가서 남생이 말 장사를 하면 아마 돈을 많이 버실 겁니다."
장 부자 영감은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그래, 오늘은 우리 식구들 앞이니 공짜로 들려주지." 하고는 남생이를 향하여 "설은 설
은
다가오는데 우리 노무 어쩔거나." 하고 말했습니다.
"..."
남생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엎드려만 있었습니다. 장 부자는 더 큰소리로 "설은 설은 다
가
오는데 우리 노모 어쩔거나."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남생이는 그냥 엎드려만 있었습니다.
"아이, 아버님도. 남생이가 말을 하다니요. 그만 웃기시고 어서 들어가셔요."
막내딸이 장 부자의 등을 떼밀었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식구들은 그런 장 부자의 모습이 우스워서 크게들 웃었습니다.
장 부자는 돈이 아깝기도 하고 자기 말을 따라 하지 않는 남생이가 밉기도 하고, 식구들 보
기
에도 창피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장 부자는 발로 남생이를 콱 밟아 등허리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러
고
는 당장 사람을 보내 남생이 주인을 붙잡아 왔습니다.
"너 이놈, 이 사기꾼아. 어째서 남생이가 말을 하지 않느냐."
"분명히 장에서 사가실 때, 남생이가 말하는 것을 영감님도 들으셨지 않습니까. 장바닥에 모였
던 사람들이 증인이나까 다 불러다 물어 봅시다."
"그건 그렇지만, 남생이가 말을 안 하니 내 돈을 돌려 받아야겠다. 돈을 도로 내놓아라."
"영감님,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남생이를 죽여놓고, 돈을 물어내라고 하면 말이 안 되
지
않습니까. 남생이를 살려 놓으신다면 저도 돈을 둘려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욕심쟁이 염감이라도 이치가 그러하니 할말이 없었습니다.
동생은 깨진 남생이 등껍데기를 주워 들고 집으로 와서 마당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습니
다. 그랬더니 그곳에서 왕대순이 돋아나더니 날마다 쑥쑥 자라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왕대는 키가 넘게 자라더니 지붕보다 높게 자라고, 뒷산 봉오리보다 높게 자라고, 눈에 안 보이
게 까마득히 자라서 구름도 꿰뚫었습니다. 마침내 왕대는 하느님네 쌀곳간까지 뚫고 자라 올랐
습
니다.
그러더니 날마다 쌀이 하늘에서 퐁퐁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동생네는 자꾸 부자가 되었습니다.
쌀은 아무리 내다 팔아도 하늘에서 계속 쏟아져 내려와 금방 마당 가득 쌓이곤 했습니다.
동생이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형이 심술이 동해서 헐레벌떡 쫓아왔습니다.
"너 이놈.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벼락부자가 되었느냐?"
동생은 형에게 자초지종 지난 이야기를 쭉 들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부자 좀 되어야겠다. 이제 그 깨어진 남생이 등껍데기를 파다가 우리 집에
묻
어야겠다."
"그렇게 하십시오, 형님. 저는 이만하면 살 만큼 재산을 모았으니 형님이 가져가십시오."
형은 허겁지겁 남생이 등껍데기를 파가지고 가서 자기 집 응달에 묻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
는
감나무, 앵두나무 들이 심어져 있어서 그것을 다치기가 싫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심을 수
없는 응달에다 남생이 등 껍데기를 묻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이튿날 아침에 보니 왕대순이 쑤욱 자라 오르는 것이 아닙니까. 형은 얼쑤 좋
다,
우리도 이제 큰 부자가 된다고 춤을 추며 좋아했습니다.
왕대는 쑤욱쑤욱 자라서 키를 넘더니 지붕을 넘고 뒷산 봉우리보다 크게 자라고, 구름을 꿰
뚫
고 자라 올랐습니다.
그렇게 자란 왕대는 아뿔싸, 하느님네 변소간을 꿰뚫고 말았습니다. 쌀이 내려오는 것을 보려고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형의 얼굴에 똥벼락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어푸, 이것이 웬 똥벼락이냐? 큰일났다. 가래 가져오너라."
온 집안 식구가 달려들어 똥을 치웠지만,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똥을 다 치울 수는 없었
습
니다. 똥더미가 마당에 가득 넘쳤습니다. 그리하여 이 욕심 많은 형은 날마다 정신없이 똥을 치우
며 살아야 했습니다.
소금 장수의 재주
장산도 큰 동네에 소금 장수가 살았습니다. 소금 장수는 소금섬을 지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돌
아다니며 소금을 팔았습니다.
이 소금장수에게는 재주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재주란 다른 것이 아니고 비가 올 것인지 해
가
날 것인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습니다.
"소금 장수 아저씨, 내일 모내기를 해야겠는데 비가 오지 않겠소?"
"해가 쨍쨍 나고 날씨가 좋을 테니 걱정 마시오."
그러면 정말 이튿날 날씨는 해가 쨍쨍 나는 좋은 날씨였습니다.
"소금 장수 아저씨, 내일 쟁기질을 해야겠는데 날씨가 어쩌겠소?"
"내일? 비가 올 것 같은데..."
그러면 영락없이 비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금 장수 아저씨가 앞일을 잘 알아맞힌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소문이란 원래 발
이
없는 것이라 바다 건너 중국에까지 퍼졌습니다.
마침 중국 황제의 딸이 귀한 목걸이를 도둑맞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공주는 목걸이를 못
찾
아서 병이 날 정도였습니다.
"공주님, 조선땅 장산도에 앞날을 잘 알아맞히는 소금 장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불러다
목걸이를 찾아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소금 장수의 소문을 들은 시녀가 공주에게 말했습니다. 공주는 황제에게 간청했습니다.
"아바마마, 조선 왕께 부탁하셔서 소금 장수를 불러오게 해주십시오."
"그래? 빨리 불러오도록 해라."
황제는 사랑하는 공주의 간청을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선에 사신을 보내 소금 장수를 청했습니다.
소금 장수는 큰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놈의 맹랑한 소문 때문에 조선국의 위신과 조선의 명
예
까지도 짊어지게 되었으니 근심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금 장수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이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결과야 어찌되었건 일단 중국에 가셔야 합니
다. 가셔서 '물건을 찾으려면 도술이 잘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
라
도술이 걸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면서 시간을 버십시오. 그러다가 더 시간을 연기할 수
없
을 만큼 사정이 급하시면, '나는 조선땅에 초가삼간밖에 가지고 있는 재산이 없는 사람인데,
그
초가삼간이 불에 탔으니 나는 망했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신이 왔다
가
갈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소금 장수는 아들의 말을 새겨듣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중국에서는 아주 용한 도사가 왔다고 대접이 극진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서 공주의 목걸이를
찾
아 달라고 졸랐습니다.
"도술이란 사람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무르익어야 하는 것이니 기다
려
주십시오."
"얼마쯤 기다려야 할까요?"
"한 보름쯤 기다려 봅시다."
이렇게 보름이라는 시간을 벌고, 그동안 매일 잔치에 초대되어 산해진미 속에 파묻혀 살았습
니
다. 소금장수 팔자에 이게 웬 복인가요?
그러나 보름이 지나자, 어서 목걸이를 찾아내라고 성화였습니다. 그러면 소금 장수는 '아직
도
술이 걸릴 만큼 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또 보름을 연기받았습니다.
공주는 마침내 화가 났습니다.
"왜 자꾸 시간만 끄는 거요. 빨리 찾아내시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공주마마, 어젯밤에 우리 집에 불이 나서 다 타고 말았습니다. 나는 워낙 가난해서 재산이라고
는 그 초가삼간뿐인데 그게 불탔으니 나는 이제 거지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그 걱정에 도술
이
걸리질 않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공주는 소금 장수의 말이 참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냈습니다.
사신이 조선땅 남쪽 끝에서 또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장산도에까지 가보니 정말 소금 장수네 집
에 불이 나서 집이 홀랑 타고 말았습니다.
소금 장수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귀띔해 주고, 자기 집에 불을 낸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동차도 기차도 없었습니다. 가마를 타거나 수레를 타고 중국에서 조선, 그것도 저
남쪽 끝 해남반도에서 또 돛단배를 타고 가야 하는 장산도. 그 먼 곳을 왕복하자면 도대체 몇
달
이 걸려야 할까요.
사신이 다녀올 동안 소금 장수는 산해진미와 잔치판속에서 살았습니다. 몇 달이 지났는지 모
릅
니다. 사신이 돌아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공주마마, 소금 장수의 말대로 집이 다 타고 없었습니다."
"과연 하늘이 내신 도인이로다. 중국에 앉아서 조선땅 자기 집 불난 것을 알다니..."
소금 장수의 명성은 더더욱 빛났습니다.
"저렇게 잘 알아맞히는 사람이 왜 목걸이를 찾아내는데는 자꾸 세월만 보내는 것일까?"
기다리다 못한 공주는 소금 장수를 불러 놓고 마지막 시간을 정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번
에
도 약속한 시간을 어길 때는 공주를 속인 죄로 엄히 다스리겠다고 다그쳤습니다.
소금 장수는 열흘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날짜가 자꾸 지났습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가고 나흘이 갔습니다. 소금 장수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에라, 될 대로 되라지 뭐.'
닷새가 가고 엿새가 가고 이레가 갔습니다. 날마다 잔치는 계속됐습니다. 소금 장수는 맛있는
산해진미도 점점 입에 당기지 않았습니다.
여드레가 가고 아흐레가 갔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밤이 왔습니다. 이제 소금 장수는 이 밤만 지
나면 처형을 당해야 할 신세입니다.
소금 장수는 고향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면서 탄식을 했습니다.
"그놈의 소금섬 때문에, 소금섬 때문에 내가 죽는구나!"
소금 장수가 원래 날씨를 잘 알아맞혔던 것은, 순전히 소금섬 때문이었습니다. 소금기가 밴 소
금섬은 날씨가 좋으면 바싹 말라 고슬고슬했고, 날이 궂으려면 습기의 영향을 받아 축축해졌
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섬을 만져 보면 내일 날씨가 좋을 것인지 궂을 것인지 알아맞힐 수 있
었
던 것입니다.
남들이 용하다고 부추기는 바람에 소금 장수는 우쭐해가지고, 자기가 큰 재주나 있는 것처
럼
뽐냈고, 사람들은 또 희한한 재주를 가졌다고 소문 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소문 때문에 오늘
이렇게 된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놈의 소금섬 때문에 내가 죽는다."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
소금 장수가 눈물을 흘리며 혼자말로 탄식을 하고 있는데, 공주의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소
금 장수 앞에 엎드리며 "도인어른, 쇤네 여기 있습니다. 쇤네를 죽여 주옵소서." 하고 흐느껴 우는
것이었습니다. 시녀는 소금 장수가 소금섬을 말하는 것을 자기 이름인 소금선으로 잘못 알아들
은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네, 쇤네가 공주님의 시녀로 있는 소금선입니다. 제가 공주님의 목걸이를 훔쳤습니다. 죽여
주
십시오."
"그래? 그럼 목걸이는 어디다 두었느냐?"
"네, 여기 있사옵니다."
소금선이는 품안에서 목걸이를 내놓았습니다.
"나는 목걸이만 찾으면 된다. 네가 훔쳤다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라."
소금선이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큰절을 골백번도 더 했습니다.
소금 장수에게 목걸이를 건네 받은 공주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도인께서는 이 목걸이를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내 도술로 어딘지 모를 곳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를 내 손 안으로 불러온 것이니, 그것이 전
에
는 어디에 있었는지 저로서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고맙소, 내 큰 상을 내리리다. 그리고 소원이 있으면 말하시오."
"소원이라면, 공주님의 시녀인 소금선이가 그동안 제 마음에 들었사옵니다. 그녀와 결혼하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랫동안 홀아비로 지내 온 소금 장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소금 장수와 소금선의 결혼식에는 중국 황제를 비롯하여 고관대작, 공주가 모두 참석해 축하
해
주었습니다.
공주는 두 사람에게 10대에 걸쳐 먹고 살 만한 땅을 상으로 내렸습니다. 금으로 만든 가마
를
타고 소금 장수는 금의환향했습니다.
반쪽쟁이와 호랑이
늙도록 아기를 두지 못한 내외가 살았습니다.
내외는 자식을 점지해 주십사고,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공을 들였습니다.
두 내외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밤에 아내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감, 나 참 이상한 꿈을 꾸었구려."
"무슨 꿈을 꾸었소?"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갯가로 굴을 깨러 갔는데, 갯가에 복숭아나무가 있어요. 별일이다, 갯
가
에 복숭아나무가 다 있다니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머리가 허옇게 센 영감님이 큰 지
팡
이를 짚고 와서 '저 복숭아를 따먹어라. 그러면 아들 삼형제를 낳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바
다 위를 걸어서 그 건너편 섬으로 건너갑디다. 꿈도 참 이상스럽지요?"
"아니 당신도 그런 꿈을 꾸었단 말이오? 지금 나도 똑같은 꿈을 꾸고 막 잠이 깼는데."
두 내외는 꿈이 이상스럽기도 했지만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사실이 더 이상스러웠습니다.
"그 갯가가 어디하고 비슷합디까?"
"다수리 앵두 나루 있는 데와 비슷한 것도 같고..."
"당신 말을 듣고 보니 앵두 나루 근처가 틀림없는 것 같소. 날이 새면 우리 한 번 가봅시다."
먼동이 트자마자 내외는 고개 둘을 넘어 앵두 나루가 있는 갯가로 갔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바다가 움푹하게 들어와 있고, 바다 건너편에 막금도가 있는 것이 꿈에 본
곳
과 아주 닮았습니다.
"영감, 저것 보셔요. 지게 복숭아나무 아니오?"
"어디 보자. 틀림없는 복숭아나무요. 어서 가봅시다."
꿈에 본 그 장소에 꿈에 본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복숭아나무에는
잘
익은 복숭아 세 알이 열려 있었습니다.
영감이 나무에 올라가 복숭아를 따서 할멈에게 주었습니다.
할멈은 복숭아 셋을 치마폭에 담아 가지고 집에 와서 먹었습니다. 둘을 다 먹고, 세 개째를 먹
는데 목이 매자, 할멈은 반쯤 먹다 남은 복숭아를 마루에 놓고는 부엌으로 가 물을 한 바가지
떠
가지고 왔습니다.
그 사이에 워리란 놈이, 먹다 둔 복숭아 반쪽을 물고 가서 먹어 버렸습니다.
"저놈의 강아지 주둥이를 때려 놓을라?"
워리는 입맛을 다시면서, 혹시 또 없는가 하고는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참 이상도 하죠. 할멈은 그날로 임신을 해서 열 달 후에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을 낳았습니
다.
영감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산모가 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들 쌍둥이를 낳은
겁니다.
영감은 다 늙어 아들을, 그것도 쌍둥이를 보았다고 춤을 덩실덩실 추었습니다. 그런데 산모가
또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번에도 아들인데 반쪽쟁이를 낳은 겁니다. 눈도 하나, 귀도 하나, 손도
하나, 발도 하나뿐인 반쪽쟁이 아기였습니다. 어쨌거나 산모는 세 쌍둥이를 낳은 셈입니다.
그날 그 집 개인 워리도 새끼를 낳았습니다. 귀도 하나, 눈도 하나, 앞다리도 하나, 뒷다리도 하
나뿐인 반쪽쟁이 강아지를 낳았습니다.
영감은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한꺼번에 아들이 둘 반이나 생겼지요, 개도 반쪽일망정 강아지
를 낳았으니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기분 좋은 김에 산모방에 불을 지펴야겠다고 나무
를 하러 갔습니다.
나무하러 간 영감은 영영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세월이 자꾸 흘러 10년이 지났는데도 영감
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날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우리 아버지는 어디 가서 안 오시지요?"
"산에 나무하러 가서 소식이 없다. 틀림없이 호랑이한테 물려 간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10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이만큼 자랐으니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가
서
호랑이를 잡아오겠습니다."
쌍둥이 형제는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호랑이를 찾아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참을 가는데 "
형
님, 형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뒤돌아서서 오던 길을 보니 반쪽쟁이 동생이 반쪽쟁
이
개와 함께 뛰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왜 저는 데리고 가지 않으십니까. 저도 아버지 원수를 갚으러 가겠습니다."
"너는 안 돼. 집으로 돌아가렴."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가겠습니다."
반쪽쟁이가 기어코 따라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형들은 하는 수 없이 반쪽쟁이를 데리고 가기
로 했습니다.
쌍둥이 삼형제와 개가 깊은 산속에 들어가자 날이 저물었습니다. 산 속의 날은 더 빨리 저무
는
법입니다.
마침 자그마한 오두막집이 있어서 찾아갔습니다.
"실례합니다. 주인 계십니까?"
부엌 문이 열리더니 이가 다 빠진 늙은 할머니가 내다 보았습니다.
"웬 청년들인고?"
반쪽쟁이 개가 늙은 할머니를 보고는 컹컹 짖었습니다.
"워리야 짖지 마라." 하고 반쪽쟁이 막내가 말렸습니다.
할머니는 부지깽이로 개를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방으로 그들은 안내했습니다. 그러고는 시
장
하겠다고 걱정하면서 예쁜 손녀딸과 함께 밥을 지어 왔습니다. 쌍둥이들은 배가 고팠던 참이
라
정신없이 밥을 먹었습니다. 배꼽이 툭 불거지도록 먹고 나니, 하루 종일 산길을 걸었던 피곤이 한
꺼번에 덮쳐 와서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반쪽쟁이 막내는 반쪽쟁이 워리와 함
께
밥을 조금만 먹고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지붕을 뛰어넘는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마당
에
털썩 떨어졌습니다.
"호식아, 사냥 좀 했냐?"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뇨, 오늘은 허탕입니다."
"이 멍청한 놈아, 나는 가만히 앉아서 사람 셋하고 개 한 마리 잡아 놨다."
"어머니는 재주도 좋으십니다. 지금은 고단하니 한숨자고 새벽에 잡아먹읍시다."
"그러렴."
"아버지, 저 사람들은 제 발로 우리 집에 찾아온 손님이니 잡아먹지 말고 보내 주셔요."
소녀의 간청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얘가 무슨 소리냐? 굴러 온 호박을 발로 차다니..."
호랑이네 식구들이 주고받는 말을 반쪽쟁이 막내는 다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가 바로 호랑이 굴인 셈이지요. 늙은 호랑이는 하도 오래 살아서 사람으로 둔
갑
하는 법도 깨우쳤나 봅니다.
반쪽쟁이 막내는 형들을 깨우고, 반쪽쟁이 개는 발로 뒤쪽 벽을 후벼 파서 구멍을 냈습니다.
큰형이 먼저 빠져 나가고 둘째가 두 번째로 빠져 나가고 막내가 빠져 나가고 워리가 마지막으
로 벽구멍을 빠져 나와 뒷산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늙은 어미 호랑이가 알고는 뒤쫓아왔습니다. 반쪽쟁이 워리가 바위 뒤에 숨었다가 늙은 호랑
이
의 목을 물고 늘어져서 놓지를 않았습니다. 늙은 호랑이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아들 호랑이는 잠결에 어미 호랑이의 신음 소리를 듣고 뒤쫓아왔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반쪽쟁이 막내가 나뭇가지로, 잠결에 비틀거리며 쫓아오던 호랑이의
똥
구멍을 찔렀습니다. 그러자 놀란 호랑이는 한달음에 태백산맥을 뛰어넘어 만주벌판으로 도망갔
습
니다.
삼형제는 호랑이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집이 불에 휩싸이자 소녀 호랑이가 살려 달라고 울
었
습니다.
"살려 주세요. 꼭 은혜를 갚을게요."
반쪽쟁이 막내는 소녀 호랑이가 어젯밤에 "저 사람들은 살려 주자."고 말하던 것을 생각하고는
불쌍해져 살려 주자고 했습니다. 형들도 찬성이었습니다.
아버지 원수를 갚은 삼형제는 소녀 호랑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너를 보면 놀라실 테니, 너는 집에 들어오지 말고 측간(변소)에 있거라."
반쪽쟁이 막내는 호랑이 소녀를 측간에 두고 집으로 갔습니다.
아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오자, 어서 밥을 지어 먹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궁이에서 재를 긁
어 내 측간에 버리러 갔던 어머니는 호랑이를 보고 놀라서 기절해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쩌지요. 저 때문에 어머니께서 돌아셨으니... 제가 명당 자리를 잡아 드리지요."
소녀 호랑이는 쌍둥이네 어머니의 시체를 업어다가 명당 자리에 묻어 주었습니다. 호랑이는
산
속 사정을 훤히 알고 있거든요. 어디가 명당인지도 잘 알지요.
명당 자리가 발복(운이 틔어 복이 닥침)을 해서 쌍둥이네는 하루가 다르게 재산이 불어나 부
자
가 되었습니다.
큰형도 장가들고 둘째도 장가를 가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반쪽쟁이 막내는 장가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시집을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반쪽쟁이 개가 늙어서 죽었습니다. 쌍둥이 삼형제는 반쪽쟁이 개를 앵두 나
루
복숭아나무 밑에 묻었습니다.
이듬해 그 복숭아나무에 복숭아 두 알이 열렸습니다.
반쪽쟁이 막내의 꿈에 머리 허연 할아버지가 나타나 "저 복숭아를 따다 하나는 네가 먹고 하나
는 호랑이에게 주어라."고 말하고는,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너편 섬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반쪽쟁이 막내는 호랑이 등에 타고 앵두 나루로 갔습니다. 복숭아 두 알을 따서 하나씩 나누
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반쪽쟁이 막내의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눈도 하나가 더 생기고 귀
도 하나가 더 생기고 팔도 하나가 더 돋아나고 발도 하나가 더 돋아나 완전한 사람이 되었습니
다.
호랑이도 복숭아를 먹고 재주를 펄쩍펄쩍 세 번 넘더니 어여쁜 처녀로 변신했습니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 성대한 혼인 잔치를 벌이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후 이들은 아들
딸
낳고 금실 좋게 잘살았답니다.
까마귀와 꾀꼬리의 노래 시합
어느 날, 까마귀와 꾀꼬리가 만나서 서로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아마 노래를 나만큼 잘하는 새도 없을걸."
까마귀가 검은 양복을 입고 어깨를 으쓱하며 괄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것 봐, 뭐니뭐니해도 노래는 내가 제일이지, 안 그래?"
꾀꼬리가 소프라노 목소리로 떠들었습니다.
"얘, 목소리가 그게 뭐니? 꼭 양철지붕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 같더라."
까마귀가 비꼬았습니다.
"아이고 웃기시네. 네 목소리야말로 그게 항아리 깨지는 소리지, 그게 어디 목소리 축에나 끼이
는 소리니?"
꾀꼬리도 입에 거품을 물고 까마귀를 깎아 내렸습니다.
"야, 우리가 아무리 서로 잘났다고 우겨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다. 공평하게 황새 아저씨한테 가
서 물어 보자."
"그래, 황새 아저씨는 점잖은 분이니까 공정한 판결을 내릴 거야."
까마귀와 꾀꼬리는, 논 가운데서 한 발을 든 채 졸고 있는 황새에게로 갔습니다.
"황새 아저씨, 까마귀하고 저하고 누가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생각하세요?"
꾀꼬리가 조잘거리듯 물었습니다.
황새를 졸린 눈을 겨우 뜨고 귀찮다는 듯 말했습니다.
"글세? 지금은 졸려 죽겠으나까 내일 오렴."
"그럼 내일 다시 올 터이니 꼭 공정한 판결을 내려 주셔요."
까마귀와 꾀꼬리는 내일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꾀꼬리오 고리오 꾀 꾀꼴꾀꼴."
자기 자신이 들어 보아도 그 청아한 목소리며 간드러진 가락이 기막히게 좋았습니다.
'까마귀 제까짓 게 노래는 무슨... 주제 파악도 못하나 봐.'
꾀꼬리는 속으로 까마귀의 그 박자도 맞지 않고 다듬어지지도 않은 목소리를 흉보았습니다.
까마귀는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꾀꼬리의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보다 아름답다
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습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가만있지, 황새아저씨가 무엇을 좋아하더라? 옳지, 개구리를 좋
아하시지.'
까마귀는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가지고 황새를 찾아갔습니다.
"황새 아저씨, 아저씨가 개구리를 좋아하신다기에 여기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그래, 거 고맙군."
황새는 개구리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긴 목을 찔룩찔룩하면서 개구리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황새 아저씨, 내일 심사하실 때 잘 좀 봐주십시오. 예술이란 게 원래 개성이 중요한 것이
지,
우열을 판가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예술이란 개성이 생명이지."
황새는 맛있는 개구리를 선물한 까마귀가 고마웠습니다.
이튿날, 약속한 시간에 꾀꼬리와 까마귀는 황새에게 찾아갔습니다.
"꾀꼬리 너부터 노래를 해보아라."
황새가 꾀꼬리를 먼저 지명했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부르겠습니다."
꾀꼬리는 어제 하루 종일 열심히 연습했던 노래를 불렀습니다.
"꾀꼬리오 고리오 꾀 꾀꼴꾀꼴 꼬르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노래를 듣고 난 황새가 심사평을 했습니다.
"무슨 놈의 노래가 계집애들 앙탈 부리는 소리 같냐? 간지럽다"
"황새 아저씨, 제 노래를 들어 보세요."
까마귀는 목청을 가다듬었습니다.
"까욱까욱 깎깎깎깎 까욱깎깎"
꾀꼬리는 귀청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귀를 막았습니다. 황새는 얼른 손을 들어 노래를 중단
시
키면서 "아, 아, 그만, 그만해도 좋아요. 저렇게 사내답고 씩씩한 노래는 처음 들어 보는구먼. 까
마귀 네가 훨씬 낫다."
꾀꼬리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저런 엉터리 판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억울해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한 번 판정 내린 것을 뒤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까마귀는 그것 보라는 듯이 꾀꼬리를 흘겨보고는 훨훨 날아가 버렸습니다.
황새는 귀찮다는 듯 다시 발을 들고, 눈을 감은 채, 논 가운데 서서 졸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