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결혼

서지인

The Secret Marriage...[pamonia님 作]

프롤로그

아는 이의 얼굴은 하나도 없는 공황에서 은조는 열심히 목을 빼고 두리번거렸다.
덩치 큰 외국인들이 그녀의 옆을 지나치며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지만 서툰 영어의 은조는
그들이 두려워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고 다른 즐거운 것들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단발머리 사이로 바람이 살짝 스쳐 지나며 그녀의 그런 기분을 조금은 위로 해주었
다.

[오빠 잠시만 저 여자인 것 같아 나 기다려 줄 수 있어?]

그는 무심한 시선으로 저쪽에 서 있는 꼬마를 보았다.

[마음대로. 늦어지지만 말아.]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만 던진 그는 다시 신문을 보고 있었다.

[혹시...김 은조씨?]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낯선 여자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그 여자는 검은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놀랄 정도의 미인 이였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미녀를 보았다.

[아..놀라지 말아요. 당신의 약혼자인 윤 석현씨가 바빠서 대신 나온 거니까요. 내 이름은 노
바 레귀자모 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는 자신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노바를 보며 간신히 모기 만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안녕 하세요...저는...김..은조 에요..]

노바는 자신의 미모에 어울리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영어가 서툴러서 당황할 필요 없어요. 걱정 말고요. 자 그럼 가죠.]

그녀는 자신의 슈트케이스를 질질 끌며 노바의 뒤를 따라 갔다.

그는 분홍빛 스웨터에 물 나른 청바지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를 한동안 보았다.
노바에 비해 무려 10센티는 작아 보이는 걸로 보아 160정도일까...
외소 해도 저렇게 외소 할 수가...완전히 빵점이군.
그는 혀를 차며 냉혹하게 평가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바로 했다.

[오빠 미안 너무 시간 많이 잡은 것 아니야?]

[아니. 그만 가지.]

그의 냉혹한 한 마디에 은조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 남자는 장신이고...부와 권력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남자였다. 색다르다면...길게 기른 머
리를 뒤로 묶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한쪽 귀에 걸린 링 귀걸이...
그녀는 자꾸만 그를 보는 자신을 더 이상 다잡지 못하고 흘끔거리며 그를 보았다.
그의 턱이 뚜렷하게 굳어지더니 더욱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치고는 뒤돌아 멀어졌다.

[어...너무 긴장하지 말아요...오빠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는걸 싫어해요. 그래서니..너무 겁
먹지는 말아요.]

은조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노바의 뒤를 따랐다.
그것이 4사람이 만나게 될 처음 만남 이였다.
노바와 그녀...
석현과 노바의 오빠....

-1-

석현은 멀리보이는 작은 체구의 여자를 보자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은조!]

석현은 헬기에서 내리자 마자 그녀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도 겁먹은 표정을 지우고는 그를 향해 밝게 웃으며 뛰어 왔다.
그는 여러운 이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그런 표정...그렇게 아무렇게나 하지마. 더욱 오빠가 싫어져.]

노바는 차게 쏘듯이 말했다. 그는 천천히 썬그라스를 벗어 마치 얼음 조각 같은 네이비 블
루의 눈으로 노바를 보았다.
그리고는 시트에 기대어 석현을 향해 뛰어가는 은조를 보았다.

[가엽군 노바. 드디어 애인 상봉이니...너의 자리는 사라진 건가?]

노바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인간 말종 이라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오빠 입 조심해 나도 언제까지나 오빠의 고분고분한 여동생이 아니야.]

그는 여동생을 조소하듯이 보고는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석현과 끄러 안고 있는 은조를 한번 슬쩍 보고는 피식 웃었다.

[재미있군 은조라는 여자 벙어리 같이 입다물고 있더니. 내가 보기에 너보다 매력이 없는
것 같은데..어디가 그의 마음에 들었을까? 응? 노바?]

노바는 따라 내리며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혼자 시나리오는 그만 쓰는 게 어때?]

은조는 그의 품에 폭 안겨 처음으로 그를 따라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석현씨 나빠요...날 공황에 혼자 두다니...결혼하고 나면 보복 할 꺼야.]

석현은 껄껄 웃으며 장난스럽게 그녀의 코를 쥐었다.

[아파요. ]

그는 그녀의 뺨에 살짝 입 맞추었다.

[난 너희 부모님이 언제 보내주실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어?]

그녀는 생긋이 웃으며 그에게 다시 한번 폭 안겼다.
그리고는 행복한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등뒤로 느껴지는 악의에 찬 시선....
석현도 그것을 느꼈는지 몸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살짝 때놓고는
몸을 틀어 다가오는 거만한 남자를 보았다.

[일은 잘 마친 건가 윤?]

누군가 헐뜯는 것 같은 목소리에 은조는 다시금 온몸이 꽁꽁 어는 것 같았다.

[내. 직접 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회장님.]

이 남자가 회장? 고작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남자가?
그녀는 의문에 찬 시선으로 그 남자를 똑바로 보았다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가더니 그
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만 하지 더 이상 날 도발했다가 험한 꼴 당하지 말고.]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소름을 돋게 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외면했다.
그는 그녀의 당황한 행동이 마음에 드는 듯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거야?]

은조는 짐을 풀며 물어 보았다. 석현은 따라 들어와 피식 웃었다.

[너무 나쁜 사람 아니야. 그는 노바의 하나 뿐인 친오빠야. 워낙에 무서운 사람이라서 다가
가기 힘든 면도 있지만...그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야.]

은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그는 거만한 남자야. 레귀자모 집안 자체가 워낙에 피의 역사를 가진 집안이라 그는 그렇
게 자랄 수밖에 없었을 거야. 치...이런 이야기나 하자고 여기 있는 것 아닌데...]

은조는 생긋이 웃어 보이고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은조야 아버님이 보내 주신 거야? 아님 어머님이?]

은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방긋이 웃었다.

[두분 다요. 약혼한 지가 이미 2년째니까 당신 바람 필지도 모른다고. 보내 주시던걸..다만
조건이 있어요...]

[뭐지? ]

그는 궁금하다는 듯이 그녀를 채근질 했다.

[나..기숙사 학교에 들어가서 어학 연수하고 대학 마저 마치라 더군요...]

그는 머리를 쥐고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리고는 은조의 어리고 너무너무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보았다.

[은조..내가 안 보내면...]

[작은 아버님 오신다고 했어요...내일 저녁에..그리고 이것 우리 아빠 편지..]

은조는 손에 들려진 작은 편지를 그에게 건네었다. 그는 재빨리 편지를 보고는 끙하는 한숨
소리를 냈다.

[무슨 말인데 그래요?]

그는 은조의 궁금해하는 눈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편지를 건네어 주었다.
거기에는 단 몇 마디...
은조를 동생 같이 생각해 주게. 자네를 믿네...

[당했다 은조..하루 남아서 난...]

은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그의 손을 밀쳐 냈다. 석현은 무안하여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를 당겨 안았다.

[은조야...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3년은 금방 지나갈 거야 내가 널..얼마나 아내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지 너만은 알아야 해 은조야.]

은조는 그의 포근한 가슴에 안겨 자신이 이곳에 정말 잘 왔다고 생각했다.

그후 6개월

[보고서야. 오빠 내 말 들어? 아까부터 무엇을 그토록 보고 있는 거야]

그는 고개를 들어 동생인 노바를 보았다.

[잊었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난 나가 봐야겠어 석현일 부르던 아님 다른 남자를 부르던
너 알아서 일을 처리해 난 가 봐야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코트를 챙겨 들었다. 노바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오빠..정말...]

그는 선그라스를 챙겨 들고는 자리를 떠 버렸다. 노바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어떻
게 잊을 수 있을까...오늘은 그들의 어머니의 기일 이였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푹 기대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오늘은 정말 치가 떨리는 날 이였다.
잊으라고? 어림없는 소리...
상냥하던 어머님...
어머님을 잃은 후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차에서 기다리는 기사를 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뒤 따라 오는 경호원들은 상관없었
다.
하긴..그들은 긴장해야 할 것이다. 돈주는 사람이 암살 당하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는 옆을 스쳐 지나는 사람도 관심 없이 그저 거리를 거닐었다.
한순간도 자유로워 본 적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는 유괴의 위험 때문에...나이가 들어서는 암살의 위험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암살되었다.
아마도 상권 다툼 때문에 생긴 일에 희생되신 것이리라...
그는 그때 상황을 생각하면 죄책감에 쓰러질 것 같았다. 자신의 바보스러움이 어머니를 죽
음에 몰아 넣었다.
그는 가만히 멈춰 서서 주위를 보았다 곳곳에 경호원들이 눈에 띄었다. 항상 이런 생활...
그는 자신의 삶에 서서히 짜증이 솟아나며 자신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파괴하고픈 심술
사나운 마음을 느꼈다.
그때....그는 누군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웃는 모습을 보았다. 저 여자...
같이 있는 남자와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청순하고 가늘 가늘 한 여자..너무 행복해 보여 배
가 아플 지경 이였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떠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그녀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아픈 상처를 기억나게 하는 여자...
너무너무 순진한 얼굴을 한...
마치 파괴해 버리고 싶은 순수함을 간직한 여자...
그 여자가 너무 싫었다.

은조는 밝게 웃으며 석현에게 이야기 중이였다. 이제는 제법 영어도 잘해서 그렇게 큰 문제
는 없었다. 작은 아버님의 특별한 주선으로 이루어진 오늘의 만남이 그녀에게는 너무 소중
했다.

[야..우리 은조는 나날이 예뻐져서 나 같은 아저씨는 보지도 않겠어...]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아니야 석현씨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걸...석현씨는 우리 나라에 파견 근무 나왔을
때랑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

석현은 피식 웃었다. 이민 3세인 그가 보는 은조는 너무나 밝고 순수한 여자였다. 한국의 파
견 근무를 자청한 것이 모두 그녀를 만나기 위함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지 나야말로 행운이었어 당신과 만날 기회를 쥐었잖아? 파견 근무 선택만큼 내게 행운
은 없을 꺼야 다음에 회장에게 감사해야 겠어.]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스쳤다.
석현은 그녀가 레귀자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그녀는 마치 누가 들으면 안 된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석현의 귀를 잡아 당겨 귓
속말을 하였다.

[실은..나 학교 친구에게 들었는데..그 사람...합법과 불법을 같이 한다더라 고..사실이야?]

그녀의 순진한 물음에 그는 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바보..은조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의 아버지 때에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모든 일들을 갈무리하고 있는 중이라구.]

은조는 불퉁한 얼굴로 쥬스를 마셨다.
그녀는 항상 레귀자모 회장을 생각하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그의 눈빛이 싫었다. 마치 누군가의 험담을 잡으려는 눈...

[그가..그렇게 싫어?]

[날보고..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 이야기하기 싫어.]

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구나? 그의 이름은 엘라우드 레귀자모야.]

그녀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에 알맞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그때 석현이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만 다녀 올께 은조.]

그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따라 나가 버렸다. 그녀는 할 일 없이 쥬스 잔만 달그락 거렸
다. 어학 연수 기간을 거의 마쳤지만 왠지 아직까지는 이곳 사람들과 쉽게 이야기하기 힘들
었다.

[여...이렇게도 만나는군. 회사에는 왠일 이지?]

거만한 목소리..그녀는 소름이 돋아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그때 검게 그을은 손이 의자를 당기는 것이 보였다. 그의 팔에는 은빛 나는 백금 시계
가 보였다.

[훗..아직도 입을 못 땠나 보지?]

그녀는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그를 천천히 올려 보았다.

[입을...못 땐게 아니에요...단지..당황했어요...]

그는 여전히 선그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긴 머리도 여느때 처럼 단정하게 묶여 있었
다.
그는 한 손에 턱을 괴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한 동안 보고는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림자처럼 누군가 다가와 그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윤은 금방 못 올 꺼야. 내가 잠시 다른데 보냈어. 그러니 나머지 시간을 날 위해 움직여.]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를 한 동안 보고는 다시 한번 손짓을 했다
누군가 그녀를 일으켜 새웠다.

[말귀를 영 못 알아듣는 여자군.]

그는 쌀랑하게 말한 후에 그 자리를 나와 버렸고 그녀는 사람들에 의해 그의 차로 끌려갔
다.
그리고 얼마 후. 석현은 자신에게 노바에게 가보라고 한사람이 다름 아닌 엘라우드라는 사
실을 알게 되었다.

-2-

두려움에 떨며 창을 보던 그녀는 떨고 있는 자신을 비웃는 엘라우드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절벽 길을 미끌어 지며 달리는 차안에는 차가운 냉기가 가득 했다.

[어..어디...]

[말문이 트여? 두려우면 말문이 트이나 보지?]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이야기하며 시커먼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그의 날카로운 옆얼굴을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보았다.

[이..이건...나 나 납치...에요...]

[말 더듬지마 답답해.]

그녀는 차가운 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엘라우드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꼬인 감정으로 보았다. 행복해 보이던 아까의 표정이
싹 사라진 것이 유쾌한 반면 이렇게 질려버린 표정이 그의 성미를 건드렸다.
어려 보이는 단발머리도... 커다란 눈 가득 매달린 눈물도...
벙어리처럼 앙 다문 입술도.
여자로서는 정말 빵점이었다.
그는 경호원 틈에 위치한 그녀를 다시 한번 보고는 칸막이 유리를 쳤다. 차는 절벽 길에 우
뚝 멈추었다.
그녀는 놀란 토끼처럼 그를 보았다.

[내려. 보여줄 것이 있어.]

그는 무뚝뚝하게 이야기하더니 차 문을 열고 내려 버렸다.
경호원들이 다시 그녀를 이끌어 내리게 하자 그녀는 와들와들 떨며 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는 시커먼 바다와 천길 낭떠러지가 보였다.
은조는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그는 합법과 비합법 적인 일을 한다던 말이 떠오르며...이
대로 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건 아닌가 싶었다.

[걱정마 죽일 마음은 없어. ]

그는 비웃듯이 그녀에게 말하고는 등지고 바다를 보았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뜨고 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엘라우드를 보았다.
그의 등뒤에 느껴지는 쓸쓸함...
최고의 부와 권력을 지닌 그가 일개 부하직원의 약혼녀나 납치하다니...
그녀는 그의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그녀의 존재는 무시하고 절벽 아래를 보았다.

[이상한 상상하지마.]

그는 잘라 말하고는 뒤돌아 그녀를 보았다.
어두운 하늘 아래 그는 검은 썬그라스 넘어로 그녀를 차갑게 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쥐고 당기더니 자신의 품에 당겨 안았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 그를 보
았다.
그는 그녀를 한동안 보더니 그녀를 풀어 주고는 뒤돌아 섰다.

[차에 태워.]

그가 다시 명령을 하자 그의 경호원들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차로 이끌었다.
그녀는 차를 타며 경호원 틈으로 보이는 엘라우드의 어두운 뒷모습을 보았다.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녀는 머리를 푹 숙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던 슬픔...그 무게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엘라우드 레귀자모...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녀는 다시 한번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두렵고...무서운 사람...하지만...너무 슬픈 어떠한 부
분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남자를...

초조해 보이는 석현을 보며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옆에 있던 엘라우드
의 심술난 목소리가 그녀의 기쁜 마음속에 파고 들어온 건.

[너무 기뻐 마. 그런 표정을 보면 영원히 너희 둘을 갈라놓고 싶어지니까.]

그녀는 질린 표정으로 그를 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가만히 보더니 고갯짓을 까딱했다.
그러자 경호원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내려 주었다.
그녀는 떨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내려서자 차는 언제 멈추었냐는 듯이 바로 출발해 버렸다.

[은조야!]

석현은 긴장된 얼굴로 달려와 그녀를 껴안았다.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그녀는 석현의 놀라고 당황한 얼굴을 보며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회장이 무슨 일로 널 끌고 간 거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무서웠던 일을 생각하기 싫어 그녀는 석현의 품에 꼭 안겼다.
석현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석현의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싹트고 있었다.
엘라우드는 모든 일에 무관심한 남자였다.
단지하나...그건 바로 여동생인 노바에 관한 일 이였다.
그는 인상을 썼다.
엘라우드가 가지는 관심이 삐뚤어진 것이 아니기만 바랄 뿐 이였다.

[은조...춥지 않아? 들어가자 작은 아버님 기다리신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석현을 보았다.

[미친 거지...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는 넥타이를 풀던 손을 멈추고 노바를 보았다.

[언제부터 그런 시어머니가 된 거지 노바?]

엘라우드는 셔츠를 벗어 던지며 노바를 이죽거렸다.

[모로나가 전화 왔었어. 약속 시간에 안 나왔다고 그 시간에 남의 약혼녀 훔치니 기분은 좋
아?]

엘라우드는 잔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노바에게 다가왔다.

[훔친다 라....그래 좋더군. 겁에 잔뜩 질린 여자를 보는 것 말이야.]

노바는 오빠인 엘라우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오빠...제발...은조씨 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마. 부탁이야...나와 석현씨는 친구일 뿐이야...오
빠...부탁이야.]

엘라우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노바는 엘라우드가 머리카락에 손을 올리는걸 보고 나가
버렸다.
그는 머리카락을 풀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문을 노려보았다.
친구일 뿐...
친구...하지만 노바에게 친구란 없었다.
노바의 사회적인 위치는 여자들의 질시의 대상 이였고 남자에게는 돈 보따리처럼 보였을 것
이다.
석현이 노바가 아닌 다른 여자를 선택한 후에야 그는 노바가 진정으로 석현을 사랑했음을...
그리고 석현이 노바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음을 알았다.
그의 여동생의 사랑을 방해 한 것은 고의적이었다.
동생에게 안 어울리는 남자였다. 동양인 이였고 집도 너무 평범했다. 노바의 돈을 노린다고
생각한 것이 무리가 아닐 정도로...
그는 노바를 생각하다가 불현듯이 끼어 드는 은조의 영상을 떠올리며 입술을 앙 다물었다.
석현과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은조의 얼굴은 노바의 자리를 빼앗은 것 만 같았다.
아니...노바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에게 있었다.
은조....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와 밝은 느낌이 너무나 싫었다.
자신이 그것을 보고 파 하는 마음 또한 허락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더욱 싫었다.
그는 긴 머리카락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그리고 부드럽던 작은
손이 생각나서 그는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야? 노바.]

석현의 뚱한 태도에 노바는 일순 당황하고 말았다. 아마도 오빠 때문인 것 같았다.

[아....은조씨..어제 잘 도착했어?]

석현은 컴퓨터 화면을 다시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많이 놀란 것 같더군...작은아버님이 와서 데려 가셨어.]

노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엘라우드의 시선이 안 미치는 곳이 존재할 수는 없지
만 아직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이 아니니 어쩌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지워질지도 모른
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노바는 그의 책상에 가만히 기대어 있다가 그를 다시 보았다.

[은조씨 좋은 사람이더라. 나..은조씨 무척 마음에 들어 그녀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석현은 화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그녀에게 상처 주지 않아 네가 걱정하는 건...됐어 그만 말하지 너 와도 사이가 나빠질
까봐 겁나는 군.]

노바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어느 남자가 자신의 약혼녀가 상관에게 끌려가서 속수무
책이 되는걸 좋아할까...

[미안해..내가 사과 할께 오빠에 관해서는...하지만 이해 해줘..어제가 오빠에게 가장 힘든 날
이였어...어머님의 기일 이였어...오빠가 이상한 반응으로 은조씨를 대한 건..아마 그런 이유
일 꺼야.]

석현은 굳어진 얼굴로 노바를 보았다.

[아니. 이해 할 수 없어. 은조는 아직 영어도 서툴고 아무 것도 몰라 아무리 그 자신에게 그
런 사정이 있다고 해도 아무 사람이나 끌어 드리는 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야. 그가 부자
일지는 몰라도 모든 이의 이해를 얻어 낼 수는 없어 비록 내 상사라고 해도 난 그날의 그의
행동은 용서 할 수 없어.]

석현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자리를 떠나 버렸다. 노바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빠를 이해 못 하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노바는 천천히 복도를 향해 걸으며 생각에 빠졌다. 오빠와 은조...그리고 석현과 은조...
그녀는 은조의 밝은 웃음과는 석현의 모습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친오빠지만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수 없는 타입의 남자인 엘라우드...
비록 그가 놀랄 정도의 미남이고 돈을 산처럼 쌓아 놓고 태워도 남아도는 돈이 있다지만 그
에게는 사랑이라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대로..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뛰
어가는 악귀와 다름이 없었다.
노바는 한숨을 쉬었다. 엘라우드의 관심에 선 여자들의 운명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은조를 납치한 것...그것이 관심인지 삐뚤어진 이기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가 다
른 여자와는 다른 방법으로 은조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가 오
늘 아침 런던으로 말도 없이 떠나버린 것 하나가 위안 이였다.

2년후.

노바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이 잘못 안 것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시약을 떨어트리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새겨지는 분홍색 줄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머리를 끌어 넘기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갖지 못할 남자와 사이에서 어쩌자는 건
지....

[노바. 뭐 하는 거야?]

신경질적인 목소리...엘라우드가 돌아왔다...그 납치 사건 후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더니...지
난 일주일 전에야 돌아 왔다...

[아..아니야...오빠...]

그녀는 억지로 밝게 이야기하며 화장실에 물을 내리고는 얼른 나왔다.
엘라우드는 미심쩍은 시선을 그녀에게 던지더니 쌀랑하게 나가 버렸다.
그녀의 무릎이 후들거렸다.
누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녀는 전화기를 잡아 당겼다.

-3-

노바는 자신의 귀걸이를 바로 하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오늘은 회사 설립 60주년의 기념회 날 이였다.
그녀는 인상을 쓰고 며칠 전에 나눈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녀는 스치듯이 직원을 초대한다는 오빠의 말에 그럼 은조가 와도 된다는 뜻이냐고 물었
다.
그가 없는 동안 은조와 친해진 그녀로서는 그를 도발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닌 단순한 질문
이였다.
하지만..그의 반응은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은조? 그녀가 누구지?]

어째 들으면 무심한 말 이였지만 누구보다 엘라우드를 잘 아는 그녀로서는 그의 이 말처럼
위험한 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엘라우드가 은조랑 부디 치지 않기만 바라고 있었다.
엘라우드는 2년 동안 괴물이 되어 돌아 왔다...
그는 은조가 아무리 사랑스러운 미소와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부셔버
릴 수 있는 남자였다.

[노바 모두 기다릴 꺼야 가야지 위대한 연극을 하러.]

노바는 뒤틀린 냉소를 하는 엘라우드의 목소리를 소름끼치는 심정으로 들으며 방안에서 빠
져 나왔다.

[와...정말 크군요...난 이런 파티는 처음이에요..석현씨는 자주 왔어요?]

석현은 빙긋이 웃었다. 공부 때문에 작년 파티에는 은조를 대리고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놀라긴..이래서야 어디 다음에 다른 파티에 데려갈 수 있겠어?]

은조는 놀리는 그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휘둥그란 눈으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신선한 장미향과 형용색색의 옷을 입은 여
자들...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그녀는 생각하며 행복한 한숨을 지었다.

[공부는 잘되고 있어? 언제 졸업이지?]

그녀는 석현을 올려다보며 자신감 있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내년에는 끝낼 수 있을 꺼 에요.]

석현은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그녀가 사랑스러운 것에 대해 약
간의 불안함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숨길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미있어요? 은조?]

[노바! 와 오늘 정말 아름다워요.]

은조는 찬탄한 눈길로 일류 디자이너의 옷을 입은 노바를 보며 말했다.
노바는 순진한 은조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불안한 눈으로 석현을 보았다.

[저...은조 잠시만 석현과 이야기하고 싶은데...그렇게 해도 될까요?]

은조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웃어 보였다.

[제 걱정은 말아요. 그럼 난 다른 사람과 어울려 보도록 노력할 깨요 사실 상티 랑은 이미
알고 있던 사이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멀어지는 그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오늘따라 노바는 안절부절못하
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엘라우드는 사람들을 내려보며 조소하고 있었다. 예전의 적들이 지금 와서 살살대는 꼴이라
니....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는 경호원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연회장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연회장의 구석에 눈에 익은 여자의
까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어떤 흑인 여자와 이야기 중이였다.
몸에 팔랑하게 내려오는 아이보리빛 드레스를 입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은 그녀는 마치 소
녀처럼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은조...]

그는 유리 글라스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모셔올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려가지...그녀와 인사라도 해야 할 태니까...반. 따라오지 않아도 되니까...자신의 자리
만 지켜.]

경호원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돌아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마치 은방울이 울리는 것 같은 맑
은 목소리가 들려 오며 그녀의 봄날의 햇살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 그를 휘감았다.
그래...이 느낌 이였어...

[2년만에 보는 군..은조 잘 있었나?]

은조는 놀라고 당황한 눈으로 그를 빤히 보았다.
그녀는 입을 열 수도 없는 듯이 그를 바라만 보았고 그런 그녀의 행동이 다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다시 벙어리가 되었나? ]

옆에 있던 상티는 재빨리 그들 곁을 떠나 버렸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걸 느끼
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아뇨...너무 갑자기...안녕하셔요 레귀자모씨. 훌륭한 파티 군요.]

그는 서둘러 그녀가 말을 하는걸 묵묵히 보고는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아 그의 팔에 둘렀다.
그녀는 우물거리며 그가 걸음을 옮기자 따라서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저기..레귀자모씨...저..]

[엘라우드 그렇게 불러. 거추장스러운 성 따위는 부르지 말고 ]

그의 명령조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예전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
이는 건 그의 얼굴이 여위어 져서 일까...

[다시 벙어리가 되었군. 아니면 그날 일로 아직도 내게 화가 안 풀린 건가?]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 그를 올려 보았다. 그의 얼음처럼 푸른 눈에 기가 죽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이끄는 대로 걸어오기만 하는 그녀가 점점 성질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삐딱하게 내려다보고는 그녀를 이끌고 테라스 쪽으로 나섰다.
그녀는 잔뜩 긴장하여 그를 올려다보며 할말을 열심히 생각했다.
건물 가득 One last cry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는 그녀를 당겨 자신을 마주 보게 하고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올려 보며 이유를 물어보듯 빤히 보았다.

[아직 춤추는 것을 본적이 없어. 나라서 불편한가?]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저...춤출 줄 몰라요...]

그는 그녀가 보기에는 처음인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안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쩔쩔매며 그의 가슴 깨에 손을 올리고 열심히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나직한 웃음소리...처음 들어보는 그의 웃음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처음으로 그의 눈에 사람을 깔보는 듯한 이미지가 사라지고 그도 한 명의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어 가는 밤하늘에 가득한 작은 별빛의 전구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정지해버린 남들이 오지 않는 테라스 구석에 그들은 서 있었다. 친근함..그리
고 말이 없어도 편해지는 기분...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다시 보자 그의 미소가 서서히 굳어 졌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는걸 싫어한다는 걸 기억하고는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군...]

그가 들릴 듯 말 듯 이야기하고는 그녀를 놔주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음악이 끝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녀는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더니 손을 잡아 자신에게 당겼다.

[피하지마. 그러면 그럴수록 널 망가트리고 싶으니까.]

그는 나직하게 위협하고는 그녀를 밀쳐 버리고 뒤돌아 섰다.

[어서 약혼자에게 도망가. 내 동생을 위해 내가 그를 가로채기 전에]

그는 싸늘한 말을 던지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꼭 잡으며 눈을 감았다.
하늘 가득 전구들이 별빛을 뿜어내는 밤에 느낀 친밀함은 라벤더 향기 속에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4-

[말도 안돼..노바 넌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어쩌자구...]

[그러니까 석현씨에게 말하고 있잖아...부탁이야...난..]

노바는 눈물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품에 무너지듯이 안겼다.

[석현씨...난....잊을 수가 없어....사랑한단 말이야...그래서...]

석현은 그녀를 품어 주며 눈을 감았다.

[방법은 없는 거니? 어쩌자구 일을 이렇게 만든 거야.]

그녀는 보호하듯이 자신의 배를 감쌌다.

[다른 말은 말아 줘...난...오빠만 피하면 되니까...석현씨...제발....]

그는 노바의 젖은 바이올렛 같은 눈을 보았다. 노바...은조..

[그렇다면...은조에게...]

노바는 도리질했다.

[안돼...그러지마...그녀 또한 충격 받을 거야..난 누구의 동정을 바라는 것이 아니야..석현씨...
부탁이야...잠시만...그녀가 소중하다는 것 알지만..잠시만...]

그는 울며 매달리는 노바를 안아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적한 정원에서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지만 관목 그늘아래 서있는 길다란 그림자가 내뿜는 하얀 증오의 너울을 보지는
못했다.

그는 넥타이를 반쯤 풀고는 거실에 가만히 앉아서 한 손에는 와인글라스를 든체 문을  보고
있었다.
노바는 그 모습에 소스라치듯이 놀라 그를 보았다.

[오...오빠 있으면...기척이라도 하지...]

그는 마치 날렵한 표범이 먹이를 향해 걸어오듯이 우아하게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딜 다녀왔니...오빠가 걱정하고 있었다 노바..]

아주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그녀는 신경이 미친 듯이 꿈틀대는걸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그냥...은조씨랑...음...이야기 좀..]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화장이 번졌구나 피곤해 보인다. 들어가서 쉬렴..난..뭔가 생각할 일이 있어서..노바....]

그녀는 그가 다시 아까의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를 공포심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반쯤 눈을 감고 보더니 조용히 이야기했다.

[정원을 다시 정리해야 겠더군...관목이 엉망이야.]

그녀는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관목이 엉망일 리가 없지 않은가 정원사만 3명이
돌아가며 정돈하고 있는데...그가 뭘 생각하는 걸까.

[그...그래? 몰랐어...내가 지시 할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 노바.]

그는 노바의 위태로운 걸음을 가만히 보며 차디찬 얼음이 혈관 속을 매우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노바가 나가자 마자 들고 있던 와인글라스를 손으로 쥐어 박살내 버렸다.
유리는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어두운 거실에 반짝거리며 붉은 피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의자에 더 깊이 앉았다.
노바가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자신을 속이고 뭔가를 숨기려고 한다는 사실에 그는 배신
감을 느꼈다.
은조는 알면 안되고 석현만 알아야 한다...은조가 실망한다...
그는 이빨을 갈았다. 아마 석현과 노바 사이의 일일 것이다.
그는 하얗게 작렬하는 분노를 잠재우며 그는 소매를 적시는 피의 감촉을 느끼며 무심하게
팔뚝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았다.

[은조 오늘 미안해 재대로 놀아 주지도 못하고..]

[피...내가 아인가.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노바씨 우는 것 같던데...안 좋은 일이야? 오빠가
구박해?]

석현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너 답다..그런 생각을 하게. 아니야...엘라우드가 그녀를 구박하다니...]

그는 말을 끊어버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양손을 붙잡고는 자신의 가슴에 꼭 붙였다.

[너...내 진심 알지? 은조. 널 사랑해. 어떠한 일이 생겨도 날 믿어 줘야해..알았지?]

은조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그리고는 인상을 살짝 썼다.

[응....믿어 석현씨를...]

그녀는 약간 시무룩하게 이야기했다. 뭔가 뒤가 켕기는 기분...

[참..아까 어디 있었니? 줄리가 너 찾아 다녔다던데.]

그녀는 들고 있던 잔을 달각 소리가 날 정도로 내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모기소리
처럼 자그마하게 이야기했다.

[어...바람 좀..쐬려고..]

<내가...왜 거짓말하지...웅...>

석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헝클어트렸다.

[심심해서 그랬구나 미안해.]

그녀는 속으로 죄를 늘려 가는 기분이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있던 은조는 고개를 들어 석
현을 보았다. 다정하고 착한 석현...그녀는 마음이 푸근해 지는걸 느꼈다.

[날? 왜.?.]

석현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일어서 찰리를 보았다. 찰리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글쎄...굉장히 저 기압이야..다른 때 보다 더...빨리 가봐..마치 지옥에서 빠져 나온 사람
같아...]

그는 인상을 쓰고는 맨 상단의 회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저. 회장님..]

[[내가 윤이 오면 바로 연결하라고 했지!]]

불호령이 스피커폰을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비서는 인상을 쓰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조심해요 석현,,,]

석현은 겨우 웃어 보이고 침을 삼키며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방안에 커튼이란 커튼은 모조리 처져 있어서 어둡기 그지없었지만 싸늘한 냉기는 사람을 움
찔하게 만들었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들어오지 않고 시간이 남아도나!]

석현은 움찔해서 빠른 걸음으로 회장실 안을 가로질렀다. 바닥 가득 떨어져 있는 서류를 조
심하여 건너기 시작하며 회장이 아무래도 굉장히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로..]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어. 지난번 선물 거래소 일은 어떻게 이따위로 일을 본 거야!]

그는 엘라우드가 팽겨 치는 서류를 흘긋 보았다. 거기다가 엘라우드의 손에 감긴 붕대는 그
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란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설마 노바의 일을....
그는 흠칫해져 그를 보았다.

[당장..다시 돌아가서 일을 바로 하고 와. 그리고 CG와의 합병은 어떻게 된 거야!]

[워낙에 탄탄한 회사라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당장 인수에 필요한 절차를 계시해. 기다리는 것도 지겨워 지니까.]

석현은 차분하게 숨을 몰아 쉬었다.

[내 오늘 바로 출장 가겠습니다. 선물 거래소부터 갈까요 아니면 CG쪽으로 갈까요.]

탁. 탁. 탁.
책상을 손톱으로 때리는 소리가 한동안 방안에 메아리 쳤다.

[아니야 가지마 다른 사람 보내. 여기서 CG쪽의 동태를 살피고 계산할 사람도 필요 하니
까.]

그리고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나가도 좋아 하지만 당장 선물거래소에 보낼 사람과 인터뷰 하는 게 좋을 꺼야.]

그는 냉랭한 엘라우드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방을 나왔다.

그가 그렇게 유능한 인재만 아니었어도....
그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 방안을 서성였다. 그리고는 인터폰을 켰다.

[차 준비 시켜요. 가볼 곳이 있어.]

그는 벗어둔 상의를 바로 하고는 당장 방을 빠져 나왔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반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는 가만히 창 밖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보고 싶었다..그 누군가...

[보스턴...보스턴으로 가지.]

반은 아무 말 안하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는 그렇게 눈을 감고 있었다. 차는 도시 속을 미로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작은아버지?]

[교회 앞에 차가 한 대 서있는데...아는 사람이니?]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에 쥐고 있던 걸레를 놓고 밖을 보았다.
커다란 리무진이 한 대 교회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 졌다.

[글쎄요....누군지...]

그때였다 차 운전석 문이 열리고 커다란 남자가 내리더니 서서히 교회 쪽으로 다가오기 시
작했다.
그녀는 그를 보고는 우뚝 멈추었다 저 남자는...

[안녕하십니까. ]

[안녕 하세요...어떻게...]

그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는 작은 아버님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녀 쪽으로 걸어 왔다.

[그분이 당신을 보고싶어 합니다. 가시죠.]

그녀는 움찔거리며 작은아버지를 보자, 작은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녀에게 가도 좋
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에 온 걸까...여기까지...먼 거리인데...
그녀는 젖은 손을 낡은 청바지 엉덩이에 닦으며 초조하게 걸어갔다.
그녀는 어두운 차안으로 들어서며 깜짝 놀랐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저기.....레귀자모씨는 잠드신 것 같아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반을 향해 말했지만 운전석과 사이에 칸막이만 소리 없이 올라갈 뿐이었
다.

[누가 잔다는 거지?]

그는 예의 그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움찔해서 좌석 맨 끝으로 물러나 앉았
다. 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미안해요. 어쩐 일이세요.]

그는 우물거리는 은조를 가만히 보다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그녀의 올려 묵은 머리를 풀어
버렸다.

[16살 짜리 처럼 하고 다니지마. 사람 부화 돋우는데는 뭔가 있어.]

그녀는 그의 거친 손길에 머리카락이 뽑혀 아릿 하자 눈물이 핑글 돌아 그를 원망스럽게 올
려 보았다.

[하나도 변한 게 없군. 머리모양이나 옷 입는 것까지. 그날 밤에는 이렇게 안 입었잖아]

그녀는 나타나자 마자 자신을 닦달하는 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보며 눈물이 가득한 눈을
부볐다.

-5-

[어디 가는 거예요?]

그녀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그녀를 무시하고 창만 보다가 창문을 덧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문을 몰라 그가 뭘 보나 하고 그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는 창문에 반사되는 그녀의 실루엣을 손으로 덧 그리며 그녀의 그림자속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하여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의 상처 입은 듯이 흔들리는 눈을 피할 수 없어
그림자 속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글쎄...가는 건가? 난 네가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야.]

그녀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운전석과의 벽이 스륵 내려가더니 험악하게 생긴 그의 경호원이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뭐라고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 도착한 것 같으니 내려.]

그녀는 엉뚱한 그의 말에 우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퍼플릭 가든으로 왔구나....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번에는 적어도 외곽지역으로 끌려 온건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
다.

[흥 너무 속보일 정도로 안심하는군.]

그는 비꼬며 삐딱하게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것에 움찔해서 입술에 손을 대고 인상을 살짝 썼다. 그는 그
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어 주고는 그녀의 손을 쥐고 자신의 보폭대로 걸어가기 시작했
다. 그녀는 종종걸음을 치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저...저기요...이 시간에...]

그는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피식 웃었다.

[열려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녀는 헐떡거리며 그의 손에 끌려 호수 백조 유람선 입구로 향했다.
어떻게 알아 본 건지 당장 문을 열어 주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냥 불만 밝혀 달라고 한 거야.]

그는 태연하게 말하고는 그녀를 안쪽 좌석에 앉게 하고는 자신도 탔다.
그녀는 영문을 몰라 그를 보았다.

[그냥 잠시만 있어...잡아먹지 않을 태니까.]

그녀는 눈을 감은 그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바람이 호수 끝에서 불어 그녀의 풀어진
머리카락을 귓가로 날리며 지나가자 그는 눈을 뜨고 그녀의 가는 목 줄기를 손가락으로 더
듬었다.

[날...조심하는 게 좋을 꺼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그녀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하며 그를 보았다.
그의 눈에 나타난 어떠한 흔적을 찾기 위해...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뜨다가 그의 손에 동여매진 붕대를 보았다.

[다친 건가요?]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흘긋 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만졌다.
움찔하는 느낌에 인상을 쓰며 그를 올려 본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병원은 요.]

[싫어. 그곳은 보기만 해도 역하거든.]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병원에 가요 감염이라도 되면 어쩌려고...어서요.]

그는 조그마한 은조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퍽 이나 인상 깊은지 그렇게 한동안 그녀
의 얼굴을 보았다.

[후...노바가 보면 기절하겠군...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명령하지는 못해.]

그는 웃어 보이며 자신의 경호원 쪽으로 손짓했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던 그날의 밤이 생각나 그녀는 다시 한번 보라 빛으로 변해 가는 하
늘을 보며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보스턴 종합병원에 유래 없는 당황의 연속으로 보이는 일련의 사건을 그녀는 한참을 보았
다. 모두가 엘라우드에게 쩔쩔매는 꼴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한 편이라 작은 수술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손바닥에 박힌 유리 조각을 제거하고 봉합하는 수술이었는데 그의 불퉁한 얼굴을 보니 이
수술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손바닥은 6바늘이나 꿰매야 했고 그녀는 그런 그의 손을 보며 인상을 썼다.

[속 시원하겠군. 평소에 미운 녀석의 손바닥이 걸레가 되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그의 쏘는 듯한 말에 그녀는 섭섭한 마음을 느꼈다.

[당신은 다른 이의 친절을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녀는 섭섭한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대해 의사에게 이야기들은 후 경호원인 반에게 이야기 해주었고 그는 다
시 그녀를 교회까지 대려다 주고는 기약도 없이 그렇게 떠나 버렸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차를 보며 그리고 뒤돌아 보지 않는 그를 보며 어쩐지 우울해 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디 다녀 온 거야?]

그는 방안에 불도 켜지 않고 자켓을 벗고 있었다.

[오빠.]

[상관하지 마라 노바. 나가.]

그녀는 싸늘한 엘라우드에게 질려 버린 듯이 나가 버렸다. 그는 노바가 나간 걸 확인한 후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보스턴에 간 이유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은조를 보고 있으면 자신에게도 따뜻함이란 것이 느껴져서 일까....
그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비서도 노바도 그가 다친 이유를 묻지 않았고 병원 따위를 챙겨 준 적이 없었다.
그는 은조의 작은 얼굴을 기억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 따위 작은 여자...약혼자가 있는 여자...
그런 여자에게 뭘 기대 하는 건지...

석현은 노바와 함께 보스턴으로 가고 있었다.
노바의 불안정한 눈을 보며 그는 어젯밤에도 노바가 엘라우드에게 입을 열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어 노바. 당신도 알고 있는 일이잖아.]

노바는 불안정한 미소를 보이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드문 이야기했다.

[미안해 석현씨...은조씨 만나는데 내가 따라가서...하지만 오빠와 같이 있다가는 미칠 것 같
아서..]

석현은 한숨을 쉬었다. 노바의 저런 상태는 전혀 그녀답지 않았다.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엘
라우드를 통제 할 수 있었던 노바 였다.
석현은 차에 기어를 바꾸며 혀를 찾다.

[은조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을까...오해할 것 같아...]

노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마 석현씨...내가 알아서 할께...나중에 그녀에게 말하겠어...]

석현은 자신의 틀 안에 숨어 버린 노바를 탓할 수 가 없었다.

[석현씨!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거야?]

은조의 환한 웃음...그는 마음이 푸근해 지는걸 느끼며 은조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노바는 따라 내리며 석현과 은조를 보았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두 사람...
한때 오빠에게서 벗어날 남자로 석현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노바는 그런 두 사람을 쓸쓸한 시선으로 보았다.

[노바 오랜만이에요.]

은조가 수줍은 듯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긋이 웃으며 두 사람을 방안으로 안내했다.

[오면 온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요. ]

은조는 차를 내오며 석현에게 투정을 부렸다. 석현을 껄껄거리며 은조를 자신의 옆에 끌어
당겼다.
은조는 얼굴이 붉어져 그를 밀었다.

[노바씨 있어요...]

그는 은조의 귀여운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그리고는 노바의 눈치를 흘긋 보고는 그녀를 풀
어주었다.

[난 상관 말아요 은조씨 보고 싶어서 오는 사람 발목 잡고 따라온 건 저니까요...]

은조는 미안해하는 노바를 향해 웃어 보이며 노바의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커피를 입에 가져가며 한동안 인상을 썼다.
문득 노바가 오빠인 엘라우드를 걱정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엘라우드의 상처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노바...혹시 레귀자모씨 때문인가요? 의사의 말로는 깊은 상처는 아니라고 했어요. 약은 잘
먹어야 하지 만요..]

노바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은조를 보았다.

[은조...네가 어떻게 레귀자모씨가 다친 걸 알고 있는 거지?]

은조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석현을 보았다.

[응? 어제 보스턴에...]

은조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무슨 죄라도 지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하긴,,어제 엘라
우드는 일 때문에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석현의 눈빛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일 때문에 왔겠지...아마 그럴 꺼야 석현씨.]

노바는 얼른 이야기했지만 노바의 눈에도 의문이 가득했다.
은조는 그 자리에서 땅으로 꺼지는 느낌 이였다. 이 두 사람은 엘라우드를 싫어하는구나...
그녀는 왠지 모를 동정심이 일기 시작했다.

[노바는...몰랐어요? 한 집에 살고 있잖아요...오빠인데...]

노바는 무안한 듯이 은조를 한동안 보았다.

[같이 산다는 것과 한집에 산다는 건 틀린 말이에요....그와 난 한집에 살뿐이에요..]

은조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노바를 보았다. 석현은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지난번 엘
라우드 답지 않던 납치 사건이나. 그리고 지난 파티에서도 그녀를 데리고 나가버린일까지...
이번에는 빨리 퇴근하더니 보스턴에 왔었다니...
그는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은조...우리 결혼 서두르는 건 어떨까...나 그러고 싶은데..]

은조는 갑자기 대화의 방향이 바뀌자 어리둥절한 듯이 석현을 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학기는 마쳐 야죠. 어차피. 1년만 기다리면 되는 걸요.]

그는 속으로 그 1년이 너무나 위험 천만하게 보였다.
엘라우드가 은조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편하게...아니면...
석현은 불안정한 시선으로 혼자 생각에 빠져 버린 은조를 보았다.

-6-

방안에 햇살이 들어오자 그는 붕대가 잔뜩 감긴 손을 들어 눈을 가리다가 움찔했다.
몇 시일까...
그는 깔깔한 입안에 욕지기가 밀려 올라오는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는 반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음...그래...일어 난 것 같군...기분은 더럽지만...그래 알아보라고 한 일은...]

그는 쉰 목소리로 반에게 물었다. 반은 신문을 접으며 살짝 인상을 썼다.

[듣고 싶지 않으실 것 같군요...우선 샤워부터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반은 어느새 자리를 뜨고 없었다. 엘라우드는 다친 손을 보았다. 자신의 손을 걱정하던 은조
의 얼굴과 함께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엘라우드는 눈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이기
에 더 탐나는 것일까....

[무슨 일인지 말해 봐 난 참을성이 부족하니까.]

반은 그에게 커피를 주며 인상을 썼다.

[오늘 아침에 두 분다 보스턴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노바아가씨 경우에는 정기적으로 병
원 출입을 하고 있습니다.]

[병원? 무슨 소리야 그 애가 병원에 가야 할 이유가 없잖아.]

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엘라우드 앞에 무슨 종이인가를 주었다.

[정기 검진은 이미 지난주에 받으셨습니다. 저도 정확한 일은 알아보고 있습니다만...먼저 아
가씨에게 물어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기자라도 알면 곤란해질 일이니까요. 거기다가
어제 일을 이미 기자들이 눈치 체는 것 같고요.]

엘라우드의 눈이 가늘어 졌다.

[알려 누구든 기사화 시키면 잠자리가 불편해 지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우드는 싸늘해 보이는 군청색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으
로 앉아 있었다. 자신의 성격처럼 깔끔한 모습...그리고 이국적일 정도로 긴 머리카락..위험한
한 마리의 표범 같은 남자...같은 레귀자모 집안의 두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에
반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노바 아가씨 일은..]

[그 일도 비밀리에 하도록 해...그리고 노바가 누굴 만나는 지도 알아두고...석현을 보낼 만한
곳을 알아봐. 이번 달 안에...]

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우드의 싸늘한 분노를 느끼며...
그리고는 약봉지를 내밀었다.

[은조씨가 주셨습니다. 꼭 드셔야 한다고 저에게 일장 연설을 하시더군요.]

엘라우드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어렴풋이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맹랑하군...]

하지만 반은 알고 있었다. 결코 은조는 맹랑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그리고 지금 엘라우드가
가장 많은 시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좋은 여자 같았습니다.]

[너답지 않군 여자에 대해 말하다니...그만하지]

노바는 돌아오는 내내 침묵을 지키는 석현을 부담스런 마음으로 보았다.
은조와 엘라우드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 것 일 것이다.
하지만 오빠는 누구도 어느 누구도 사랑하거나 살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었다.

[노바...하나만 물어 보자...회장님..무엇 때문에 나의 은조에게 그렇게 하시는 거지?]

노바는 난감해서 입을 다물었다.
뭐라 말할 수 있을까....엘라우드에 대해서 그녀는 사실 표면적인 것뿐 아는 것이 거의 없었
다.
그녀는 입을 다문 체 차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정말...기분 더럽다...남의 여자를 넘보다니...회장답지 않아.]

이빨 사이로 말을 밀어내는 석현을 보며..이 남자가 왜 자신을 예전에 이렇게 강경하게 잡아
주지 않았는지 원망이 생기기 시작하자 그녀는 더욱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바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오빠에 대한 불신...석현에 대한 섭섭함....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은조에 대한
질투...노바는 자신이 추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 나 좀 봐.]

엘라우드는 읽던 책에서 눈을 들어 동생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안경을 벗고는 그녀를 보며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무슨 할말이지? 너에게 들을 말이 있기는 하지만...]

노바는 움찔해 엘라우드의 찌르는 눈을 보았다.

[오빠...보스턴에는 왜 간 거야...]

엘라우드의 턱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엘라우드가 이 질문을 무지하게 싫어한다는 걸
느꼈다.

[내가...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에게 사납게 물어 보았다.
노바는 한숨을 쉬며 그의 옆 의자에 앉았다.

[오빠가 다친 걸...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것이 그렇게 유쾌한 경험일 리는 없어.]

엘라우드는 안경다리를 쥐고 살살 흔들며 그녀의 말에 진위 여부를 알아보려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알 필요는 뭐지...넌 나에게 비밀이 많은데...안 그래?]

노바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정도 눈치가 빠른 엘라우드가 알아차린 것이 분명했다.
노바는 입안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마...알아내는 재미도 그저 그만 이니까.]

엘라우드는 책을 들고일어나며 차게 말했다.

[난 이런 게임에서 언제나 승자였어 노바...내 동생이라도 나와 게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
려운 것인지 보여 줄 수 있다는 걸 잊지마.]

엘라우드는 책을 들고 나가 버렸다. 모처럼의 휴일은 그렇게 살얼음이 깨어지는 듯한 불길
한 소리로 끝나 가고 있었다.

그의 인상쓴 얼굴이...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성난 걸음이 그녀는 두려웠다.
무슨 일이기에 학교 앞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안녕 하세요...]

그의 선글라스는 그녀의 눈을 암흑 속에 밀어 넣을 만큼 검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변
함없이 경호원이 즐비했다. 그녀는 자신과 안면이 있는 반에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엘라우드의 굳어 버린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는 사라져 버렸
다.

[차에 타. 할말 있어.]

그는 나직하게 이야기하며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녀는 주위의 호기심에 찬 시선을 느끼며 머뭇머뭇 그의 차에 올랐다.

[반. 출발해.]

[저...어딜 가려는 건가요?]

그는 그녀를 흘끔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앞만 보았다.

[저기요...이제..이렇게 갑자기..]

[병원 가는 거야 궁금해할까 봐 널 대리고 가는 거야. 이제 된 거야?]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의 붕대에 싸인 손을 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길게 묶여진 머리카락을 보았다.

[저기...힘들었겠어요...머리 묶으려면...]

그녀는 그의 다친 손을 손가락질하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그가 은조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억지로 참는 것이 표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경쾌한 웃음소리가 터
져 나왔다.
은조는 당혹스럽고 자신의 엉뚱한 발상에 무안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묶으려면 어렵지...그것 말고 여러모로 어려워..]

그는 그녀 쪽을 보고 아까 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묶어둔 긴 검은 끈을 풀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당신이 묶어주면 어떨까...은조...]

그녀는 그의 갸름하고 길지만 남자다운 손을 멍하니 보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손에서
끈을 받아 쥐었다.
머리카락이 풀어진 그는 처음이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묶여진 모습만 봐왔었는데...
그의 긴 머리카락이 그의 눈을 반쯤 가리며 그의 검은 정장위로 풀어져 있었다.
언제 벗었는지 그의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눈은 마치 깊은 심해의 빛처럼 그녀의 영혼을 감
아 끌어 당겼다.
긴 검은머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끈과 같이 그녀의 손가락에 감겨들며 그녀를 죄
어 오는 기분이었다.

[난...]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자신도 모르게 만지던 손을 얼른 거두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군신처럼...그는 그렇게 그녀의 옆에 있었다.

[간단한 일이야...못 할 것처럼 굴지마...]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보고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손으로 끌어 넘
겨주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내쉬는 숨결이 그녀의 팔 안쪽의 예민한 부분에 나비의 날개짓처럼 다이
고는 날아가 버리자 그녀의 머리 속은 까만 망토에 싸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부드럽지만 힘있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애로틱하게 빠져나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빨리 그의 머리를 묶어 버리려고 노력했지만...생각처럼 쉽게 묶을 수가
없었다.

[정신이...산란한 거야? ]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녀가 도리질하자 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카락을 쥐고 입가에 살짝 댔다가 놀라 때어 내고는 헛기침
을 했다.

[다...다했어요...]

그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녀는 무안해서 그를 보지도 못했다.

[당신의 입술을 느끼고 싶은 부분은 내 머리카락이 아니야...]

그녀는 빨개진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관능적인 선을 그리고 있는 그의 입술이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천천히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그녀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순간 그는 그녀의 입술 앞에 멈추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다 왔군...내리지.]

그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차에서 내려 버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
었다.

<왜...그에게 끌리는 거지...나에게는 석현씨가 있어...이러면 안돼...이러면...>

-7-

달밤의 방안에서 술을 마시다니....미친 짓도 가지 가지 군...
그는 쓰게 생각하며 자신을 비꼬았다.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노바 때문에 화가 난 상태에서 어쩌자고 다시 은조를 찾아간 걸까...
거기다...마지막이라고...더 이상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다정한 모습과 따뜻한 체온에 중독된 듯이 끌려가는 자신이 그는 바보 같았다.
엘라우드 레귀자모...
이렇게 멍청한 인간일 줄이야...
그는 자신이 치졸한 졸장부 같았다.
여태 여자들과 숫한 염문을 뿌렸지만 부하 직원의 약혼녀는 명단에 끼어 있지 않았다.
바람에 나풀거리던 단발머리...
검은 눈 가득히 보이던 따뜻함...
그리고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
그는 머리를 저었다. 노바만 생각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도...자꾸 심란한 마음은 그녀를 향
해 달려가고 있었다.
엘라우드는 자신의 긴 머리채를 쥐어 들고 그녀가 살짝 자신의 머리끝에 입술을 대던 모습
을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가 풀어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동생과 반을 뺀 누구도 그의 머
리카락을 만지거나 하지 못했었다.
그는 순간 아프게 손을 비틀었다.

[더..이상 당신을 보지 않겠어...이제는 떠나...내 눈앞에서...]

엘라우드는 서류 한 장을 눈여겨보며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갑자기 찾아온 엘라우드에 당황하면서도 그가 그렇게 무뚝뚝하고 외로워 보인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에 아픈 정처럼 와서 박혀 들었다.

[은조. 뭘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석현을 보았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석현이 엘라우드를 싫어하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
였기에  아무 말 없이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올려 주며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디...다녀왔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오늘 석현씨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석현은 인상을 썼다. 사실 엘라우드가 오늘 갑자기 회사에서 나갔다는 소리를 듣는 즉시 은
조가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은조...넌...날 어떻게 생각하지? 가끔...궁금해...]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진지한 눈동자를 한동안 보던 그녀는 그의 얼굴 위
로 오늘 오후에 본 엘라우드의 슬픈 눈동자가 겹치자 갑자기 폐부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
가는 기분 이였다.

[난....석현씨...왜 그래요...이상하잖아요..]

그녀는 웃으며 그의 팔을 슬쩍 밀었다. 석현은 그런 은조에게 속지 않았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망울에서...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은조...우리...빨리 결혼하자...더 이상 기다리기..어려워...]

은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석현을 사랑한다...그를 사랑한다...

[그리고...은조...나 오늘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아....너랑...같이 있겠어...오늘...같이 있자...은
조...]

은조는 뭔가가 자신의 머리를 잡아 누르는 기분 이였다.
석현의 뜨거운 입술이 입술 위로 기울어지며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품에 아무 말 없이 안겨 있었다.
그를 사랑하니까...그는 자신과 결혼할 남자니까...
석현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목 줄기를 타고 내려오며 그녀의 가슴을 모아 쥐었다.
은조는 눈을 꼭 감았다.
석현은 그녀의 떨리는 몸을 자신의 품에 끌어당기며 그녀의 셔츠 단추를 풀고는 그녀의 동
그스름한 가슴을 손안 가득 쥐었다.
은조는 그를 거스르고 싶었지만 거부하지도 못한 체 안겨 있었다.
석현의 손은 치마 자락을 걷어올리며 다급하게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건...아니야...나도 모르겠어....>

석현은 자신의 옷을 급히 크르며 그녀를 벽 쪽으로 밀었다. 길게 이어지는 키스와 애무에
그녀는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석...석현씨...]

그녀는 머뭇거리며 그를 불렀다. 차라리 오늘 집에 사람들이 다 있다면...작은아버지라도 오
셨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은조....사랑해...]

석현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이며 지나고는 그의 두 손이 엉덩이 사이로 파
고 들어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넌 그를 사랑해 안 그러니 은조? 은조는 자신에게 반문을 하며 눈을 꼭 감았다.
석현은 은조를 안아 들고 그녀의 침대로 가서 그녀를 뉘고는 바지를 끄르고 있었다.
순간 그는 그녀의 감겨진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지는걸 보았다.
마치...순결한 어떠한 것을 더럽히는 기분....
그는 싸늘한 뭔가가 자신을 훑고 지나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감정에 너무 치우쳐 그녀의 두려움을 몰랐던 자신이 바보스러웠다.

[은조....]

그는 침대에 주저앉아 그녀의 옷을 바로 해주었다.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마치 악당이 되어버린 기분...

[은조 미안해...너무 불안해서...너무...]

그는 은조를 꼭 안으며 이야기 했다.

[난...엘라우드가 두려워....그가 널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릴까봐....널 사랑하는 날 이렇게 버
리지마....난...그가 너의 곁에 맴도는 것이 너무 두려워 은조 너의 따뜻함에 그가 매료 될까
봐....두려워 은조...널 너무 사랑해서...]

은조는 그의 품에 안겨 자신이 너무 죄스럽게 느껴졌다.
석현은 자신을 기다려 주는 약혼자였다. 이렇게 엘라우드에게 마음을 허락해서는 안돼는 일
이었다.

[미...미안...해요...미안...해요...]

그녀는 흐느끼며 간신히 이야기했다. 하지만..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목소리가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넌...그를 사랑하는 거니? 그런 거니?>

석현은 달리는 차안에서 쓰게 웃었다.
은조의 마음이 흔들리는걸 알면서도 잡지 못하는 자신의 바보스러움...
거기다 그 상대에 대한 두려움....
차라리 다른 남자라면 상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석현은 담배를 빼물었다. 답답한 마음에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밤이었다.
은조는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책임감이 강한 여자니까....그리고 엘라우드는 결코 은조를 유혹하지 않을 것이다...
엘라우드는 결코...자신의 부하의 여자는 건드리지 않으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나를 찾으시는 거지?]

석현은 뚱하게 이야기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장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방안은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들어와. ]

그는 책상에서 무서운 속도로 일을 하고 있는 엘라우드를 보았다. 엘라우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손짓을 했다. 석현은 엘라우드의 넓은 어깨를 보며 주눅이 드는 자신을 느꼈다.
그는 차가운 음성으로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하고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잘 왔어. 할 말도 있고 말이야. ]

엘라우드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옆에 서류를 주었다.
석현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서류를 보고는 당황한 눈으로  엘라우드를 보았다.

[이...이 서류는...]

[파격적이지...안 그런가? 자네를 믿기에 내 주는 일이야....]

하지만 엘라우드의 목소리는 전혀 축하해주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다른 사람도 있는데...하필...]

[자네가 최고니까....그 뿐이야...그쪽으로 가면 윤을 도와줄 사람들을 몇 명 대리고 갈 수 있
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석현은 엘라우드를 보았다. 차가운 엘라우드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홍콩 지사를 내주는 거야...어떤가...아...결혼은 그쪽에서 해야겠군....당연히 약혼녀도 대리고
가야 하지 않은가?]

석현은 진심을 보려는 듯이 엘라우드를 빤히 보았지만 엘라우드는 아무런 내색도 없었다.

[가겠습니다...]

[잘 결정했군...되도록 빨리 가는 것이 좋을 꺼야.]

엘라우드는 찬바람 소리가 날정도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책상으로 가서는 등지고 섰다.

[그만 나가보고 인사 부장과 다시 이야기하게...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윤..]

석현은 그의 고독한 등을 한 동안 보고는 물러났다.
엘라우드는 그를 홍콩으로 보내려고 하고 있다...
노바 때문일까...아니면 은조 때문일까....

엘라우드는 고층 건물에 둘러싸인 창 밖 풍경 사이로 자신을 한동안 보다가 나가는 석현을
노려보았다.
석현을 믿어서 내 보낸다고?
가증스러운 거짓....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 찍었다. 상처가 찡하게 아파 오며 무딘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핥고 지나갔다.
은조...이제는 볼일이 없을 것이다...정말...없을 것이다...
그런데...심장이 무너지는 이 마음은...무엇일까...
그는 한동안 이마를 쥐고 그렇게 서 있었다.

[어디를 가자고요?]

[[홍콩. 지사장으로 발령 났어 오늘 인사부장과 세부 사항까지 이야기했어 은조..나랑 같이
갈 거지?]]

은조는 수화기를 들고 멍하니 있었다.
홍콩....
그녀는 주저하는 자신을 보며 순간 씁쓸했다.

[[은조?]]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아직...공부도....남아 있어...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아...생각할 시간을 줘...]

[[.....]]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석현의 대답이 들리길 기다렸다.

[[그래...너무 갑작스럽지...이해해...나중에...다시 이야기하자...]]

그녀는 끊어진 전화를 한동안 들고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는데...망설일.....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점점 깊어 가는 밤하늘을 보며...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무슨 말을...
그리고...이렇게 떠나면...그녀는 석현과 결혼할 것이고 그녀의 꿈이 이루어진다...
꿈이...
꿈....
정말...그녀의 꿈일까...정말 원하고 있을까....
은조는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대책 없이 흔들리는 자신도 미덥지 못했다.

-8-

창문 앞에서 밤을 지새우던 그녀는 마음속의 파문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모두가 자신이 모자라서였다...자신이 바보 같아서였다.
고마운 석현을 배신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르르릉..."

그녀는 전화기 소리에 멍하던 정신을 다잡고 수화기를 들었다.

[네..]

[[.....]]

아무 소리 없는 수화기...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어리는걸 느꼈다. 그렇게 수화기
를 쥐고 얼마를 있었을까...

[[가는 건가..]]

쉬어버린 듯한 엘라우드의 목소리...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건가...]]

그녀는 일부러 상냥하게 이야기했다.

[네...고마워요 그런 기회를 줘서...약혼녀인 제가 가지 않을 수 없죠...]

한동안 침묵...

[[축하할...일이군...잘가...]]

그리고는 끊어진 신호음이 한동안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멍한 상태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동정과...사랑을 착각하지마...은조...넌 그를 동정하고 있어...]

그의 외로운 옆모습을...그의 고독한 뒷모습을...그리고 그의 아픈 마음이 고스란히 보이던...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을...
창 밖으로 타이어가 찢어져버릴것 같은 소리가 나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내밀어 창 밖을 보
았다.

[엘..라우드...]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마음을...그렇게 그의 옆에 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던 그 마음을 무시하고
나르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전화를 팽겨치고 한동안 있다가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새우고 불꺼지지 않은 창을 보았
다.
무엇을 바란 거지...
그녀가 남기를 아니면 그녀가 떠나길....
그는 복잡한 마음으로 오픈카 안에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이 언뜻 비추자. 다시 차의
기어를 넣어 출발했다.

[엘라우드!]

그는 자신의 귓가를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급히 차를 멈추었다. 뒤돌아 볼 수 없
어 백미러를 통해본 그녀는...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예전에 본 낡은 청바지에 셔츠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는 핸들을 꽉 잡았다.
내리면 안 된다고...자신에게 말하고 싶었지만...마지막으로 그녀를 한번만 더 보고 싶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차에서 내려서 그녀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을 향해 뛰어 오고 있었다.

[엘라우드..]

그녀가 부르는 소리...그는 그녀를 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널...보내면...이런 마음이 사라질 거야...은조..]

그는 그녀의 작은 육체를 끌어안고 절망적인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물이 번진 뺨을 닦아주고는 젖은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그리고는 격정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너무나 따뜻하고 그리운 느낌...그리고 너무나 소중한 느낌...그녀를 부수고 싶지 않았다. 그
러기에 그녀를 떠나 보내야 했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작은 입술을 흐느낌에 잦아들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검
은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어 그가 떠나는걸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이 꼭 쥐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여태껏 느끼지 못한 어떠한 감각을 일깨우고는
그녀의 숨결을 앗아갔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흐르는걸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키스는 그가 갑자기 멀어지며 끝이 났다.

[엘..라우드...]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를 놔주었다.

[잘가....그리고 행복해...그런데...알아?...네가 처음으로 내 이름 불러 준 것...]

그는 그렇게 말하고 멀어졌다. 밝아 오는 미명을 등지고...그녀는 눈물로 흐릿한 그의 뒷모습
을 바라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

바보짓을 했다....
그는 쓰게 웃으며 차를 몰았다. 마지막이라고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해 놓고는...
오늘 다시 마지막이라고 그녀를 만나다니...
보스턴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손을 핸들에 올리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쥐었다.
오픈카 안에는 My All이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리듯이 가사를 따라 불렀다.
은조....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계속 되는 악몽의 연장 같았다.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반이 나직하게 물었지만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들어섰다.

[경호원을 따돌리신 건...이번이 처음 이십니다.]

그는 반의 목소리를 들으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회장님.]

[그만...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니까...오늘 바로 출장 간다. 짐 꾸리고 준비 해줘 공항에도
연락하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샤워 실로 들어가 버렸다.
반은 그가 어딜 갔다가 온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은조를 홍콩으로 보낸 건 그가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르는 상황에 그녀를 이용하지 않
으려는 그의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노바가 걸린 일이라 아무리 냉정한 엘라우드라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기에...
반은 수화기를 들며 상념을 몰아 내고 비행사와 짧은 대화를 했다.

[노바는 출근 한 건가?]

[네. 집에는 안 게십니다.]

엘라우드의 목소리는 샤워기를 틀어 놓은 소리에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엘라우드가 생각에
빠져서 그를 밀어내기 위해 샤워기를 틀어 놓은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떨어지는 물줄기를 무심히 보며 옆에 서 있었다.
반의 보고가 어떤 것일지 모르지만...
그 보고서를 읽으면 아마 그녀에게 화풀이하고 싶을지도 몰랐다.
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여태 여자에게 휘둘린 적이 없는 그였다.
그녀 따위는 자신에게 상대가 안 된다....여자는 많고도 많은 존재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바라는 여자가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날까...
이대로 그녀가 결혼해 석현의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도...마음이 편할 수 있을
까...
그는 자신에게 반문하며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숨기려고 했다.

[망할...]

그는 나직하게 욕설을 뱉어 내고는 샤워기 안으로 들어섰다.

[오빠....어디로...]

노바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엘라우드를 보며 불안하게 물었다.
갑자기 다시 떠난다니...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엘라우드는 눈처럼 하얀 셔츠에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런던으로 간다..그곳에 지사에 일이 터졌다.]

그녀는 부르르 떨리는 자신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제1팀장이 가도 된다고 말한 건 오빠야!]

[내가 가던 다른 사람이 가던 수습할 수 있겠지...하지만...내가 가고 싶어...이곳이 지겨워.]

노바는 그런 그의 나른한 목소리를 들으며 할말을 잃었다.

[은조...때문이야....그런 거야?]

엘라우드는 무표정하게 노바를 돌아보더니 손 사례를 했다.

[시나리오 작가로 나서지 그러니. 넌 너의 오빠 되는 사람을 모르는구나. 난 엘라우드 레귀
자모야. 여자에 휘둘리다니..내가 그렇게 바보스러워 보이니? ]

엘라우드는 입 어귀를 비틀며 말하고는 방안을 빠져나갔다.
노바는 그런 그의 냉정한 모습에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노바는 자신의 스커트를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반...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이번에는 얼마나 걸리는 출장이죠?]

반은 애매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노바는 갑갑했지만 반에게 아무 말도 들
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는 창 밖으로 지나가는 무수한 바다의 풍경과 산의 풍경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었다.
개인전용 비행기 안에서의 모든 편의 시설도...
어느것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라 말할까...이런 답답한 기분...다시..뉴욕에 돌아갔을 때...
그리고 다시 보스턴에 돌아갔을 때...더 이상 그녀는 그곳에 없다....
그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쓰게 웃었다.
이대로 지워져...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영원히.....
그는 이마위로 손을 올리고 자신의 상념에서 빠져 나오려고 노력했다.
긴장된 그의 얼굴에 얼핏 스치는 자조적인 웃음...
반은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보며 그의 마음을 상처 입을 일만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9-

그녀는 가만히 짐 가방을 내려보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홍콩으로 내일 출발한다...
내일...더 이상..
아니...그녀는 눈을 감았다. 가야 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 주는 석현을 위해...그리고 자신을 위해...
자신을 위한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차 올라오는걸 느끼고는 한숨을 조그마하게 내쉬었다.
엘라우드....그가 마음속에 무거운 추 마냥 달려 있었다.
그를 볼 수 없다....그를 만나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를 동정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창턱에 기대어 앉았다.
그는 왜 키스만 남기고 떠났을까....
온몸이 산화되어 버릴 것 같던 그의 키스를 생각하자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난 석현을 사랑해...이런 마음은 위험한 거야...>

그녀는 자신에게 충고하며 방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초조했다. 갈 수 없다는 마음이 지
배적이었다.
오늘밤에 짐을 가지러 석현이 온다...
갈 수 없다...아니 가야 한다....

노바는 석현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석현씨...꼭 가야하는 거야...나랑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그는 노바의 눈물 젖은 눈을 보았다.

[노바...난...]

[알어...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하지만 석현씨...날 한번만...한번만 사랑 해주면 안될까?]

석현은 놀라고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안...안돼 노바...이러지 말자...우린...]

노바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그의 곁을 벗어났다.

[나...정말 석현씨 사랑했어....그것만...알아줘...]

석현은 노바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노바...]

노바는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은조씨가 미워...그것 알어?]

노바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석현은 혼란스런 눈으로 노바의 뒷모습을 보았다.
노바...그녀는 자신의 대학 동창이자..그의 연인 이였다.
그들이 연인으로 보낸 2년간 그는 노바와의 결혼을 심각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엘라우드를 만나고 자신과 너무나 다른 환경의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발령 났을 때는 정말이지 이것이 기회 같았다.
그리고 거기서 은조를 만났다. 은조의 부드러움을 자신과 같은 피부색을 자신과 비슷한 환
경과 그녀의 맑고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하지만...노바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한번의 불장난이 안겨준 상처를 지니고 괴로워하는 노바를 떠나 홍콩으로 가는 것이 어쩌면
자신과 은조 에게는 잘된 일이지만 노바 혼자 엘라우드라는 뜨거운 화산 앞에 버려지게 생
긴 일이었다.
하지만...이제는 은조 없이 미래를 생각할 수 없게 된 그는 노바의 일에 더 이상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엘라우드가 은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그는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
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자리를 일어섰다 전화벨이 처량하게 계속 울리자 그는 한동안 서 있다 천
천히 전화기를 들었다.

[네 윤석현 입니다.]

[[석현씨...저 에요...]]

[은조...아...나 지금 바로 보스턴으로 출발 할거야..]

[[석현씨...나...당신과 이야기할 일이 있어요....여기...뉴욕이에요...]]

석현은 전화기를 한동안 보았다. 은조가 뉴욕에? 그녀도 빨리 떠나고 싶은 걸까....

노바는 눈물 젖은 눈으로 욕실로 뛰어 들었다. 가정부와 집사는 이런 이상한 행동의 그녀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았다.
자신이 패배자 같았다.
그가 미웠다...오빠도...두 사람을 갈라놓고는 다른 여자에게 빠져 버린 오빠가 너무나 미웠
다.
노바는 거울 속에 비친 여자를 보았다.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헝클어진 머리....늙어 버린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와 함께 하던 그 기간의 노바는 병들고 죽어 버린 듯이...

[모두가...싫어...]

그녀는 혼자 말을 중얼거리며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팔목을 한동안 내려보았다.

[안녕...오빠...안녕 나의 사랑하는 석현씨....그리고...로리...]

[무슨...소리야...다시 말해 줄래...은조...]

은조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나...공부하러 왔어요...석현씨...나...여기 남아서 공부하고 싶어요...1년 남았어요..아깝다는 생
각이 들어요.]

[그건 홍콩에서 돌아온 뒤에 마쳐도 된다고 했잖아!]

석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람처럼 그녀를 닦달하며 몰아 붙였다.
그녀는 그런 그를 슬픈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석현씨...난...아직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나..요즘 우리 결혼에 의문이 들어요...정말...당
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정말 이게 올바른 일인지...]

석현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녀를 보았다.

[석현씨...날 이해해 줘요...당신을 사랑해요...하지만..난 요즘 혼란스러워요...]

[엘...라우드 때문이니...]

은조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나도...나 자신이 싫어요...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이해 해줘요...제발...]

석현은 체념의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난...너 아니면 안 된다 은조...이러지마...내게 뭐가 잘못된 건지 말해...이러지마 은조야..]

은조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몸을 가누었다.

[나...마지막 선택은 당신일 거예요...바보처럼 이런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내가 못 마땅
할 뿐이에요...학교 마치면..바로 당신에게 가요. 그때는 난 아무 망설임도 없을 거예요...약속
해요..석현씨...]

석현은 절절한 그녀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괴로워지는걸 느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기다릴게...은조..네가 내 품에 돌아오는 날을....그리고 이건 알아줘...난 널 사랑해...그는...사
랑을 모르는 남자야. 어머니를 희생시키고 살아난 차갑고 냉정한 남자야..잊지마 은조...그에
게 다가가는 건 너 자신을 망가뜨리는 짓이라는 걸....]

은조는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한 짓일까...석현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하지만 지금 이 마음으로 그를 떠난다면....그녀는 영원히 엘라우드라는 남자의 그림자에 눌
려서 살 것 같았다.
은조는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은조는 그의 슬픈 눈을...영원히 마음에 박혀서 떨어질 것 같지 않은 눈을 보았다.

그는 미친 듯이 뛰어내리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건가. ]

그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음성이 퍼져 나왔다.
그의 넥타이는 풀어져 있었고 셔츠 단추는 3개나 열려 있었다.

[저...죄송합니다...]

[너희보고 노바를 지키라고 했지...그런데...이런 꼴로 만들어?]

엘라우드의 목소리는 아주아주 작아 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할 정도 였다.

[회장님..의사 선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엘라우드는 몸을 휙 돌려 반과 함께 의사에게 다가갔다.
경호원들은 한숨을 쉬며 진땀을 닦았다.

[뭐라...구...]

[회장님...]

엘라우드는 비틀거리다가 옆에 의자에 앉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 할 수 없었다. 창백한 노바....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걸까...
그는 질린 얼굴로 노바를 보았다.
너무 늦게 찾았다고 했다...그리고....

[윤..석현..이 자식...]

엘라우드의 입술 사이로 거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반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은조가 홍콩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엘라우드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한켜 한켜 싸여가는 분노를 곱씹었다.

[어떻게...무너트릴까.....석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반은 눈을 감았다. 잔인한 그의 성격은
그의 아버지와 같은 성질의 것 이였다.

[찾아..그의 가족과..그에 관계된 사람을....그리고 알려...그리고 보스턴에도 가봐....그 자식이
어디로 무엇을 빼돌렸는지..알아야 하니까..빠른 녀석으로 붙여서 찾아...조그만 단서 하나라
도...]

반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 안의 살벌한 분위기는 그가 자신의 동생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널..이렇게 만든...그를 그리고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노바..]

어두운 방안에 그는 자신의 옆에 놓인 사진을 보았다. 2주전에 떠나야 했을 여자가 여기 있
다니...
그는 마음속에 여러 갈래의 길이 놓인걸 보고 있었다.
이 여자 때문에 노바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아니면...자신이 생각을 잘못하여 석현을 한국에 보낸 것이 노바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
은조....은조....
그는 이마를 쥐었다.
은조를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노바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노바..병석에 누운 노바를...

[반...들어와..]

반은 그의 지시를 받자 마자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대려와...석현의 사랑하는 여자를...그에게 책임감을 일깨워 줄 시간인 것 같군. 내 집으로
대려와 ]

반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감각 없는 얼굴의 엘라우드를 보았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
는 노바는 그의 이런 분노에 기름을 부을 뿐이었다.
반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집을 빠져나왔다.

[이 늦은 밤에..누가 날...]

그녀는 기숙사에서 빠져 나오며 거리를 보았다. 커다란 세단...
엘라우드? 그녀는 심장이 뛰는걸 느꼈다.
하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는 엘라우드가 아닌 반 이였다.

[아..안녕하세요 반..]

반의 여태 보지 못한 냉정한 얼굴에 그녀는 몸이 얼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같이..가주셔야 할 것 같군요...]

[네?]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반을 보았다.

[그가..아픈가요?]

[.차라리..아파서 찾는 거라면...저도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 것 같지는 않군요. 죄송합니다.]

그녀는 놀라 뒤돌아 보았을 때 이미 예전에 자신을 한번 납치한 적 있던 남자들이 그녀의
팔을 옥죄었다.

[반?]

반은 애써 시선을 외면하고 앞서 걸었다.

[놔...놔줘요! 무슨 일이에요! 놔요! ]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자 누군가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공포심이 자리잡기 시작하자 그녀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려 오
기 시작했다.
엘라우드의 명령....그리고 이 남자들의 행동...무슨 일일까...

[당신은...그때 홍콩으로 가셨어야 했습니다. 은조씨..]

반이 최대한 억누른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차를 출발 시켰다.
그녀는 어두운 거리를 미끌어지기 시작한 차안에서 자신을 갈아먹는 공포와 싸우려고 안간
힘쓰기 시작했다.

-10-

어둑한 서재로 끌려 들어간 그녀는 어둠에 눈을 익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가 있어 반.]

섬찢할 정도의 차가운 목소리...무슨 일일까...
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그의
입술 어귀는 잔인한 냉소를 뒤틀렸다.

[저...무..슨 일로...]

[넌...홍콩에 있었어야 했어.....그랬다면..나의 이런 면을 못 보고 갈 수 있었을 탠데...]

그의 나직한 목소리...그녀는 소름이 돋을 것 같아 자신의 팔을 쓸었다.
그는 그녀의 앞에 멈추어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단도 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석현과의 약혼을 끝장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너에게는 손
대지 않겠어.]

이건 무슨 말일까...석현씨와 끝내라니...

[무..무슨 말을...하는 거예요...]

그의 입술이 다시 뒤틀렸다. 그녀는 그의 바짝 다가온 얼굴에서 그의 잔인함을 읽고는 숨이
멋을 것 같았다.

[석현과 끝내라는 이야기야. 돈을 바란다면 두둑이 주지...석현과 이만 작별해. 내가 보는 앞
에서 그에게 전화해..그러고는 끝내고 떠나 알았어!]

그녀는 그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그럴 수 없어요...]

그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가늘지만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목소리로 이야기
를 이었다.

[노바가...병원에 있어...그렇기 때문에 석현이 필요해..]

[노바가 병원에 있는 거랑 석현씨와 내가 헤어지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그의 입 언저리가 굳어지더니 입에서 욕지기가 흘러 나왔다.

[좋아...말해 주지...모르고 떠나길 바랬는데...어쩔 수 없지....잘 들어...석현과...노바는 대학 때
부터 연인 사이였어...]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그의 말을 들었다.

[지금...노바는 당신과 결혼하려는 그를 막으려다가...자살을 시도했어...]

[그...그럴리 없어요...석현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조소하는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노바가 그를 잡으려던 이유가 뭔지 말해? 노바는 임신하고 있었어
석현의 아이를 이미 4개월 이였어...노바의 자살 사건으로 아이는 잃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
하게 되었어! 그런데...네가 그와 결혼 하겠다고? 난 그를 파멸시키려고 생각했어 하지만 노
바는 그런 날 용서하지 않을 것 같더군...그래서 그를 노바에게 다시 찾아 주는 것이 가장
큰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떠나..그를.]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싫어요.....난...진실을...그에게 진실을 듣고 싶어요....]

그는 화난 손길로 그녀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뭐 어떤 진실이 필요해? 사산한 아이의 시체? 아니면 그 아이의 성별? 그것도 아니면 노바
와 그가 얼마나 자주 섹스를 즐겼나?]

그녀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그의 뺨을 때렸다.
그의 얼굴이 획 돌아가자 그녀는 멈추었던 숨을 내쉬며 괴롭게 이야기했다.

[그는...날 사랑해요...이건 결혼 전의 일이고...그는 날 ...이해해 주는 남자 에요...그에게 직접
들을 때까지..믿지 않아요....믿을 수 없어...]

그는 자신의 붉어진 뺨을 손가락으로 쓸며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에게 듣는 다구?]

나직한 음성...차라리 소리라도 지르면 덜할 것 같은 공포심이 그녀를 내리 눌렀다.

[그래...뭐라고 물을 건대...너의 유치하고 아이다운 머리로 뭐라고 물을 거냐구. 노바가 아이
를 사산했는데...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가요? 라고?]

그녀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그만 해요! 나에게 왜 이러는 거예요...차라리 그에게 날 버리라고 해요! 당신이 날 이
렇게 괴롭히는 이유를 모르겠어....제발...그만 해요....난...그를 사랑해요...나에게 이러지 말아
요....]

그녀가 흐느낌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모습을 보던 엘라우드의 가슴에 싸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으로 석현을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리 속에 거대한 구멍이 나 버린 기분...
엘라우드는 그녀를 한동안 울게 내버려두었다가 마음을 굳힌 듯이 그녀를 끌어 당겨 일으켰
다.

[그래...사랑하는 남자라...그렇다면 내가 갈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주지...너라는 여자 책임
감하나는 대단한 것 같으니...영원히 그에게 갈 수 없게 만들어 주지..]

그녀는 그의 잔인한 말이 뜻하는 바를 몰라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그녀의 셔츠자락 속으로 손을 밀어 넣더니 단숨에 찢어 팽겨 쳤다.

[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막으려고 했지만..그의 힘에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지 말아요..엘라우드..이러지 말아요..]

그녀는 흐느끼며 그를 밀치고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단호하게 그녀의 치마를 벗겨서 바닥으로 떨어지게 하고는 그녀를 달랑
들어 긴 장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널 내 것으로 만든 뒤에도 내가..그에게 간다고 한다면 난 너와 나의 관계를 그에게 말하겠
어. 재미있군...난 널 원하고 있었는데..부하직원의 여자라는 생각에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이
런 식의 기쁨이 생기다니..]

그의 잔인한 말....그녀의 마음은 상처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엘라우드..이러지 말아요...당신에 대한 좋은 추억을...이렇게 망가트리지 말아요...제발...]

그녀의 눈에 눈물이 쉴새 없이 흘렀지만 그의 단호한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어 지고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오려고 그녀의 고
른 치아를 밀어 댔지만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어 그를 피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용서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석현을 사랑한다...
순간 그의 몸에 악마가 들어온 듯 그의 모든 망설임이 사라져 버렸다.

[읍..]

그녀의 짧은 신음과 함께 그는 비릿한 그녀의 피맛을 느끼며 억지로 벌려진 그녀의 입술 안
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달콤함과 함께 그녀의 바르작 거리는 몸뚱이가 그의 이성을 점점 달아나게 했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하며 그녀의 브레지어를 끌러 내리고 그녀의 작지만 탄력 있
는 가슴을 손안에 움켜쥐었다. 그녀의 입에서 단발성의 비명이 나왔지만 모두 그의 입 속에
흩어질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 안 그러면 정말 다칠지도 몰라..]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간신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고개를 저으며 반항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내리누르며 더욱 그녀를 옴짝 못하게 만들었다.

<안돼...이건 아니야...이러면 안돼...>

그녀는 계속 그를 때리고 밀었지만 그런 행동이 그의 욕구에 불을 지르고 있다는 건 생각하
지도 못했었다.
그의 손이 단호하게 그녀의 속옷을 벗겨 내리고는 알몸인 그녀의 위에서 자신의 바지버클을
풀어 내리고 있었다.

[이..이러지 말아요...엘라우드..제발...]

그녀는 흐느끼며 그에게 사정했지만 그는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녀의 가슴만
거칠게 쥐고는 만질 뿐이었다.
그의 더운 입술이 가슴으로 이어지며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리를 오무리며 그의 손을 물리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완력 앞에 그런 행동은
불필요한 것 이였다.

[엘라우드! 그만!]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의 손은 가차없이 그녀의 가장 비밀스러운
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수치스러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하지...말아요...제발...제발...엘라우드...제발...]

그녀의 흐느낌이 더욱 커지며 그의 손을 물리치기 위해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엘라우드의 머리 속에는 그녀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여자를 품에 안
는 이유도 사라져 버렸다.
단지...갈망...
그 단어만이 그의 머리 속을 메우고 있었다.
그녀를 차지하고 싶었다.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그의 급한 손길은 그녀의 메마른 여성을 쓰다듬고 열렬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가 아픔에 몸을 뒤튼다는 것 도 그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머리 속을 가득 매운 욕구...
그녀를 향한 갈망...
그는 무릎을 이용하여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그녀가 아픔으로 비명을 질러대도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엘라우드! 안돼...악!]

그녀의 비명 소리...하지만..이미 그는 그녀의 여성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었다. 아무런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관문인 처녀막을 뚫고 지나며 느낀 건 미칠 정도의 소유욕과 흥분 이였다.
그는 그녀의 몸에 가는 경련이 쉴세 없이 일고 있다는 걸 느끼며 메마른 그녀의 안에서 움
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오고 그에 대한 원망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그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소유...그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고는 자신을 향해 그녀를 들어 올렸다. 급박한 리
듬 속에 그녀는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살아 있는 여자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그녀의 약한 신음 소리뿐...

[제기랄...]

그의 입에서 나직한 욕지기가 밀려나오더니 그녀를 안아 들고는 더욱 거칠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걸 보았다.
뭔가 소중한 것을...더럽히는 기분...
하지만 자신의 품에 안긴 조그만 불덩이에 정신이 팔린 그는 그런 자신의 약한 감정을 무시
해 버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힘차게 밀고 들어와 자신을 해방시키는 순간...그녀는 모든게 끝났다는 걸
알았다.
모든게..끝났다...
엘라우드의 복수심이 그녀를 망가트렸고 영혼까지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런 상태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수치심...
그의 품에 안겨 벌거벗고 있다는 수치심과...그가 자신의 소중한 부분을 강탈한대서 오는 원
망..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원망스러운 마음...자신의 바보 스러움...
그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입술로 닦아주었다.
그녀의 눈은 흐릿했다...그리고 그는 자신의 바지와 셔츠에 묻은 그녀의 혈흔을 볼 수 있었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녀가...처음이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는 그녀를 밀치고는 얼른 일어나 바지를 바로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밀친 대로 쓰러
져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분노를 느꼈다.
엘라우드는 그녀의 옷가지를 주워들고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셔츠와 치마를 대충 입혀 주
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철저하게 유린당한 그녀에게 어떤 감정이 남아 있을까...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퍼지는 어떠한 감정을 무시하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방을 나
와 침실로 올라갔다.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마치...부서진 인형처럼....
그는 마음속에 어떠한 덩어리가 울컥 솟아오르는걸 느꼈지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도록 해.]

그는 그녀를 내려놓고는 시트를 덮어 주었다.
그녀는 그를 보지도 않고 벽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더 이상 울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의 뺨으로 손을 뻗다가 중간에 멈추었다.
그의 마음속의 앙금이 그러한 사실을 용서하지 않았다.

[내 말 들었으면..이런 꼴을 당하진 않았을 꺼야...내 말 들어...넌 이제 그에게도 갈 수 없는
여자야. 그러니..이쯤에 단념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떠나던 그는 영원히 풀어 버릴 수 없는 벽이..그녀와 자신 사이에
가로 노이는걸 느꼈지만 그녀에게 자신이 이런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 용납할 수 없어 그
렇게 나와 버렸다.

그는 엉망이 된 서재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그녀를 그렇게 대하다니...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유 없이...아무 조건 없이 다정하게 대해준 여자를 자신이 망가트렸다.
노바라는 명목을 내세워....
그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무너지듯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영원히...그녀를 놓쳐 버렸다....이제는...아무 것도 예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한동안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11-

그는 어스름한 새벽에야 그녀가 잠든 방으로 찾아갔다.
조그마한 형상이 침대 모퉁이에 애처롭게 노여 있었다. 마치..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그녀의 혈흔이 묻어 있는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순간 자신이 이렇게 역할
수 있다는 것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어 던져 버리고는 샤워기 아래섰다.
모든 잘못이 씻겨 나갈 수 있다면 그렇게 되길 바라며...
지금 이 순간은 노바도...아니면 다른 누구도 필요 없는 존재였다.
자신의 침실에 잠든...아니 상처 입고 버려진 은조를 생각하면 자신이 너무나 치졸해서 웃음
이 날 지경이었다.
가장 소중하게 대해줘야 하는 순간에 그는 마치 짐승처럼 그녀를 갈취해 버렸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는 탈진해서 울음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떠났어야 했다....그에 관해 이렇게 추악한 추억을 가질 바에야 진정코 그의 곁을 떠났어야
했다.
엘라우드.....그에게 느껴지던 마음은 모두 그녀 눈에 들어온 하나의 허상일 뿐이었다.
오늘 그가 보여준 모습이야말로...어둡고 사악한 엘라우드 자신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다 차가운 아픔이 다리 사이를 훑고 지나자 숨을 멈추고는 눈을 감았다.
생각하지마 은조...그는 너의 몸을 더럽혔지...너 자체를 망가트리진 못했어...그러니까...
그녀는 눈에 눈물이 차 오르는 걸 느끼며 시트를 꼭 움켜쥐었다.
더 이상 그에 대한 나쁜 일면을 보지 말고 빨리 떠나자...
석현에게는...나중에 마음이 차분해 지면...그때...연락하자...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주위를 둘러 보다 창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남자의 형상에
움찔했다.

[전화할 마음이..생긴 건가...]

그의 아무 억양이 없는 목소리...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보았다.
마음속에 여러 감정이 교차하며 그를 갈아댔다.

[옷...부터..주세요...]

그녀의 흔들리는 목소리...그는 손아귀를 꽉 움켜쥐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옷이..문제가 아니잖아.]

그녀는 그가 다가오자 시트로 몸을 가리고는 일어서 뒤로 물러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때
문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앙 다물린 입술을 보니..억지로 뭔가를 참고 있는 것이
었다.

[더...이상...나에게 손대지...말아요...당신의...뜻은...잘...알았으니....제발...날...이대로...둬요...]

그는 그녀의 여리게 떨리는 어깨를 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녀의 앞으로 모아 쥔 시트가 여리게 떨리고...그녀의 머리카락까지 떨리고 있었다.

[제발...나에게...손...대지..말아요...제발.....]

그는 인상을 쓰며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울분을 눌렀다.
그녀의 흐느끼는 모습...

[내가..손대는걸 바라지 않는다면...그에게 전화해...지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런...모습으로 전화 할 수는 없어요.......나중에...할 깨요....보내 줘요...제발....]

그녀가 사정하는 모습에 그는 눈이 뒤집혔다.

[널...보내지...않는 다면...]

그녀는 처음으로 그를 올려 보았다. 공포심에 가득한 얼굴....그녀의 너무나도 겁먹은 눈...
그녀가...자신에게 겁을 먹고 있다..그녀가...
그는 그녀를 잡아 당겨 끌어안았다.

[널...보내지 않는 다면...은조..]

은조는 충격으로 머리가 하얗게 쉬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녀의 무방비 상태를 이용하여 그녀를 안아들고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버둥거리며
그를 쳤다.

[이러지..말아요..제발...제발...난...더 이상...당신과...이럴 수 없어...이러지 말아요..제발...]

그녀는 울며 그에게 사정하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자신이
그녀를 원하기에...어떠한 방법으로든..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흐느끼며 그의 어깨를 밀치며 반항했지만 그의 완력 앞에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운을 옆으로 치우며 아까 와는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안았다.
철저하게...자신의 여자로 만드는 동작으로 그는 그녀를 탐하고 있었다.

[누구도...널 안지 못할 거다...은조...넌...내 여자니까.....누구에게도...주지 않아...]

그의 거친 손길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는 입술로 유두를 건드리자 그녀는 온몸을 떨며
그에게 거부했다.

[하지 말아요...제발...싫어요....]

그는 그녀의 싫다는 말이...그 말이 자신을 향한 거부 같아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여린 목줄기에 입술을 대고는 상체기가 생길 정도의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흐느낌...그리고 거부...그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다물린 입술을 벌리며 아까 자신이 만든 상처를 다시 한번 짓이겨 그녀를 더한
아픔으로 밀어 넣었지만...자신을 상처 입힌 그녀가 미워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녀의 보드라운 육체는 자신만이 아는 것 이였다.

[넌...보내지 않아...이제...다른 사람의 일 따위는 신경 쓰지..않아...보내지 않아...]

그는 신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몸을 뉘였다.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그를 밀치고 울부짖었지만..그는 아랑곳없이 그녀의 속으로 파고들었
다.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에 떨리며 대기 중에 사라져 버렸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말을 잃은 그녀는 더 이상 그가 하는 행동에 아무런 제지를 할 수 없었
다. 그는 자신의 품안에 늘어진 그녀를 처절할 정도로 탐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런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도 더 이상 그녀를 이렇게 탐하는 것에 대해 이유를 달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기에...너무나..원하기에..

그녀는 멍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침나절 그는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보내달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는 자신의 완력으로 그녀를 탐하고 유린했다.
누구도..그녀가 말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던 반은..그런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날..그렇게 대려오지 않았다면..이토록 상냥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를 앗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창을 보고 있었다.
이곳에 온지 일주일...그는 그녀를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의 집안 사람들도 그녀의 실종에 궁금해 할 것이다...
반은 헛기침을 하여 그녀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했지만..그녀는 그를 보지도 않았다.

[은조..뭐를 먹어야 해요. 회장님이 오시면...당신에게 다시 억지로 먹일 거예요.]

은조는 회장이라는 말에 심하게 몸을 떨었다.
반은 그런 그녀가 너무나 애처로워서 보고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날..죽였어..이제...그는 나에게 앗아갈 것이 없을...정도로...날...무너트렸다....난....왜..이
곳에 있지? 왜?>

그녀는 자신에게 자문하며 흐느꼈다.

[은조..]

[나 좀...보내줘요....제발...그의 앞에...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깨요...그러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반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회장님...]

[그녀는.]

성마른 목소리...회장답지 않았다.

[지금 거실에 있습니다...회장님...이제는 보내주십시오...]

그는 반의 말에 인상을 섰다.

[그녀는 인형이 아닙니다. 회장님...우선은 가족들에게 그녀가 여기 있다는 정도는 알 수 있
도록 해야 합니다...회장님...그녀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십시오..]

그는 반의 말을 무시하고 거실로 들어섰다.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애처럽게 잠든 그녀를 보고 있으니 마음속에
싸한 바람이 불었다.
잡아 둘 수 있는 존재였으면...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작은 손을 쥐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은조....]

그는 웅얼거리며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보내...줘요....제발...]

그는 잠결에 흐느끼는 그녀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화가 나는 동시에 그녀에 대한 갈망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는 은조의 눈물 자국을 따라 입술을 옮겼다. 갈망...자신이 망쳐 놓고 유린한 여자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갈망에 그는 그녀를 다시 안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고 그녀의 작은 가슴을 손에 쥐고는 그 따듯함을 음
미하듯이 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잠든 얼굴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겁에 질린 눈이 활짝 열렸다.

[하...하지 말아요....]

그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내리 덮인 순수한 두려움...그를 향한 두려움....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소리 같았다.
엘라우드는 눈을 내리 떴다. 그리고는 그녀를 안아 들고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녀의 흐느낌이 온몸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울지마...운다고 널 보낼 거로 착각하지마.]

그녀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엘라우드는 그녀를 침대 위로 올리고는 그녀의 찢어 져서 부어 버린 입술에 다시 키스를 퍼
부었다. 그녀의 억눌린 신음 소리를 들으며 마치 못할 짓을 하고 있는 아이 같은 기분이 들
었지만 그녀가 피워둔 욕망의 감정 앞에 양심은 허무하게 무너질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셔츠를 사로잡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셔츠를 풀어 내리고 그녀
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이 당장 뻣뻣하게 굳어졌지만 그의 힘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제발...하지 말아요.....나....석현씨와 헤어질 거예요..그러니까..이러지 말아요...제발...]

그녀는 흐느끼며 그에게 다시 한번 애원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욕망은 오히려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대리고 멀리 떠나 버리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자신의 셔츠를 풀어버리고 그녀의 살갗을 미친 듯이 자신의 맨 가슴에 품고 있었
다.

[이건...그런 일과 상관없어....]

그는 그녀의 바지 단추를 끌어내며 낮게 헐떡이며 말했다. 그녀는 몸서리치며 그의 손을 붙
잡았다. 그녀는 울먹이며 그런 제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그런 저항이 그에게 안 통하리
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를 안아 올려 바지를 벗기기 편하게 하고는 단숨에 벗겨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도 단숨에 벗어 버렸다.

[하지...말아요...엘라우드...부탁이에요...제발...]

그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그녀 속으로 빠르게 파고 들어갔다. 그녀의 몸에 이는 아픔의
전율에 자신이 느끼는 욕망이 사그러들 일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입술에 더욱 애절하게 입술을 부볐다.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른 체 자신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널....안지 않고는...잠들 수 없어....널 원해...널....]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결코 그녀에게 만족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더한 허기만 느낄 뿐..
그는 그녀의 몸을 누르며 그녀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나에게 애원하란 말이야...더 이상 네 마음속에 그가 없다고....나에게...날 바란다고...말하란
말이야...]

그는 그녀의 귀에다가 거칠게 명령했다.

[아...아니야....]

그녀는 울부짖으며 그에게 말했다. 목이 뒤로 꺾이며 그녀가 아픔에 찬 오열을 토했다.

[날 원한다고 해...그러면 아프지 않게 하겠어...날...원한다고 하란 말이야.]

그가 더욱 그녀에게 거칠게 파고들며 다그쳤 지만 그녀는 흐느끼며 도리질 칠뿐...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그녀에게 깊이 파고들 때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은
후였다.

처절함....
그는 자신의 품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녀를 보았다.
그토록 여러 번 그녀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였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그를 거부했다.
이토록 누군가를 가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노바가 병원에서 우울증에 시달리며 아무와도
대화를 하지 않는 것도...
은조의 작은아버님이 그녀를 찾아 뉴욕에 온 것도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단지...은조가 너무나 탐이 났다. 그녀를 옆에 두고 싶었다.
더 이상 그녀를 강제로 안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겁탈했기에 그녀는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걸까...
엘라우드는 자신이 비참해지는걸 느꼈다. 천하의 엘라우드가 자그마한 동양 여자에게 이토
록 조바심을 내다니....
그는 씁쓸하게 생각하며 날로 여위어 가는 그녀를 보았다. 더 이상 거부도...아무 말도 없는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그의 옆에 있을 뿐이었다.
그가 안을 때마다 거부하다가 기절해 버리는 그녀를 잡아 두는 자신이 어리석은 건지도 몰
랐다.
석현을 사랑 할 때의 그 다정한 미소가 자신에게 향하길 바란 그가 잘못이었다.
그녀가 석현과 헤어지면....그는 그녀를 가지고 싶었을까....
어쩌면 자신이 너무 원하기에 더욱 강제로 그녀를 탐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다정한 미소를 보이는 대상이 자기이길 꿈꾸던 그 많은 시간 동안...
그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이 차 버린 것이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서 영원히 미소를 지워 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내려오며 몸을 굴려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자 마음 한 켠에 건조한 폭풍이 일었다.
그는 그녀의 뺨에 흐른 눈물을 지워 주었다.
그녀를 가지면 뭘 할까...어차피 그의 곁에서 살아갈 여자가 아닌데...노바를 생각해야 했다...
노바와 죽어 버린 자신의 조카를....

그는 서재에 우두커니 서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반..보고 있지...]

반은 천천히 그의 앞에 섰다.

[그녀를 대려다 줘...그리고 전해...두 번 다시 날 만나지 말라고...]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빼 들었다.
그리고는 반에게 쥐어 주었다.

[위로금이라고 해. 그러면 알아들을 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는 무너지듯이 문에 기대었다.

<나에게...당신이 너무 과분한가...은조...>

은조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반의 뒤를 따라나갔다. 비록 반이 그녀를 부축해 주었지만...
그는 커튼 뒤에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자신이 더럽히고 상처 입힌 여자가 떠나는 모습을...
그는 커튼을 꽉 쥐며 그녀에게 눈을 때지 않았다.
그녀는 한번도 그가 서 있는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더 이상 표정도 없는 그녀가 차에 올라
타며 흠칫한 표정으로 그가 서 있는 창을 보고는 놀란 듯이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그의 곁에서 떠났다.

-12-

차가 멈추자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차에서 내렷다.

[따라 내릴 필요 없어요....]

반은 멈칫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교회를 한 동안 보고 서 있었다.

[은조....이..돈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이미 죽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다시 마음이 잘려 나가는 기
분이었다.

[필요...없어요...그에게...걱정...말라고 해요...나....석현씨와...헤어질 거니까...]

그녀는 말을 흐리며 천천히 계단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반은 그런 그녀를 아픈 마음으로 보며 그녀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차를
출발 시켰다.
은조는 차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계단 위에 주저앉아 버렸다.
속절없는 눈물이 차 올라 그녀의 볼 위로 차갑게 흘러내렸다.

<어째서...석현씨...날...이렇게 속인 거죠......어떻게.....하지만...무엇보다..서러운 건....나 자신에
대한 환상이에요...난...넘보면...안될...위험에 걸어 들어간 거야.....난....>

그녀의 흔들리던 모습은 천천히 바닥 위로 쓰러 지고 있었다. 작은어머니의 날카로운 비명
이 그녀의 귀를 지나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이대로...땅이 나를 삼켜 버렸으면...그러면...모두가...꿈일 수 있을까...>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걱정으로 가득한 작은아버지를 보았다.

[정신이 드니...은조야?]

그녀는 눈물이 차 올라오는 눈을 꼭 감았다.

[은조야...]

[죄송해요...잠시만...혼자 있고 싶어요....죄송..해...]

그녀는 억지로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작은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고는 방을 나갔다.
그녀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참았다.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엘라우드와...그리고 노바와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몸을 굴려 자신의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이대로 죽고 싶은 마음...
그에게 몸을 더럽히고...그것도 모자라 마음마저 더럽혀졌다.
창녀처럼 그에게 안겨야 했던 지난 일주일의 시간 동안 그녀는 죽어 버리고 껍질만 남았다.
그녀는 불현듯이 일어나 욕실로 가서 뜨거운 물을 받아 씻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러 그녀의
볼을 적셨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그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고 싶었다. 빨아서 깨끗해질 수 있는 물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
고 생각하며 그녀는 자신의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빡빡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에
게 묻어 나는 그의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단단한 그의 가슴에 안긴 기분이라던가 그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던 느낌은 그녀를 소름끼치게 했다.

[아니야...난...난...]

그녀는 도리질을 하며 흐느꼈다.
이건 자신의 몫이었다. 그를 지우던...아니면 그 기억에 수치스러워 하던....

일주일의 시간은 덧없이 잘도 지나갔다.
그녀는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었지만 밤의 장막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졌다.
악몽처럼 다가오는 그의 기억에서 편할 날이 없었다. 잠시라도 잠이 들면 그의 꿈에 시달려
야 했고 그런 그녀의 비명 소리는 가족들을 깨우기에는 그저 그만의 것이었다.
작은아버지는 모두가 자신의 잘못이라며 하루종일 교회의 단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창틀에 기대어 앉아 자신의 주위를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끔...그녀의 창밖에 차가 한 대 보였다. 차 주인은 항상 내리지 않고 그녀를 한동안 감시하
다가 사리지 곤했다.
그녀는 그 차가 보이면 놀란 토기처럼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집에
라도 뛰어 들어올 남자였다...
하지만..그는 그렇게 그녀의 집을 한동안 주시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감시당하는 기분....
하지만 요 며칠 그의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석현과 다시 만날 까봐...그래서...찾아오
는 걸까...
그녀는 만약 석현과 다시 만난 다면 그가 어떻게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싸늘한 오한이 지나갔다.
두 번 다시 그의 침대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을 꼭 쥐며 눈을 감았다. 작은
아버지의 짐도...석현의 짐도...그의 감시도 더 이상 그녀는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고는 한동안 벽을 보았다.

[난...여기를 떠나야해...그래...그래야 해...]

엘라우드는 비행기에 오르며 찌푸린 얼굴을 풀었다. 기자들이 쫓아다니는 생활 중에 보스턴
에 그가 너무 자주 방문하자 냄새맡은 개처럼 그를 따라붙는 기자가 있었고 그는 그런 자신
의 행동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은조.....창 틈으로 언뜻언뜻 비치던 그녀의 모습...
그는 머리를 쥐었다.

[회장님..]

[아니야 상관마.]

그는 경호원들을 물리치며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비행기 안에는 그를 기다리
는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그가 바라는 여자는 하나뿐이었고 그 여자는 동생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준 여자였다.
그는 은조의 이름이 나오면 울부짖고 괴로워하던 노바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파졌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 은조를 가까이 하다가 동생에게 더한 상처를 줄 뻔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동생을 무시하다니...
그는 쓰게 웃었다. 잊어야할 여자...더 이상 상관하지 말자고....

병실 밖으로 노바의 목소리가 울려나오자 은조는 주춤거리며 멈추어 섰다.
울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그리고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도망가고픈 마음을 누르며 은조는
가만히 그들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정말 할 말이 없어.]

[이렇게 이별하면 다잖아요. 가세요..로리...당신의 아내에게...]

[노바..제발...난...]

그녀는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어 먼저 노크했다.
병실 문이 열리며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오다 멈칫했다. 그의 두 눈은 붉게 충
혈 되어 있었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더니 옆으로 비켜 지나갔다.
은조는 숨을 고르고는 주먹을 꼭 쥔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노바는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조심스럽게 서있는 여자를 보았다.
너무나도 슬퍼 보이는 눈을 한 은조가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노바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
랐다. 자신을 비웃으러 온 걸까...
아니면...

[당신을...보고 가야할 것 같아서요....]

은조는 껄꺼로운 듯 이야기하고는 쓸쓸하게 웃었다.

[노바....난...나요...당신에게...너무나...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뭐가...

[당신이 마음 고생 한건...누구보다 잘 알아요...만약...먼저 알았다면..나...석현씨와 그냥 이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노바는 얼굴을 휙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난...]

[뭘...안다는 거에요...뭘...]

노바의 목소리가 탁하게 흘러 나왔다.
은조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억지로 웃으며 얼굴을 들어 노바를 보았다.

[나...떠나요....한국으로 돌아가요...이곳은...나에게 어울리지 않아요.....그에게도 난 어울리지
않아요....노바...석현을 만나면...이야기해요....그리고...당신의 오빠에게도 말하세요...더 이상 걱
정할일 없을 거라고....미안해요 내가..당신을 아프게 해서...나..갈 깨요...]

노바는 영문을 몰라하며 은조를 보았다. 은조는 뭔가 틀려 보였다.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도..
그리고 슬픈 목소리도...모두 노바가 아는 은조가 아니었다.

[은조...기다려요....뭘...어떻게...]

은조는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문으로 향했다.

[미안해요...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서....자살은....안 좋은 결론이에요..노바...당신이 빨
리 건강해 지길 빌어요...]

그녀가....자살하려던걸 누구나 아는 걸까...그런 걸까...

[당신이...뭘 알아...내가 그런 일을 결심했던 마음을...당신은 사랑만 받아서 모를 거야...]

노바는 눈을 꼭 감으며 그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은조는 그런 노바의 떨리는 손을 보고는
눈물을 닦으며 방을 나왔다. 은조는 문에 기대 노바가 흐느끼며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다.
엘라우드가..그렇게 자신을 다룬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그렇다고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떠나다니....은조야 그럴 필요는...]

은조는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한국에 가고 싶어요...엄마도 아빠도 보고 싶구요....학교는 휴학했으니...다음에 돌아올 깨
요....우선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작은아버지는 한동안 은조를 보았다.

[그렇게 하렴...네가 원한다면....]

은조는 발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번 주 말에 떠날 계획이었다. 한국에 가면 모든게 바로 돌아올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가만히 옷 가방을 들추다 창사 기념 파티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꺼내어 침대 위에 놓
았다. 눈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직도 그가 즐겨 쓰는 향수의 내음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 듯한 착각....
그렇게 쓸쓸하게 보이던 그가...그렇게 외로워 보이던 그가....
자신을 이런 지옥의 나락으로 몰아 넣을지는 몰랐다.
그녀는 드레스에 얼굴을 묻고는 흐느꼈다.

<왜...엘라우드.....왜...날..이렇게 힘들게 한 건가요...왜...>

반은 그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 이곳 호텔 일을 마지막으로 뉴욕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동
안 회장은 거의 괴물 수준으로 일에 매달렸다. 대리고 온 여자는 시들해진 건지..
첫날밤에 호된 욕지거리와 함께 방에서 쫓아 버리고는 뜬눈으로 일에만 매달렸다.
3일 밤을 꼬박 새우고는 겨우 잠든 지금 시간은 새벽4시였다.
반은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그를 침대에 뉘여 주며 들은 이름은...그 자신이 그토록
말하기 꺼려하는 여자의 이름이었다.
반은 엘라우드의 가녀린 한숨을 타고 나온 이름에 자신도 모르게 경직되었다.
회장은 모르는 것일까...자신이 정말 바라는 상대를...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일까...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며..잊으려고 하는 대상은 오히려 더욱더 그를 감아쥐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반은 그를 한 동안 보고는 그의 머리카락을 풀어 주었다.

[은...조...]

엘라우드의 까칠한 목소리....
반은 한동안 엘라우드의 곁에 머물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전화기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마음이 가라앉았다...그를 놔주어야 한다...
은조는 전화기를 들고 조용히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연결 음이 들리고...
한동안 신호음이 들렸다.

[[네.]]

은조는 차마 입을 땔 수 없었다.

[[은조? 은조지!]]

은조는 석현의 다급한 목소리에 드디어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응...석현씨..나야...]

[[은조야 어째서 전화를 안 받은 거니..난 걱정이 되어서...]]

[석현씨! 나...할말이 있어...나중에..이유는 물어도 되는 거잖아..]

석현은 말을 잃은 듯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석현씨...나...여길 떠나.]

[[오는 거야 은조?]]

[아니. 나...다른 곳으로가.]

한동안 침묵...그리고 그의 침울한 목소리...

[[어디로...가는 건데...은조..]]

은조는 눈물이 감도는 눈을 깜박여 빨리 눈물을 지웠다.

[알 필요 없어 나 석현씨 만나 행복했어. 그런데 나 이제...석현씨 석현씨로 부터 자유..로와
지고 싶어......너무...이른 결정이었어....결혼.....그렇게 결정하는 게...아닌데...]

[[무슨 말이니 은조. 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은조는 눈을 꼭 감았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다....

[미안해 석현씨. 나 다른 남자가 생겼어. 그래서...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당신이 나에게 있으
면 생각할 수 없어...나중에 내가 후회할지 모르지만...지금 그 남자를 잡지 않으면 더 후회할
것 같아. 미안해 석현씨..]

속사포처럼 떠드는 자신의 목소리는 그녀를 통해 나온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은조....너...]]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제발...눈물이 터지지 않기를 바라며...

[[엘라우드 때문이니...그런 거니 은조...]]

은조는 입술을 악물었다.

[[이 바보야! 그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가 너에게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니? 아니야 은
조 아니라고! 그가 널 원한다고 생각해? 아니란 말이야 그는 널 이용할 뿐이야! 내 말 들
어!]]

은조는 마지막 말에 부들부들 떠는 자신을 느꼈다.

[끊어. 석현씨. 안녕. 행복해.]

그녀는 전화를 끊어 버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차라리 따지기라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당당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여권을 더듬었다.
떠날 시간 이였다. 가장 슬픈 기억으로 얼룩진 이곳에서...그리고 자신을 가장 아프게 한 이
곳에서...

-13-

반은 자신이 들은 내용을 엘라우드에게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중이였다.
그는 엘라우드의 가칠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능숙하게 구사하는 불어 속에 깃들은 신랄함
에 머리를 저었다. 또 프랑스 쪽에 일에 무슨 허점을 발견한 건지...이번에는 프랑스로 날아
가려고 준비중 이였다.
그는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 엘라우드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난 통화중 이야 반.]

반은 심각한 얼굴로 그를 한동안 보았다.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그의 얼굴에 당장에 표
정이 확 바뀌더니 서둘러 전화를 끊는 것이 보였다.

[무슨 문제지? 노바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반은 뜸을 들이며 다시 한번 생각에 빠졌다.

[말해. 답답하게 굴지 말고 노바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화부터 버럭 네는 그를 보며 반은 한숨을 쉬었다.

[노바님이 아니라 은조씨에 관한 일입니다.]

엘라우드의 얼굴은 순간 돌처럼 굳어졌다.

[죽으려고...작정이라도 한 건가...아니면...]

[아니요...이곳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군요.]

엘라우드는 입을 다물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전화기로 손을 뻗었
다.

[별일 아니군..]

[만약...별일이 아니라면...저도 보고 드리지 않습니다..]

엘라우드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반을 보았다.

[감시 붙여둔 잭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출국 전날..약국에 들려 뭔가를 샀다고 하는데...그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엘라우드의 얼굴에도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아마...짐작이 그것이라면....점원에게 확인해 보니...]

[당장....그녈 잡아와....모든 인원을 동원해서라도...내가 갈데 까지...어떠한 보상을 한다해도...
그녀가 타고 갈 한국 행 비행기를 잡아 놔...언제지...]

[오늘입니다.]

[공황에 연락해...잡아..]

엘라우드는 거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벌떡 일어서 방을 가로질렀다.
반은 급하게 연락을 하며 공황에 잭과 다른 인원을 풀었다. 잭의 말에 의하면 이미 그녀는
공항으로 떠났다고 했다.
잡아야 했다.

뉴욕 공항은 난데없는 난리를 치르고 있었다.
엘라우드는 빠른 걸음으로 청사 안을 가로질렀다. 그는 재빠르게 비행기안에 들어섰다. 하지
만 그가 찾는 여자는 없었다.
비행기 연착으로 인한 여러 사람들의 불평을 들으면서도 그는 그녀를 찾기 위해 혈안이었
다.

[공황에...오긴 한 건가...]

반은 황급히 연락책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분명히 공항에는 왔었다. 그렇다면....

[돈을 얼마를 들여도 좋아...찾아...비행기 탑승자 명단을 모조리 뒤져...그래서 찾아...찾아서
내게 데려와!]

엘라우드는 숨죽인 경호원들에게 이야기하고는 싸늘하게 비행기 안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찾고 있었다.

4개월 후..

망할 놈의 노인네....레베카는 투덜거리며 레인보우 브릿지를 건너고 있었다.
캐나다 국경을 지나는 이곳에 홀로 버려진 것에 그녀는 심통이 나서 투덜거리며 차들이 쌩
쌩 건너는 국경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그러다 막 미국 국경수비대를 통과한 순간 레베카는 어떤 여자가 다리 위에 위험하게 서 있
는 것을 보고는 뒤뚱거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약간 길게 기른 단발을 뒤로 동여맨 모양새 였으며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여자였다.

[이보우...아가씨....이렇게 위험한데..이곳에서 뭐하는 거유?]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르고 공허한 두 눈을 한 여자는 그렇게 흔들리며 레인보우 브
릿지의 난간 넘어로 보이는 나이아가라의 전경을 보듯이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이봐요...아가...이런!]

레베카는 쓰러지는 여자를 간신히 안을 수 있었다. 그 덕에 지나다니는 차들의 경적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지만 이렇게 파리하고 마른 여자가 쓰러지는 모습은 처음이라 레베카는 숨
을 헐떡였다.
너무나도 작게 숨을 쉬는 것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이런..무슨 일이야....]

레베카는 바짝 말라 버린 여자를 감싸안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파리한 두 볼과 약하게 내쉬는 호흡이 불안정 한 것이 아파도 단단히 아파 보이자 레베카는
지나던 차를 향해 마구 손을 내저었다.

여기는 어딜까....
늙은 흑인 여인이 자신에게 이야기 걸던 것이 기억났지만 도저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
었다.

[정신이 든 거요? 어쩌자구 그런 몸으로...]

그녀는 눈앞이 흐릿해지는걸 느끼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지 말구려...빈혈이 너무 심하다고 하니...어쩌자구 그렇게 된 거야? 병원이니 걱정은 말
어 ]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갈곳이 없어? 젊은 여자가 홀몸도 아니면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랬다...
그의 완벽한 복수는....그녀를 고향으로도 갈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지난 일을 회상했다.

4개월전.

그녀는 비행기 표를 가만히 만져보다 석현과의 전화 후의 생활을 기억했다. 너무 바빴다..너
무 정신이 없었다...
짐을 챙기며 느꼈던 기억들이 바래질 무렵...그녀는 자신이 다른 때와는 너무 틀리게 자주
피곤해 지는걸 느꼈다.
은조는 한숨을 쉬며 자신이 너무 큰일을 당해서 라고 생각하며 문득 달력을 보았다.
순간 어떠한 둔감한 것이 그녀를 천천히 내리누르며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왔다...
이럴 수는 없어...아니야.....
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며 달력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헤아려 보았지만...
어쩌면...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그는 건강한 남자였고...일주일 동안 한번도 그녀를 그냥 둔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피임 기구를 사용한 적도 없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자신이 여자라는 걸...그것도 아이를 낳을 수 있을 정도의 여자라는 걸...잊어 버릴
수가 있을까...
그가 자신을 감시한 이유는...이것일까...
은조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침대 모퉁이에 무너졌다.
눈에 눈물이 흘렀다.
원망...그리고...죽여야 할 생명...이대로 낳는 다면...그녀는 이곳에도 한국에도 갈 수가 없었
다.
그래...한국에 도착하는 즉시 수술을 받자...아니야 어쩌면 아닐 수도 있어...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쇼핑 스토어 내의 약국을 찾았다. 시약을 구입하며 그녀의 마음은
지옥을 거니는 듯 했지만...결과는 더 비참했다. 선명하게 들어 나는 두 줄기의 붉은 선....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낳아 서는 안될 아이...였다...

[내 이름은 레베카인데...그래 아가씨 이름은?]

그녀는 상념에서 깨어나며 천천히 눈을 뜨고 자신을 살려준 늙은 여자를 보았다.

[이름이 없어? 이런...고아인 건가...아니면...]

[...]

[음...너무 고민 말어...말을 잘못하는 거야?]

그녀는 이 흑인 여인이 가족을 찾아 준다고 할까 봐 입을 다물기로 했다.
레베카는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른 체 그녀를 가여운 동양인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이구.....영어를 못하는군...걱정마 아가씨. 난 혼자 살고 있어 집은 낡았지만 충분히 깨끗하
다우...아이도 낳아야 하고 하니 나랑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난 아이를 좋아하거
든.]

그녀는 레베카의 따뜻한 손이 자신을 잡자 자기도 모를 눈물이 흘렀다.
마치 어머니 품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에....
그렇게 그녀는 그곳에 안주하게 되었다.
엘라우드가 미친 듯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도 모른 체...

뉴욕

언제부턴가 눈에 띄게 날카롭고 신경질 적으로 변한 엘라우드는 동생인 그녀도 만나 주지
않고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
엘라우드의 딱딱한 얼굴은 4개월 전과 변화가 없었다. 단지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피곤해
보일 뿐...
노바는 오빠의 이런 변화와 사라진 은조...그리고 초췌한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온 석현을 생
각했다.
그녀가 유산했을 때 엘라우드는 누구의 아이인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그는 그녀에게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집을 내어 주었다.
뭔가 어귀가 틀려 버린 기분...
노바는 불안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뭔가...잘못이 일어나긴 한 것 같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회장님은 지금 몹시 바쁘신대요.]

노바는 반의 정떨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웃으려고 노력했다.

[들어와 어차피 들어온 것...]

엘라우드는 그녀에게 성의 없이 말하고는 뭔가를 뚫어 저라 보고 있었다.

[오빠...요즘 어떻게 지네...회사 아니면 볼 수가 없어서...]

엘라우드는 안경을 내리며 그녀를 보았다.

[뭐...궁금한 것 있니 노바?]

뭔가 불만스러운 어투...

[아니...뭔가 잘못 된 것 같아서....]

엘라우드는 노바를 눈을 가늘게 뜨고 한동안 보았다.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리 떴다.

[잘못된 것 없어. 나가도 좋아 일이 많이 밀려서...]

노바는 냉랭한 그의 거부에 밀려 나와야 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은조...오빠...그리고 석현....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는 나가는 노바를 보며 석연치 않은 뭔가를 물어 보지 못하는 자신을 느꼈다.
아직도 찾을 수 없는 은조...
4개월간...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날 떠난 비행자 명단 중에 은조 아니면 동양인 모두의
명단을 뽑아서 대질해 본 결과.
은조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일은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것은 배편...그리고 미국과 인접한 캐나다였다. 하지만 은조는 그곳을 가지
도 않았다. 한 마디로 그녀는 아직도 미국 내에 있었다.
친척이라고는 보스턴에 있는 작은아버지 한사람...
아는 곳이라고는 보스턴과 뉴욕뿐인...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아는 여자가 이렇게 연기처럼 사
라져 버렸다는 것에 그는 조급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거기다 작은아버지 내외는 모르는 것 같은 일로 중간에 그녀가 부모님과 작은아버지에게 어
떤 거짓을 말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를 찾기는 마치 건초 더미 위에 떨어진 금발
머리카락을 찾는 것이었다.
찾아야 했다...돈도 없고...아는 사람도 없는 이 큰 땅덩이에서...은조가 어떤 어려움에 빠져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정기적으로 누군가와 연락이라도 한다면...
보스턴에 붙여둔 탐정에게서 연락이라도 온다면...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자신의 경솔함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널 뭐라 부르면 좋을까....음...사실 내게는 딸이 있었단다...입양한 딸이었지...
그 아이가...차 사고로 죽고 난 후...난 그 아이를 잊지 못했어....그러니..널 엔젤 이라고 부르
면 좋을 것 같구나...그 아이 이름이야.]

그녀는 레베카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엔젤....
입양아 였던 레베카의 딸.....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그녀는 엔젤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14-

노바는 달리는 차안에서 골똘한 생각에 파묻혀 있었다.
오빠인 엘라우드의  의도적인 회피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거기다가 석현의 갑작 스런
사표는....
노바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퇴원한 후 나타난 여러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며 노바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찾아 왔던 은조...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녀...
거기다 오빠인 엘라우드의 이상한 행동...
석현의 갑작스러운 사표...
모두가 하나에 사건일 것 같은 생각...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모든 열쇠를 지고 있다는 느낌...
노바는 차를 주차시키고는 생각에 골몰하여 집으로 들어섰다.
응답전화를 가득 채운 페이퍼 수에 그녀는 당황하며 버튼을 누르자 가칠한 목소리의 석현이
그녀에게 연락을 바란다는 메시지가 등록되어 있었다.
무슨일 일까...은조를 좇아 한국에 간다고 들었는데...
노바는 얼른 전화기로 다가가 전화 버튼을 눌렀다.

[[네]]

[석현? 나 에요 노바 무슨 일이지요?]

석현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노바...은조는 여기에 없어...무엇이 잘못 된 걸까...]]

노바도 적잖게 당황했다. 고국으로 간다던 은조가 거기에 없다면 은조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은조에게 다른 남자가 생겨서 떠난다는 고백을 들었다는 석현의 말에 뭔가 이상
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 말은 그녀에게 충격으로 들려왔다.

[무...무슨 소리야 은조씨가 거기에 없다니...그럼..어디로 간 거란 말이야..]

[[찾을 수가...없어....노바...무슨 일이 있은 거지...은조가 엘라우드의 곁에도 없다면...무슨 일
이 일어난 거지....그녀는...]]

노바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자신을 병원으로 찾아 왔던 은조...
오빠에게 석현과 헤어져 한국으로 간다는 말을 전해달라던 은조...
어쩌면...그녀는 입을 막았다.
이 모든 일이 불길한 불꽃처럼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자신이 이 모든 일의 열쇠인지도 몰랐다..

[엘라우드!]

반은 그녀를 제지하며 엘라우드가 지금 몹시 취한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금 노바는 그런걸 따질 시기가 아니었다.

[엘라우드! 어디 있어! 나오란 말이야!]

노바의 고함소리가 거실을 지나 이층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시끄럽군...무슨 일이야.. 널 보고싶지 않아...이제는 너랑 같은 집에 살고 있지 않아.]

그녀는 엘라우드가 층계의 끝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랐다.
엘라우드는 반의 말대로 엉망이었다.
반쯤 풀어져 버린 셔츠와 술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몰골이 마치 악몽 속을 걸어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이제는 오빠의 이름을 마음대로 경망스럽게 부르는군...마음에 안 들어...]

그는 비틀거리며 계단 난간에 기대었고 반은 재빨리 그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노바는 엘라우드가 이렇게 취한 모습은 처음이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야기 좀 해...]

[난...할 이야기 없어...너나 해...]

그는 손을 저어 보이고는 뒤돌아 섰다.
그제야 반쯤 풀어진 셔츠의 한쪽 깃이 내려가며 다른 손에 쥔 술병을 감싸버리는 것이 보였
다.

[아직도...마시는 중이야?]

그는 피식 웃으며 노바를 돌아보았다.

[네가...나에게 다른 건...못하게 해도 이번에는 안될걸...노바...]

반은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지만 그는 반을 뿌리치고 위태한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
다.

[반...무슨 일이죠..난 오빠가 저러는 것 처음 봐요...말 좀 해봐요..뭐가 우리 오빠를...]

반은 입을 열지 않았다. 노바는 반을 노려보다 오빠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지럽게 널브
러진 서류들...그리고 그 서류 틈으로 너무너무 익숙한 여자의 모습이 클립으로 고정된 서류
가 보였다.
노바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그 서류를 주워 들고는 놀란 눈으로 엘라우드를 보았다.

[오빠는...알고 있었구나...은조가 사라진 것..]

갑자기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서류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상관 마라!]

엘라우드의 거칠한 목소리....노바는 순간 소름끼치는 뭔가를 느꼈다.

[오빠가...이런 것...은조와 상관 있지...그렇지....]

엘라우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반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노바는 단단히 잘못된 하나의 문제를 그가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 바보 스럽게 이러지마! 말해 오빠가 그녀를 숨긴 거지! 석현이 그렇게 미웠어! 석현
씨는 모든 걸 포기하고 은조만 찾아다니고 있어!]

[나가!]

[오빠가 그녀를 보낸 거야 그렇지!]

엘라우드의 핏발선 두 눈이 살기를 띄고 그녀를 보았다.

[나라고 보내고 싶었는 줄 알아? 할 수만..있다면...그렇게 하지도 않았어! 다 너 때문에 이렇
게 된걸 왜 모르지? 나라고...그녀..떠나보내고 싶었는 줄 알아? 내가..어떤 마음으로....나가..
꼴도 보기 싫어...나가....나 자신도 용서 못하고...너도 용서가 안되니...나가....꺼지라구!]

노바는 그의 악랄한 목소리에 너무나 당황하여 그를 올려 보았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엘라우드를 보았다.

[무...무슨 소리야...날..위해서라니...]

[네가 진작에 너와 아이에 관해 털어놓았다면...난 그런 방법은 쓰지 않았다는 소리야 그래
나에게 반항해 본 맛이 어떠니. 그래 덜컥 가지지 못할 남자의 아이를 가진 기분이! 이제
네 남자를 되찾게 되니...얼마나 좋을까..응? 나가 그러니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고 나가.]

마치 누군가 그녀의 복부를 강하게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노바는 비틀거리다 간신히 문에 기대어 섰다.

[나..때문이라니...아이가...무슨 상관이지...]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지? 난..당연히 복수 한 것 뿐이야 나가...더 이상 널 보는 것도 지옥
같은 일이야.]

엘라우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반에게 손짓을 했고 그녀는 처음으로 오빠인 엘라우드의 방에
서 쫓겨났다.

[돌아가십시오. 지금 회장님 제정신이 아닙니다. 벌서 며칠째 저러고 계십니다. 돌아가세요]

노바는 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숨긴 게...잘못...반항...]

그녀가 비틀거리자 반은 그녀를 억세게 잡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반에게 꼭 안겨 있었다.

석현이 왔다 는걸 알면서도 노바는 그를 피했다.
석현이 미친 듯이 은조를 찾고 있다는 것...그리고 그녀를 떠나 보낸 사람이 엘라우드 라는
것...
오빠가 오해한 사실을...오빠에게 진실을 말할 자신도 없었고...석현에게 진실을 말할 수도 없
었다.
철저한 방관자...
그녀는 모든 상황에서 발을 빼고 그저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여자를 보낸 남자라고는 하나 엘라우드가 은조를 찾고 있다는 건 뭔가 크게 잘못되
었다는 것이었다.
노바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디 있니 엔젤. 나왔다.]

은조는 피식 웃으며 레베카가 온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온지 벌써 2달째인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임신7개월에서 8개월로 넘어가는 기간이었다.
레베카는 웃는 낯으로 그녀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글쎄 너 말 좀 배우게 하라고 그 줄리 할망구가 이걸 주지 뭐니 자기 손주 것이라나.]

그녀는 레베카가 내민 <어린이 친구 반디>의 표지를 보았다. 분홍색 공룡이 웃고있는 표지
를 한동안 보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서글픈 표정이 되었다.

//[은조 이것보고 영어를 배워봐 지금도 좋지만 발음을 고치는 것에는 유아프로그램이 최고
야.]

[뭔데요?]

그녀는 포장지를 얼른 뜯었다. 체셔 고양이와 엘리스가 그려진 표지....이상한 나라의 엘리
스...

[웅?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넌 마치 엘리스 같아 귀여워. 엉뚱하기도 하고 안 그래 은조?]//

그녀는 석현의 다정하던 미소를 생각하며 가슴구석에 아픔이 파문처럼 번지는걸 느꼈다.

<석현씨...정말,,,그렇게 되어 버렸어...이상한 나라에 떨어져 버렸어...교만함을 사랑이라 착각
해서...그...토끼에게 완전히 빠져버려..바보가 되었어...아니..그는 토끼가 아니야...위험 천만
한...한 마리...표범이었어....난...지금...이상한 나라의 가장 변두리에 떨어져 버린 것 같아...>

당황한 레베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독여 주었다.
작은집 구석에는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은조에게 나누어준 아기 용품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있었다.

[이구...임신 때문에 예민하구나...잊으렴...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잊어..]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레베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고마워요...레베카....]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엄마 될 사람이 마음을 차분히 가져야 하는 거야. 이제 2달 뒤면 아이가 태어날 건데...엄마
가 울면 울보 아이를 낳는 단다. 알겠지 엔젤?]

그녀는 다시 웃어 보였다.
초라한 집에는 두 명의 여자가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웃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둔 겨울날 이였다.

[편지가...왔다고?]

반은 그녀의 집 우편을 훔친 것에 마음이 켕겼지만 그것을 엘라우드에게 전해 주었다.

[디트로이트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간략한 글입니다.]

그는 짧지만 간단한 글을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 이건 한국어였다.

[동료에게 수소문하여 한국사람에게 부탁해서 읽은 것입니다. 그런데...발신인 주소는 없고
단지 소인 뿐이라..]

[사람 보내...그래서 소인이 찍힌 우체국부터 그 근방을 모두 뒤져...찾아...일주일 안에 일이
끝나면 내가 직접 간다.]

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는...]

[그 집으로 보내지 마...아직도 그녀가 사라진걸 모르는 사람들이니...석현의 동향은?]

[그는 지금 뉴욕과 보스턴의 그녀 친구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 중입니다.]

[손은..써놨겠지?]

[내. 모든건 지시대로...그에게 거짓 정보가 들어가게 했습니다.]

[잘했군.]

그는 책상에 기대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그리고..]

[뭐지?]

반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

[노바님이 그녀를 찾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엘라우드는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쳤다. 심기가 불편할 때 나오는 평소의 습관을 보자 그가
노바의 일도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노바는 적당히 따돌려. 그리고...병원이란 병원은 다 알아봐. 분명... 다니는 병원이 있을 꺼
야.]

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하신 대로하겠습니다.]

그는 반이 물러나는걸 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어떻게 변해 있을까...
이제...8달째인가....
그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찾아야 한다...그녀를 보호해주고. 자신의 곁에 둘 것이다.
노바도 이제는 그를 제지 할 수 없었다.
이제서야 찾은 핑계거리를 그는 절 때 놓치지 않을 것이니까.

-15-

그녀는 차가운 손을 호호 불며 레베카가 씌워준 모자를 푹 눌렀다.
차가운 길 여기저기 빙판이라 조심해야 했고 늙은 레베카가 일하는 곳까지의 거리를 그녀는
미끄러지는 것 반, 기는 것 반으로 간신히 내려가고 있었다.
요즘은 틈틈이 레베카를 도와 식당에서 잡일을 도우고 있었다.
레베카는 넉넉한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마음씨 좋은 흑인 여자는 그녀를 충분히 보살펴 주고 있었다.
은조는 기꺼이 자신의 통장을 열어 레베카에게 주었지만 레베카는 한사코 받지 않았다.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베카에게 줄 따스한 외투를 사고 싶었다.
은조는 떠나온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그리고 이 아이가 고맙게 느껴졌다.
은조는 빙긋이 웃으며 볼품없는 외투로 감싸 인 자신의 배에 손을 댔다.
이제 다른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수술을 생각하고 병원에 간 아침...
그날 처음으로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비록 자신이 정상적인 경험에 의한 임신은 아니지만 하나의 생명을 처참하게 죽이려 한다는
것에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에 한국 행 비행기를 포기하고 환불을 받았다.
그리고는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헤매 다니다가 디트로이트로 오게 되었다.

[이구 엔젤 추운데...집에서 쉬지 않고..]

그녀는 방긋이 웃으며 레베카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천천히 레베카와 대화를 하기 시작
했고 그런 그녀를 레베카 또한 몹시 아껴 주었다.

[집에 있으면 난방 비 많이 나와요. 이곳이 훨씬 따스한 걸요.]

레베카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언제가 병원 가는 날이야?]

그녀는 레베카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음주요. 크리스마스 전에 가요. ]

[그래...크리스마스...너무너무 좋은 날이지. 우리 그날 특식을 먹을까?]

은조는 킥킥거렸다. 레베카의 특식이란 닭고기 요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거지를 하기 위해 소매를 걷었다.

[이구...고운 손이 망가지네...뭐 하러 이런 일을 해...]

은조는 피식 웃으며 수도꼭지에 물을 틀었다. 레베카는 그런 그녀를 보고는 머리를 저으며
저만치 멀어졌다.

[어머?...이상한 남자네...]

[무슨 일이야? 케리 아침부터 이상한 남자만 만나다니...]

케리는 이 근처에서 일하는 창녀였다. 그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글세 이상한 남자들이 이곳을 정찰하고 다녀요. 병원이 어디냐. 뭐...사고나 다친 사람은 없
냐등...뭐...자기들이 탐정인줄 착각하나?]

케리는 짧은 스커트 자락을 만지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한 명은 정말 잘생겼 더라구요. 그 밝은 금발에 파란 눈하며...그런 미남은 또 처음이
었어요. 그런데...분위기가 무시무시해.]

레베카는 손을 저었다.

[하여튼 미남 좋아하기는....엔젤, 엔젤 이제 그만하고 가자구. 너무 늦으면 길이 위험해!]

[네 아줌마. 안녕 케리.]

[안녕 엔젤. 어머 아이 낳을 때 다되어 가는구나. 하여튼 몸조심해.]

[네. 고마워요.]

그녀는 낡은 외투와 모자를 챙겨 머리카락이 한 올도 안 빠지게 꼭꼭 찔러 넣었다.
레베카는 그녀의 어깨에 숄을 덧대 주었다.

[호호호 영락없이 10대 같다니까. 누가 임산부로 보겠어? 안 그래?]

케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동조해 주었다. 은조는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이 병원에 말씀하신 여자분과 비슷한 환자가 있지만...이름이 틀리군요.]

반은 장갑을 벗으며 서류를 보았다.
엔젤 린퍼드....
그는 이름만 나온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엔젤...엔젤...
어쩌면...여태 찾지 못한 것이..그녀가 이름을 바꾼 것 아닐까....
그렇다면...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말인가?
반은 천천히 전화기를 들어올려 탐정에게 주소를 불러주었다. 조용히 이 주소를 감시하고
사진을 가지고 오라는 말도...
만약...그녀가 다른 남자의 성을 가지기 위해 결혼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엘라우드는 아마 결혼할 남자를 죽이라고 할지도 몰랐다.
반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아주머니...전 여기 시민권이 없는데...어떻게 병원에 갈 수가 있었죠?]

[호호호 내 딸의 시민권이 있으니까...위조는 저기 저 매튜 할아범의 소시적 전공이거든.]

매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위조...
그래서 자신이 그런 치료와 정기 검진이 가능한 거였구나...
은조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웃어주었다.

[감사해요 매튜 아저씨..]

[험...나야..레베카 할망구의 말은 어길 수가 없어서 말이지...]

매튜의 수줍은 고백에 그녀는 킥하고 웃었다. 창가에 세워둔 크리스마스 트리의 꼬마 전구
가 반짝이며 꺼졌다 켜졌다 했다.
그녀는 행복함을 느꼈다. 고마운 사람을 만나...고마운 일을 경험하는 지금은 아무런...누구에
관해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널 찾고 있었어..]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그가...

[엘.....엘라우...드...]

그녀는 목 졸린 소리로 간신히 이야기했다. 도망가야 하는 걸음이 땅에 박혀 버린 듯이 꼼
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무서운 두 눈....
그녀는 도망치고 싶었다.

[은조. 왜...그는 위험한 남자야. 은조!]

이번에는 석현의 목소리...그녀는 도리질을 했다. 그사이 억샌 손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쥐
었다.

[도망 못 가...놓아주지 않아....아이는 내가 대려 갈 거야. 알았어.]

그녀는 손을 버둥거렸다. 그의 몸이 자신을 눌렀다. 도망가야 했다..//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눈을 뜨고 보니 좁은 방안에 알록달록한 방의
벽지가 눈에 띄었다. 꿈....꿈이었구나...
그녀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며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왜...이런 꿈을 꾼 것일까...
은조는 침대에서 내려서며 후들거리는 몸을 웅크렸다.
요즘 들어 뜸하게 그의 꿈을 꾸곤 하지만...이토록 생생한 꿈은 처음이라 그녀는 한동안 떨
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바보...이제는 잊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반은 공항에 서서 그를 기다리며 쓰게 웃었다. 레베카라는 여자에 대한 조사도 모두 끝났다.
그리고 은조가 어디 있는 지도...
그는 멀리 보이는 엘라우드를 보고는 자세를 고쳐서 섰다. 기자들이 무슨 난리라도 난 것처
럼 그의 주위에 벌 때처럼 몰려 섰다.
엘라우드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리고 신경질 스러운 반응이 보였다. 곳 경호원들이 막아서서
이쪽으로 바로 다가왔다.

[어째 된 건가.]

[찾았습니다. 확인도 끝났구요.]

엘라우드는 조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눈치챈 흔적은 없지?]

[내. ]

엘라우드는 반이 열어 주는 차에 올라타며 사납게 서류를 넘겼다.
그리고는 흑인 여자와 그녀의 사진을 보았다.

[이...여자는 뭐지?]

[그녀를 보살펴 주고 있는 여자입니다. 아무래도 위조로 그녀를 병원에 대리고 다닌 듯 하
더군요..]

[방해될 여자면 알아서 해결해.]

엘라우드는 그에게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방해될 여자는 아닌 듯 합니다. 주위 사람들에 따르면 죽으려고 한 그녀를 살려낸 장본인
인 것 같습니다.]

엘라우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으려고...했다..]

반은 입을 다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는 유리창 넘어 잭을 보며 인터폰을 켰다.

[식당으로...그녀를 찾아야 하니까.]

식당 안은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케리는 처음 보는 아주 부자인 듯이 보이는 남자를 얼어 버린 눈으로 보았다.
며칠 전 본 금발 머리 남자의 경호로 들어선 그는 다짜고짜 엔젤을 찾고 있었다.
그의 눈은 선글라스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잔인해 보이는 입매나 그의 행동은 권력이 보
였다.
케리는 당황한 제인 아주머니를 뒤따라가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엔젤은 여기 없어요. 무슨 일이죠?]

금발 머리 남자가 그녀를 한번 돌아보았다.

[어디 갔습니까.]

[먼저...누구 신지 말하세요. 모르는 사람에게 가족을 말할 수는 없어요.]

[가족?]

마치 성질을 긁는 것 같은 목소리...그 긴 머리의 남자의 입에서 처음들은 말소리 였다.

[회장님..]

반은 조용히 이야기하고는 케리를 향해 돌아섰다.

[그 분은 실종되신 분이 십니다. 우린 그간 그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케리는 미심쩍은 듯이 그들을 보았다. 엘라우드는 그런 케리가 답답한 듯이 입술을 앙다물
고는 간신히 입 밖으로 말을 밀어냈다.

[그녀는...내 여자요. 그리고...난 그녀의 ...]

[아이...아빠인가요?]

엘라우드의 표정이 묘해 졌다.

[그렇소...]

케리는 알겠다는 듯이 그를 아래위로 보았다.

[버린 건가요?]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

반은 당장에 그녀의 말에 주의를 주었다.
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엘라우드를 다시 보았다.

[오늘 병원에 정기 검진 갔어요. 그러니 없는 건 당연하죠.]

엘라우드는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반. 병원으로.]

그리고는 그곳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그래...어디서...본적..있어...저 남자....]

문 뒤에 숨은 것처럼 서있던 제인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하자 겨우 정신을 차린 케
리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지폐를 눈이 휘둥그래져 보았다.
백 달러 짜리 지폐 뭉치....

[저...저 남자...뭐야....]

케리는 너무 놀라 웅얼거렸다.

[저...저 사람...엘라우드 레귀자모 인 것 같아...]

케리는 놀라 제인을 보았다.

[오늘....디트로이트에 온다는 말을 들었어....기사도 나고...아마 그가 이곳 공장을 폐쇄할지도
모른다고....]

케리는 놀란 눈으로 다시 엘라우드가 나간 쪽을 보았다.
설마...그런 남자가 엔젤을 찾고 있다니....

엘라우드는 내리기 시작하는 눈길을 미끄러지는 차 위에 애매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한때 자신에게 어쩔 수 없이 버림받았던 여자...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아픈 기억으로 그를 하루하루 지옥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여자...
아이...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
그녀가..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혹시 아이가 안 좋은 건가....
그는 주먹으로 차 시트를 내리쳤다. 반은 불안한 눈으로 그런 엘라우드를 보았다.
차는 병원을 향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16-

[아이를 낳을 시기가 되면 불안하고 가 진통을 느끼기도 하지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초
산이고 하니 그런 거니까.]

그녀는 의사가 보여주는 신기한 영상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입에 물려 있었다.

[아이가...손가락을..빨고 있어요...신기해라..]

의사는 싱긋이 웃어 보이며 다른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손가락 발가락 정상이고요...아이는 손가락만 빠는 게 아니에요 엔젤 하품도 하고 놀기도
하죠. 당신도 느끼죠?]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내..느껴요...]

의사는 그녀를 향해 주의 사항을 이야기하고는 검사결과를 알려 주었다.
다음 검사가 마지막 검사가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오호...우리 이쁜이를 곳 볼 수 있겠군...안 그러니 엔젤?]

그녀는 레베카를 향해 웃어 보였다. 레베카는 그녀가 가지고 나온 초음파 사진에 정신을 빼
앗겨 있었다. 평생 임신이란 걸 못해 본 레베카는 모든 일이 신기하게 보이는 듯 했다.

[애구...신기해라...요즘 세상은 놀라운 일 투성이 라니까...안 그러니 엔젤?]

[네 아줌마...너무 놀라워요.]

레베카는 그녀를 이끌어 현관 쪽으로 향했다.

[에구...눈이 오네...엔젤 너 미끄러질라 조심해야겠다...여기서 기다리렴...내가 택시를 잡아 볼
께.]

그녀는 그런 레베카를 붙잡았다.

[아니에요...같이 버스 타요 그게 더 좋아요.]

[이구...몸도 무거운데...꼭 그래야 하겠어?]

은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서 장 봐 가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크리스마스이브라고요.]

레베카는 덩달아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한 미소를 머금으며 거리로 나섰다.

차안에 앉아 있던 엘라우드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힘들게 걸어가는 그녀를 보자 모든 시간
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말라 있었고 너무나 힘들어 보였다.
상냥하던 미소가 항상 머물던 입가에는 씁쓸함이 자리 잡고 있었고 부푼 배를 껴안은 손이
애처로와 보였다.
자신이 망가트린 여자...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회장님...]

[내리지....그녀를 대려 와야 해...저 몸으로 어쩌자고....]

반은 먼저 내려 그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엘라우드는 차 문을 꽉 쥐고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등골이 삐죽하고 서는 기분....은조는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저었다.
레베카는 뭐가 이상한지 사람들이 뭔가를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나.....]

[왜 그러세요?]

은조는 레베카를 보며 물었다.

[내 생전 저렇게 근사한 차는 딱 한번보고 처음이지....아니나 다를까...같은 사람의 차로군...]

그녀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구의 차기에...걸음까지 멈추고...

[대단한 실력자지...한때는...저 집안의 땅을 건너지 않고 걸어갈 땅이 없다고 할 정도 였으
니...젊은 남자가 지아비보다 더 악랄하더군...이번에도 공장을 폐쇄하려고 온 건지...]

그녀는 뭔가 두려운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발의 남자가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그 뒤로...
잊으려고 그렇게 노력해도 자신을 억누르는 악몽처럼...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의
그가...처음 본 3년 전의 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핑글 도는 기분...
뭐 하러...왔을까...이제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힐 것이 뭐 남았다고...
그녀는 순간 그가 자신의 아이를 빼앗으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사렸다.

[은조씨.]

그녀는 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레베카는 놀란 듯이 그녀를 보았다.

[엔젤...아는 사람이니?]

[회장님이 찾고 계셨습니다. 가시죠.]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가 날 찾고 있었다....
그때도...그때도 반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바보 스럽게 그를 따라간 그녀는 그에게 그런 끔
찍한 일을 당했었다.
도망가야 한다...
도망...
순간적인 선택이었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 다가오는 반을 등돌리고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은조!]

엘라우드의 외침이 들리는 걸 느끼며 그녀는 미끄러운 거리를 정신없이 달렸다.
어디든 숨을 곳이 필요했다.
그가 볼 수 없는 어떤 곳...그런 곳으로 도망가야 했다.
두 번 다시 그가 자신에게 상처 줄 수 없는 곳으로...
레베카의 단발성 외침...레베카가 반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그리고 그 뒤로 엘라우드가 달
려오는 모습...
길 건너편에 숨을 만한 도로가 보이자 그녀는 다른 것을 생각 할 수 없었다. 넘어지는 레베
카도...미끄러운 빙판 길도...달려오는 차도....

[은조 멈춰!]

엘라우드의 타는 듯한 목소리에 휘청거리던 그녀는 다시 중심을 잡고 도로를 건너기 시작했
다. 그러다 빙판가운데에 그녀는 심하게 내동댕이 처졌다.
전신을 타고 오르는 고통...거기다가 질퍽하게 느껴지는 어떤 것이 다리사이로 흐르는 기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충격에 그녀는 몸을 말고 신음했다.
엘라우드의 외침...그리고 차가 급제동 거는 소리...
눈앞에 자동차 한대가 급한 브레이크를 잡았지만 그녀 쪽으로 미끄러져 오는걸 본 그녀는
얼어붙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은조!]

뭔가 자신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머리 쪽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그녀는 정신을 잃어 갔다.
자신을 감싼 남자의 금발이 피로 물들어 가는걸 보며...그녀는 이 사람이 자신을 구한 이유
가 뭔가 궁금함을 느끼며 그렇게 정신을 놓았다.

자신을 보고 달리는 은조를 본 그는 미친 듯한 불안함을 느꼈다.
차라리 집에서 기다려 그녀를 도망가지 못하게 할 것을 하는 마음....달리는 그녀가 위태롭게
빙판을 뛰는 모습에 그는 머리꼭지가 돌아버리는 기분이었다.
반은 급하게 뛰며 그녀를 뒤 쫓았지만 그녀가 다칠 까봐 덮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길을 건널 줄이야...
한순간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이 보였고...그리고 차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것
이 보였다.
눈앞에 무슨 일이 벌어진지 알 수도 없게....
쓰러진 은조는 일어서지 못했고...그는 너무 멀리에 있었다.
그의 외침과 함께...반이 그녀를 감싸안는 것이 보였다. 반이 몸을 날렸지만 이미 차와는 너
무 가까이 있었다.
은조를 안은 반이 차에 치여 공중으로 뜨는 것이 보였고 그런 상태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의 머리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은조도 정신을 잃고 있었다.
마치 꿈만 같았다. 그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은조를 향해 갔다.

[은조...반...]

반의 두 손은 은조를 꽉 껴안고 있었다. 경호원중 누군가가 급하게 911에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고 흑인여자의 비명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렸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이 그렇게 차가운 도로 위의 붉은 피 속에 묻혀 쓰러져 있었다.
그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응급실 앞에선 그는 기자들을 모두 몰아내고 있었다. 경호원들이 모두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반의 경우는 뇌에 손상은 없지만 측두골에 금이 간 상태였고 외상이 심하다고 했다.
다행인지...반이 몸을 돌려 왼쪽 갈비뼈 3대가 나가고 왼팔이 부서 졌다고 했으므로 그렇게
생명까지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뇌진탕 때문에 아직 의식이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이런 극열한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
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진작에 은조의 경우는 상황이 나빴다.
반이 감쌌다고는 하나 앞에 얼음판에 넘어지며 심한 충격을 받아 양수가 터진 대다가 차에
치이며 공중에서 떨어진 덕에 뇌에 약한 손상을 받았다고 했다.
깨어봐야 알 것이지만 우선 급한 건 아이였다.
너무 심한 충격에 그녀의 출산 시기가 당겨진 것이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아이고 산모고
위험할 것이다...거기다가 그녀의 출혈이 너무 심해 어떠한 것도 장담을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간이 의자에 꼼짝 안 하고 앉아 수술실의 불빛만 보았다.
아이를 살릴 수 없다면 은조라도 살려 달라고 이미 말해둔 상황이었다.
누군가 그런 그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그는 피곤한 눈을 들어 그 여자를 보았다. 초췌한 모
습의 레베카였다.

[고맙소..]

레베카는 그를 한동안 내려보았다.

[아이의 아빠되우?]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그 아이를 버린 거요...이렇게 찾을 거면서...당신만 아니었어도...엔젤은 이렇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요...만약 엔젤이 잘못된다면..내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
을 거요.]

그는 레베카를 한동안 보았다.

[만약...그녀가 잘못된다면...당신이 용서하기 전에...내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요..]

그는 회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토록 마르고 연약한 그녀를...자신을 본 순간 눈
에 떠오른 공포와 혐오감을...그는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그녀를 망가트렸는지...오
늘 낮의 행동으로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미스터 레귀자모...]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 프레드릭씨는 지금 바로 병실로 올렸습니다.]

그는 다시 병실로 사라지는 의사를 붙잡았다.

[은조는...]

의사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간략하게 지금하고 있는 수술에 대해 이야기 해주
고는 수술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닫쳐진 수술실 문을 보며 자신의 무능력함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17-

의사는 초조한 걸음으로 수술실에서 나와 그를 찾고 있었다.

[레귀자모씨...전 엔젤의 담당의사인 얀입니다. 지금 현재는 머리 쪽의 상처 보다 아이를 살
리는 방향으로 수술이 진행 중입니다.]

[난 아이보다 그녀가 중요하오!]

엘라우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의사에게 이야기했다.

[사실...그녀는 지금 정신이 있는 상태입니다. 양수와 함께 진통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현재
수술을 결정하고 수술실로 들어갔지만 자연 분만이 가능한 상태이기에 유도 분만으로 돌입
했습니다. 그녀의 상태로 보아 아직까지 머리의 상처는 그렇게 크게 생각되지는 않지만 우
선 출산 후에 머리 쪽도 정밀 검사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

의사는 재빨리 설명하고는 수술실로 사라졌다.
엘라우드는 차가운 복도에 덩그러니 남아 자신의 몸이 흔들리는 대로 버려 두었다.
시간은 그의 숨을 태우듯이 더디게 지나갔다. 빨라지는 의사들의 걸음과 소란한 소리를 뚫
고 가녀린 아이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그는 수술실을 밀치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아직은 안됩니다. 밖에서 기다리세요]

간호사의 목소리에 그는 수술실 벽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이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사할까....
그런데 갑자기 수술실 문이 열리고 당황한 간호사가 줄달음 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다른 의사 몇몇이 뛰어 들어 갔다.
그의 팔을 잡은 잭의 표정은 죽은 사람처럼 검었다.
레베카의 기도 소리....
그의 눈에 자신의 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 지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머니를 지혈할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말을 할 수 있고 그를 알아보았다. 그때도 의사들
이 이렇게 뛰고...간호사가 뛰쳐나가 누군가를 찾고 했었다.
그리고 어린 그에게 그들은 자신은 최선을 다 했다고 만 이야기했었고 그의 어머니는 두 번
다시 그 인자하고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을 봐 주지 않았었다.

[무슨 일이요..]

누군가 수술실 문을 열고 뛰쳐나오다 그를 보고는 숨을 몰아 쉬었다.

[산모의 호흡이 갑자기 여려지고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그 말 이외에 다른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내려 안는 기분....
그는 의사의 멱살을 쥐었다.

[아까 까지만 해도 자연 분만이 가능할 정도라고 하지 않았소!]

의사는 그의 손에 잡힌 셔츠에 숨이 막힌 듯이 숨을 몰아 쉬며 헐떡였다.

[살려 내지 않으면...이놈의 병원 문닫게 만들어 줄 태다...살려내 뭘 동원해도 좋으니 어떻게
하든 그녀를 살려야 할거요.]

의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영글었다. 이미 엘라우드 레귀자모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의 악랄
함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 뭐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그는 그
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흐느끼며 기도문을 외우던 레베카는 그의 이런 행동에 놀라며 엉망으로 헝클어진 엘라우드
를 보았다. 말로만 듣던 냉정한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넥타이도 반쯤 풀어 버린 그의 모습은 냉정하고 아름다운 사업가의 이미지보다 자신이 사랑
하는 여자 때문에 반쯤 실성한 사람의 그것 같았다.
속으로는 그가 버린 여자인줄 알았는데...아무래도 무슨 사연으로 헤어진 것 같았다.
레베카는 그의 손을 쥐어 주었다.

[엔젤은 잘 버틸 거예요...생각보다는 강한 아이니까...]

그는 레베카의 따스한 말 한마디를 들으며 속에서 뭔가 차 오르는 벅찬 마음을 느꼈다.

[기다리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얀은 헐레벌떡 뛰어오며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셔서 차트를 보면서 이야기하시죠.]

그는 엘라우드를 수술실 벽 쪽으로 데려갔다.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이
엠알아이를 보시면 아시겠지만....diencephalon(간뇌:대뇌를 제외한 전뇌의 나머지 부분으로
두 대뇌반구가 합쳐지는 중간 즉 뇌량의 밑바닥에 위치함)의  hypothalamus(시상하부: 시상
의 바로 밑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자율신경계 및 신경세포의 집단인 신경 핵에서 여러 종류
의 신경분비물을 만드는 곳.^^)쪽에 작은 출혈로 인한 혈정이 생겼습니다. 아까의 혼절은 뇌
압의 상승으로 인한 결과인 듯 하나 더 이상 뇌압은 높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술
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부분이라 손을 댈 수 없는 실정입니다. 혈관 밖으로 생겨난 혈정
의 경우 이렇게 작은 여러 개의 혈정이라면 자동으로 흡수될 가망성이 높지만 본디
hypothalamus가 관여하는 부분이 말초 신경계와 뇌하수체를 만드는 곳이라 어떠한 장애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중심 뒤 이랑과 띠고랑에 생긴 혈정도 제거하기에는 너무 위
험부담이 큰 부분에 있고 혈정이 작은 관계로 흡수되길 기다리는 방법이 가장 현명할 것 같
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뇌압이 다시 상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저희로서도 장담 못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는 화면에 보이는 까만 뇌실을 중심으로 조그마한 구슬처럼 퍼진 혈정들을 보았다.

[지금 보시기에도 오른쪽 뇌실 보다 왼쪽 뇌실이 크게 보이실 겁니다. 이 뇌실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혼수상태를 벗어날 것입니다.]

그는 의사의 건조한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후유증....
그렇다...후유증....자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 부위들이 얼마나 위험해 질 수
있는 부위인가를...간뇌...뇌량의 제일 밑바닥에 살짝 보이는 손을 대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곳...
한쪽으로 치우친 뇌실...
그녀가 언제 깨어날지는 더 이상 장담 못하는 일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최선을 다해 주시오.....]

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산부인과 의사인 질리안을 소개해 주며 중환자 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레귀자모씨. 산모의 일은 안타까우나...먼저 아이에 대해 이야기 안 할 수 없군
요. ]

그는 그제야 산부인과 의사를 보았다.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공주님 이지만...달수를 채우지 못한 미숙아인 관계로 지금은 인큐베
이터 안에 있습니다. 손발 모두 정상이고요. 심장 기능 밑 신체 발달 상황도 모두 양호합니
다. 아이를 만나 보시겠습니까?]

그는 떨리는 걸음으로 의사를 따라 신생아 실로 들어갈 차비를 하였다. 소독 가운과 마스크
까지 한 그는 아주 조그만 유리 상자 안에 누운 빨갛고 자그마한 아이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아이의 자그마한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눈은 가려져 있었다.
자그마한 몸은 너무나 앙상하고 너무나 애처로웠다.
그의 볼 위로 눈물이 주륵 흘렀다.
자신의 아이...자신의 딸....
그는 자그마한 아이를 보며 새삼 느껴지는 커다란 감정에 휩싸였다.

[아가야...미안하구나...내가 널 지켜 주지 못해서....내 엄마랑 널...지켜 주지 못해서...]

그는 나직하게 쉰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유리 케이스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것이 그와 그의 작은 공주의 첫 만남 이였다.

그는 멀리 보이는 하늘을 보았다. 병실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 와 있었다. 아직은 혼수 상태
인 그녀를 엄마인지 아는 걸까...작은아이는 오늘로 한달 만에 작은 유리 방에서 세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아이의 까만 머리와 파란 눈을 보았다. 웃는 것인지 입을 함박 벌렸다가는 다물고 뭔
가를 보는 듯이 눈을 번쩍 뜨고는 눈망울을 굴리는 모습을 보며 그는 행복함을 느꼈다.

[그래...아이 이름은 정했어요?]

레베카가 아이에게 신길 털 양말을 짜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출장 때문에 그녀의 곁을 비운 일주일 가량 레베카가 지켜준 것에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었다.

[이레네 레귀자모....라고 지었습니다.]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하긴... 그 아이가 당신에게 그렇게 생각될 만 하구려...형장에 핀 핏빛 꽃...환상의 꽃 생각
보다 당신도 낭만 적인 면이 있어...]

레베카는 그를 놀리듯이 말하며 은조의 심장 박동기와 기타 다른 기기 들을 보았다.

[아직...깨어난 적 없습니까..]

[음...가끔...뭔가를 이야기 하곤 해...의식이 돌아오는 증거로 때리거나 아프게 하면 그쪽으로
손이 올라오곤 해...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빠른 반응이 아니라서...조금은 두고 봐야 할 것 같
아.]

[오늘은 집에가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레베카는 엘라우드가 무척 마음에 든 상태라서 싱긋이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둘만 있고 싶어서 그러우? 이구...이제 우리 공주님은 수유 시간이라서
침대에 뉘여야겠군...]

레베카는 일어나 그에게서 이레네를 받아 들었다.
그는 이레네를 넘겨주며 은조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뇌실의 위치는 바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 이유는 뇌 쪽의 혈정 때문인
지...아니면 정신적인 어떤 충격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의사들의 말이었다.
그는 은조를 한 동안 보고는 그녀의 코에 끼워 둔 산소 호흡기를 살짝 뺐다. 자주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폐가 약해진다는 말에 그는 그런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루에 수 차례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그녀를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보고 간다 해도 그는
모든 것이 미덥지 못했다.

[은조..깨어나...제발...]

그는 나직하게 말하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어두운 방안에 한줄기 달빛이 새어 들어와 그 남자의 머리카락 위에 부서 지고 있었다.
남자...누굴까....마치 석고상처럼 단아한 얼굴선 위로 창백한 달빛이 차가워 보였다.
여기는 어디이고 저 남자는 누구일까....
그녀는 머리가 너무나 아파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그 남자를 보다 자세
히 보기 위해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뭔가 스륵 빠지는 느낌과 함께 숨이 차 왔다.

그는 호흡기에서 나는 경보음에 놀라 뒤를 돌아보다 그녀의 까만 눈을 보는 순감 숨을 멈추
고 말았다.
은조의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두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은조...]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 거지? 누굴 부르는 걸까....
그녀는 뭔가 그에게 물어 보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눈을 한동안 보았다.

[내가...보여...은조?]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사의 말로는 그녀의 혈정이 분포한 부위에서는 어떠한 후유증이
올지 모른다며 그에게 제일 처음으로 걱정되는 시력과 실어증을 이야기했었다.
그녀는 어안이 없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은조?]

입에서 말이 안 나왔다...물어 보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은데...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서리자 놀란 듯 그녀를 보였다. 그는 손가락 짓으로 자신을 가리
키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스
치고...그가 급하게 간호사를 부르는 벨을 누르는 모습을 보던 그녀는 눈을 감았다. 무슨 일
이 일어 난 걸까...

-18-

불안에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 공명 기에 몸을 의지한 그녀는 자신의 눈을 가려 놓은 안대에
의해 검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고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된 건가요.]

그는 얀에게 급하게 물었다.

[운동신경과 기타 시신경에도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한달 정도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말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다친 부위로 보아
이것이 어떠한 결과인지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합니다. 아마 한 동안 주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글을 적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일시적인 부분이니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던 은조의 눈....
불안에 떨며 자신만 보던 은조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는 정밀 검사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의사들을 채근질 하며 괴롭혔다.
결과는...아무 이상이 없었다. 시신경도 언어 능력도...하지만 그녀가 일부분을 잃어 버린 것
으로 간주되어 그녀가 해야 할 재활 훈련이 정해졌다.
그는 그녀가 누운 침대에 한줌의 모래처럼 말라 버린 그녀를 보았다.

[걱정마 은조...내가 지켜 줄께...당신을 지켜 줄께..]

그녀는 그를 올려 보며 이 남자가 자신에게 뭔가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도 뭐라고 말은 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지금의 그녀에
게는 손가락 하나 달싹할 힘이 없었다.

[은조...살아 줘서 고마워...살아 줘서..]

그녀는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하며 손등에 입을 맞추는 그를 보았다.

그녀의 재활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운동 능력에는 아무 손상이 없음을 알려주었지만
그녀의 언어 능력은 더디게 돌아오고 있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 난지 보름이 지나 서야 그녀는 아이들 수준의 단어를 구사했다.
그런 자신에게 심한 자격지심을 느끼는지 은조의 우울증은 나날이 심해져서 병원에서 신경
과 치료를 병행하자고 말을 할 정도 였다.
그가 출장을 가거나 하면 우울증은 더욱 심해져 가뜩이나 말라 버린 몸으로 음식을 전혀 먹
으려 들지 않았다.

[이레네 는 어쩌라고 그러니? 엔젤 그러면 안돼.]

은조는 다그치는 레베카를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보았다.

[먹기 싫어....안 먹어..]

그녀는 다시 입을 조갑지처럼 다물었다. 레베카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은조의 우울증은 엘라우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의사들이 사고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거라고 했지만 그녀가 두려운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어
디 사람인지..그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자신 없었다 일시적인 장애라고 설명하지만 그녀의 두려움을 알지 못했
다.

[그러면 안돼...이레네를 생각해야지 엔젤 그러면 안돼.]

그녀는 두려웠다. 자신이 낳았다는 딸아이도 기억을 못하다니..이레네...어떤 모습일까...
모든게 두려웠다...

[그는...안 와..]

[올 거야 걱정마..]

[내가...바보 같아서...]

레베카는 안쓰러워 우는 은조를 안아 주었다.

[일이 바쁜 사람이야...널 위해 그래도 자주자주 와 주는 거야.]

[아니야...나빠...안 와...]

레베카는 답답해서 은조를 보았다. 뭐라 할 수 있을까...지금의 은조의 심리 상태는 13살 정
도의 수준이었다. 차도를 보이고는 있지만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느낀 순
간부터 치료를 거부하고 있었다.

[엔젤...그가 오늘 온다고 말했어 네가 전화를 안 받았잖아...그를 미워하면 안 된다...]

[마는 몰라....그는 안 와...나..미워해...]

그녀는 은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울지마 뚝 그러면 머리 아파져..알지..]

은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눈물을 멈추었다.

그는 은조가 슬픈 표정으로 아래를 보는 모습을 보았다.

[은조 나왔어 어디 아파?]

그녀는 그의 손을 쳐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늦게 와서 화난 거야?]

[나...아이 아니야...]

그녀는 돌아서 불안한 걸음으로 침대에 누워 시트를 머리끝까지 올려 썼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당신이 아이가 아니니까...이렇게 옆에 있는 거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그러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엘라우드 레귀자모씨. 얀 선생님이 설명 드릴 말이 있다고 하시는데요.]

[곳 가겠소. 은조 잠시만 기다려 금방 올께.]

그녀는 시트를 뒤집어쓰고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의 이름...엘라우드...엘라우드....뭔가 그녀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이름....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그럼...그녀의 이런 상황이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얀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어휘력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습니다만...그녀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그리고 이곳에 왜 있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하죠. 거기다 자신의 발음과 어휘력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노력해야겠지만 지금으로는 우울증의 치료가 먼저일 것
같습니다.]

[그녀의 기억이..]

[일종의 기억상실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상실은 완전히 백지 위에 글을 쓰는 수준의
것으로 그녀는 말부터 잃어 버린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그녀의 뇌 속에 자리한 혈
정이 작아 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현재로는 장담할 수가 없군요.]

엘라우드는 생각에 잠겨 탁자를 두드렸다.

[반의 경우는 뇌출혈이 있었지만...이런 상황은 아니지 않았습니까?]

의사는 반의 차트를 보여 주었다.

[반 프레드릭씨의 경우는 측두옆 부분으로 고막이 터지며 그쪽으로 출혈이 빠져 나온 상황
이라 수술도 뇌압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보시다 싶이 귀 쪽의 두개골에 기윽 자로 가로
지른 상처가 보이실 겁니다. 그의 뇌는 보기보다 멀쩡한 상태였는데 엔젤의 경우 출혈이 고
인 상황이라 두 사람의 회복 속도가 틀린 겁니다. 보기에는 반 프레드릭씨의 상처가 더 심
하게 보였지만 사실 엔젤의 상처가 더 심한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출혈이 조금씩 일어나 서
서히 혼수상태로 빠진 상황이다 보니 손을 쓰는 것이 늦을 수박에 없었구요.]

그는 얀의 설명을 들으며 생각에 빠졌다.

[그럼...영원히...저 상태일 수도 있습니까?]

얀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보았다.

[80%정도는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어떨지는 차후에 두고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는 다시 탁자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쳤다.

[퇴원은 언제가 가능합니까.]

[지금으로서는...한 한달 후에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의사를 주치의로 하여 한 팀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데요. 그녀가 이곳에 있기를 너무나
싫어하는 것 같아서요.]

얀은 놀란 눈으로 보았다.

[디트로이트에 집을 한 체 장만할 예정입니다. 의료진과 재활 운동 트레이너 모두 집으로
들이고 싶어요. 인원을 알아봐 주시오. 돈은 상관 말고.]

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따라 나섰다.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묘한 웃음을 지으며
얀을 돌아보고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내 아내를 살려준 대가로 이곳에 풍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니...언제든 나에게
직접 연락하시오.]

얀은 감사의 눈으로 그를 보았다. 세계 굴지의 억만장자가 그들에게 후원을 하겠다고 이야
기 한 것이다. 얀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격식을 차려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아직도 시트를 뒤집어쓰고는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놀라게 하고픈 마음이 없어 그는 살짝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말 연습하는걸 듣다가 놀라
움에 굳어 버렸다.

[에...엘...라우..드...음....엘....라..우드....음...]

그녀는 속이 상한지 자신의 이름을 반복하며 자신의 발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힘
이 빠져나가며 아까 자신이 생각한 하나의 계획으로 자신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살짝 그녀의 시트를 잡아당겼다.
시트 틈으로 그녀가 수줍은 얼굴을 살짝 내밀더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얼른 시트로 코
까지 가리고 그를 보았다.

[뭐..연습해...]

그는 목이 매여 조심스럽게 물어 보자 그녀는 도리질했다.

[은조..]

[나...나....]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입 모양을 다듬었다.

[엘...라우드....당신 이름...맞아요?]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물기가 어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쥐어 자신의 볼에 대었다.

[얼마나...당신이 이렇게 불러 주길....원했는지 몰라...]

그녀는 그의 그런 말을 들으며 그가 자신에게 어떤 위치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당신...나에게...그러니까...]

그는 인상쓴 그녀의 이마를 살짝 만져 주었다. 그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레베카가 아이를
대리고 들어온 것은.

[아가야 엄마란다. 엔젤 너의 딸 이레네야. ]

은조는 조그맣게 꼬무락거리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엷은 푸른 눈...네이비 블루....
그녀는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당신과 나의 딸이야.]

그녀는 뭔가 덜컥하고 내려 안는 기분에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이구...이레네도 건강이 그렇게 좋지 못했어. 엄마가 아프니까 저도 아픈 건지...인큐베이터
에 좀 있더니 감기가 걸려 안 떨어져서 면역성 약한 엔젤에게 옮길 까 봐 다른 방에  유모
랑 있다가 낫은 것 같아서 데려왔어]

그녀는 레베카가 자신에게 안겨 주는 아이를 멍하니 보았다.
아이는 그녀를 보더니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입을 꼬무락거렸다.

[이뻐...]

그는 그녀의 옆에 자리잡으며 딸아이를 안기 쉽게 해주었다.

[당신과..나..]

[그래..우리 아이...]

[나..당신과 결혼했어요?]

그녀가 처음으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궁금증을 표했다.

[음...결혼하기 전날...다툼이 있었어...그래서 당신이 떠나 버렸고...난 찾아다니다가 당신을 만
난 거야...미안해 은조...그때..그렇게 당신과 다투는 것이 아닌데..]

그녀의 표정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역시...나 싫어해....그렇죠...]

그는 그녀를 꼭 안았다.

[아니..아니..당신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어. 미워하다니...난 당신이 날 미워할까
봐..얼마나 두려운 줄 알아?]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겹쳐 오자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의 다정한 입맞
춤에 그녀의 불안함은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일생 일대의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영원히 기억을 잃어 버릴 것이라는데 거는 도박...그리고 기억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떠날 수 없는 도박을...

-19-

노바는 뉴욕에 돌아온 엘라우드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을 무단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잭은
그녀를 막기에 역부족 이였다.

[오빠. 할 말이 있어.]

엘라우드는 또다시 뭐가 그렇게 바쁜지 6개월만에 본 동생에게도 시큰둥했다.

[무슨 일이지? 난 다시 나가봐야하는데?]

[요즘 오빠가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
어. 하지만 오빠가 뉴욕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거기다가 오빠의 결혼 소식을 내가 왜 신
문 기사로 읽어야 하지?]

그는 노바가 내미는 신문을 건성으로 보았다.

[정말인 거야? 아니면 거짓인 거야.]

[내 여자야. 이제 만족하니? 나가 다오 피곤하구나.]

노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은조씨는 찾은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엘라우드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뭘 원하는 거야...은조? 그 여자는 누구니? 너무 궁금하구나...그리고 석현은...어떻게 되었
지? 너랑 붙어 지내는 것 같던데..]

노바의 얼굴이 붉어 졌다.

[그것은 오빠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석현씨가 날 만나는 이유는 단지 친구 관계일 뿐이야.]

그는 흥미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난 떠나야 할 시간이야. 보고서는 잭에게 넘겨 주면 잭이 나에게 전할 거야.]

[오빠의 충복은 어딜 간 거지?]

그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휴가중이다. 넌 상관할 일이 아니지..]

그는 잭과 대동하여 자리를 피해버렸다. 남아 있는 노바는 그런 오빠에게 너무나 당황했다.
한번도 오빠가 자신을 이토록 무시한 적이 없었다. 비록 악랄하게 뒤틀리기는 했지만 그녀
에게 숨기는 일은 없었다. 오빠와 결혼한..여자...누구일까...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뭐해? 덥지도 않아?]

[내 아줌마 전 괜찮아요. 그러나 저러나...오늘 온다고 했는데...그이가 안 오네요...일이 많은
가...]

레베카는 이레네를 달래며 싱긋이 웃었다. 그녀는 퇴원하고 나서 나날이 몸이 좋아지고 어
휘력에 대한 공포도 극복했다. 하지만 예전의 기억...그녀가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레베카는 이제 옹알이를 제법 하는 이레네를 내려놓았다.

[이레네..이리로 오렴...]

그녀는 능숙하게 이레네를 안아 올려 그의 눈과 똑같은 네이비 블루의 눈을 보았다. 그와
결혼한지 이제 겨우 한달...
그의 고집스런 주장에 의해 그들의 결혼은 이루어 졌지만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체 그의 아내가 되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누구도 초대하지 말기를 원했다.
그는 그녀의 말대로 해주었고 그와의 결혼은 단출하게 이루어 졌다 증인은 반과 잭..그리고
레베카가 전부였다.
그녀는 아이를 안아 들고는 방으로 향했다.

그는 인상을 쓰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신문에 사진은 실리지 않았지만 그가 결혼한 사실이
알려졌고 노바는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를 찾기는 힘들어도 그를 찾아올 가능성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반..그래 몸은? 아내는 어떤가? 음.....반...자네에게 명령이 있어.....돈을 풀고 인맥을 풀어서
디트로이트의 집을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그리고 아내의 얼굴을 공개하는 자는 영원히 그
바닥을 떠나게 될 거라고 공고해...그래...노바가 낌새를 느낀 것 같아...그래...음...]

그는 핸드폰을 접으며 생각에 빠졌다. 노바나 석현이 찾아온다면....
그에게는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그녀가 과거를 찾아도 떠나지 못할 정도의
시간이...
그는 한숨을 쉬며 기사를 독촉했다. 그녀를 안고 있지 않으면 이 불안이 영원히 따라 다닐
것 같았다.

[엘라우드...]

그녀가 멀리서 뛰어와 그의 품에 안기자 그의 마음을 지지던 차가운 불꽃이 사그러 드는 기
분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여자...그녀는 자신의 것이었다.
서약으로든...육체적인 것으로든...그녀는 자신의 것이었다.

[기다린 거야?]

그녀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싱긋이 웃었다. 예전의 다정한 모습 그대로...

[피곤하죠? 들어가요 안 그래도 가정부가 음식 장만한다고 정신이 없어요...그리고 레베카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는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의 어투는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완전히 백지에 적어 내린 그
의 이름처럼 그녀의 발음에 많은 변화가 생겨 있었다. 비록 사고 후유증으로 약간 느리게
말을 하는 것은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애를 태우는 매력이 되어 있었다.

[그래..뭐하고 있었지?]

그녀는 인상을 썼다. 그러더니 그의 머리끝을 잡아 뱅글 돌렸다.

[머리 땋기 책보고 있었어요...이번에는 당신 머리를 어떻게 땋아 줄까 하고...]

그는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장난스런 이런 인사도 그에게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녀의 다정한 미소도...그녀의 다정한 눈빛도 모두가 그를 위한 것이었다.
자신만의 것...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부볐다.

[그건 이레네 에게 해줘요..우리 꼬마 공주님이 요즘은 부쩍 아빠를 찾고 있어요.]

그는 그녀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살짝 걷으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지워 주었다.

[그래 이레네에게 가 봐야지 우리의 작은 공주님 에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끼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와 보조를 맞추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큰 키의 잘생긴 이남자가 자신의 남편이
고 자신을 위해 언제든 뉴욕의 일도 뒤로 하고 돌아올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이 너무나 행복
하고 자랑스러웠다.

[이레네..아빠야 아빠 오셨어]

그는 이레네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이는 열심히 뭐라고 그에게 이야기하듯이 하더니 입을
벌리고 그의 뺨에 키스를 하고는 부벼 댔다.
그녀는 그런 모습을 즐겁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나날이 무거워지는걸 우리 공주님은?]

그는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분홍색의 면 드레스 차림이었고 그
런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처음 본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은조...이리와..]

그녀는 그의 부름에 쪼르르 뛰어가 그에게 섰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녀의 심장은 망치질하듯이 팔딱거렸다. 그는 은근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는 이레네와 함
께 그녀를 껴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잃어 버리지마..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도.]

그녀는 그가 하는 말에 그녀의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잃어 버린 여러 추억들에 그가 마음 아
파한다고 생각했다.

[미안해요...내가...당신과의 과거를 잃어 버려서.....하지만...그것 하나는 알 수 있어요..내가 당
신을 사랑했다는 것...정말 사랑했다는 것..]

그의 입에 쓴 미소가 걸렸다.
사랑...그를 진심으로...그렇게 되길 얼마나 원했는가...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던 이는 다른 사
람이었다...그리고 이제 그녀는 그 사실을 망각의 강물에 던져 버리고 새로운 기억으로 그곳
을 메우고 있었다. 자신이 뿌려 놓은 거짓이라는 추억으로...

은조는 그가 들어간 샤워실을 빼꼼히 보며 초조해 했다. 말이 부부지 그들이 침실을 같이
쓴적은 없었다.
이유인즉 그가 그녀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허락....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렇게 머뭇거리다가는 레베카의 말대로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
릴지도 몰랐다. 그녀는 도리질을 했다. 그건 싫었다.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
다는 것은...
그와의 사이에는 이레네라는 딸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런..일을 했다는 건 너
무나 당연한 결과 였다.

[무슨 고민 있어?]

그가 샤워를 마치고는 수건만 한 장 달랑 걸친 체 나오는 모습에 그녀는 숨이 멋을 것 같았
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내리 떴다. 그의 긴 머리끝에 매달린 물방울을 보던 그녀
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돌려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수건을 받아 들고는 그
의 머리를 세심하게 닦아주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그를 올려 보자 그는 물어 보듯 그녀를 보았다.

[엘...나...당신과 정확히..어떤 사이 였나요...]

엘라우드는 그녀의 손에 들린 수건을 받아 들고는 그녀를 끌고가 침대에 앉게 했다.

[어떤 사이를 말하는 거지...]

[나..당신과...그러니까...연인 사이 였나요?]

그는 그녀가 궁금해하는걸 말해 줄 수도...말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은조...당신과 난...공황에서 처음 만났어..우리가..만나고...2년간 난 당신을 피해 있었어.]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왜요?]

그는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며 이야기했다.

[당신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당신에게 상처 입힐 까봐....하지만...2년 뒤에 돌아와서 당신을
다시 보는 순간..난 당신을 원하는 나 자신을 도저히...멈출 수가 없었어...]

그녀는 그를 한동안 보았다.

[그런데...왜 결혼하지 않았죠?]

그는 그녀를 한동안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올렸다.

[난..너무 바빴고...당신은 공부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했어...]

그녀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뭔가 석연치 않은 듯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등을 보이며 창으로 다가갔다.

[우리...동거 했나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질문....그는 그녀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
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부정...하지는 않겠어....당신이 날 떠나기 전...일주일간...우리는 함께였어...같이...침대를 사용
하고...같이...]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아 말을 잘랐다.

[내가...왜 당신을 떠난 거죠?]

그는 그녀가 괴로워하는걸 알았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돌려 혼란스런 그녀의 눈을 보았다.

[내가...못되게 굴어서...내가..너무 당신을 몰아 세워서였어...]

그녀는 못 믿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당신이...그럴 리 없어요...내가...나쁜 여자 였나요? 부자인 당신을 이용해서....돈이나 갈취하
는...아니면..난 난잡한...]

그는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니...당신은 결코 그런 여자가 아니었어...그랬다면 날 떠나지도 않았겠지...그리고...당신은
누구보다 순결한 여자였어..당신은 내가 처음 이였어..]

그녀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리고는 그의 품에 안겼다.

[내가...당신을 떠난 이유를 변명하지 않아도 되요....]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당신이 나쁜 적은 없었어..나의 은조...항상 내가 문제 였지...항상 당신을 멀리할 궁리만 했
어..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끌리는 날 잡을 수 있을까 생각뿐이었어...하지만..이제는 아니야..
당신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뭐든 버릴 수 있어...은조..그러니 당신이 아파하는 그런 마음들
을 잃어 버려..부탁이야..]

[난..바보가 되어 버렸어요...내가 대학을 다녔는지..내가 뭘 했는지...내가..어떻게 당신을 만났
는지..아무 것도 몰라요...난 불안해요...당신을 발목 잡은 것 같아...당신을..내게 묶어둔것 같
아..]

그는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눈을 보았다.

[아니...내가 당신을 묶은 거야..내게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는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입술을 겹쳤다. 그녀는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의 입술 아래
조용히 한숨지었다. 그녀의 불안함은 아직도 머리 속에 감도는 안개처럼 떠다녔지만..이 순
간..그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20-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쥐고는 뜨거운 자신의 몸 쪽으로 당기자 그녀는 무언의 대답
으로 등을 휘며 그에게 안겼다.
이상할 것 없는 관계...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당황 스러웠다.
과연...그가 예전의 기억을 잃어 버린 그녀를 안으며 만족할 수 있을까...
떠나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그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알았는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그녀
에게서 떨어져 침대에 덜썩 주저앉았다.

[엘...]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는 그녀의 반응에 실망한 것이리라...
바보...부부면서...아직 까지 남편을 거부하다니...

[아니...난 걱정마...당신이 바라지 않는다면...기다릴 수 있어...강제로 당신을 안지는 않아.]

그가 거칠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며 자신이 정말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은조는 천천히 자신의 원피스를 벗어버리고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안았다. 그는 놀
란 듯 그녀를 보았다.

[은조?]

[나...사실...두려워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당신이..나에게 실망 할 까봐...난...아무 것도 몰라요...당신이랑...어떻게...그러니까...]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인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불안하게
그를 올려 보았다.

[오....은조...당신이 걱정할 일은 아무 것도 없어...난...당신에게 결코 실망하지 않아...결코...날
봐..은조 어서.]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에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의 너무나도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는
모습을...그리고 그 속에 담긴 갈망과 욕망을..

[난...당신을 원해..너무나..끔찍할 정도로...당신만이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어...은조..]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에게 내려오며 예전과는 너무나 틀린 철저한 욕망에 빠진 입맞춤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목을 안으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레이스로 감싸인 슬립의 가슴을 더듬어 가는 동안 그녀는 충격으로 온몸
이 굳어지는 기분이었다.
따뜻한 불덩어리가 온몸을 타고 흐르는 기분...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손에 가슴을 밀어 주며 가녀린 탄성을 올렸다.
그의 손이 슬립을 따라 내려가 슬립의 밑단을 감아쥐더니 애태우듯이 밀어 올렸다.
그녀의 몸에서 미약한 떨림이 스치듯 지나며 그의 몸에 더욱 바싹 안겼다.

[은조....]

그는 그녀의 귀에 속삭이며 그녀의 슬립을 완전하게 벗겨 냈다. 그녀의 발그레한 두 볼...그
리고 살짝 벌어진 촉촉한 입술...
예전의 일이 떠오르며 예전에 그렇게 그녀를 다정하게 안아 주지 못 한 것에 그는 쓰디쓴
마음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이제는 성숙해진 여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떨고 있는 아름다운 몸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애무하
기 시작했다.
부끄러움과 함께 그의 단단한 육체가 자신을 안자 모든 감각이 정지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가락이 스치는 자리마다 온 신경이 따라가는걸 느끼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
다.
그의 따스한 입술이 가슴에서 배로 내려가고 그녀는 그의 긴 머리카락이 자신의 허벅지 주
변을 스칠 때마다 느껴지는 긴장감에 가슴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다리 사이를 스치는 얼얼한 충격과 함께 뜨거워지는 몸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엘...]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동안 보더니 아주 감질나게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미끄러트
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리에 힘을 줘 그의 손을 제지하고 있었다.

[은조...그러지마....내게 당신을 열어..제발..]

그의 까칠한 목소리에 그녀는 자신이 지금 그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기를 쓰고 다리
에 힘을 풀었다. 그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둥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며 너무나
친밀하게 그녀를 만지고 애태우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의 어깨를 꽉 틀어쥐며 숨을 헐떡였
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을 헤매고 다니며 한 손으로는 엉덩이를 꽉 안아 쥐었다.

[엘...엘...]

그녀는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힘없이 그에게 안겨 몸을 떨었다. 뭔가가 폭발할 것 같
았다. 자신의 내부에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각이 그에게 더 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한쪽 다리를 밀어 넣어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그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아플...지도 몰라....하지만...금방...좋아질 거야..약속해...]

그는 불분명한 어투로 이야기하며 그녀를 내려보았다. 그녀는 그의 긴장한 얼굴과 그의 욕
정으로 흐려진 눈을 보며 그의 뺨에 손을 올리고는 그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손이 정확하게 그녀의 중심부를 여는걸 느낀 순간 그의 뜨거운 남성이 그녀 속으로 파
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 쉬었다.
뻑뻑하고 아릿한 아픔....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뭔가 바닥부터 올라오는 공포...
공포? 그가 두려운 걸까...아니면...그를 속인 걸까...그녀는 그를 두려워했던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생소한 공포에 온 몸이 얼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의 거칠지만 절박
한 목소리가 심연에 가라앉은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간신히 그를 올
려 보았다.

[은조....괜...찮아...두려워...하지마....]

그녀는 그의 잔뜩 굳어진 얼굴을 보며 그가 애써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안함....그래...이것이 생소한 건...내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야...
그녀는 자신을 달래며 그의 목을 안았다.

[괜...찮아...아.]

그의 몸이 그녀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어오자 그녀는 뒤의 말을 하지도 못한 체 그의 목
에 얼굴을 묻고는 비명을 질러 버렸다.
그의 허리가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이 들썩거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그에 의해 눌려지고 그럴 때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의 전율을 느끼며 그녀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단어를 나열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에 의해 밀어질 때마다 혼미한 정신이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의 단단한 몸이 그녀 속을 계속해서 넘나들며 그녀에게 이성적인 생각을 못하게 했다.
온 몸이 바스라지는 기분..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기분...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풀어...은조...참지마...풀어 버려...]

그의 거친 신음 소리와 함께 그녀의 입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막아 두었던 신음이 터져 나
왔다.
그녀는 시트를 움켜쥐며 허리를 위로 밀어 올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아쥐고는 자신을 향
해 더욱 끌어올리며 더한 항복을 요구하자 그녀는 모든 걸 그에게 열어 주며 그의 아래 항
복하고 말았다.
절정을 향한 그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
다.
그리고 그의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움직임이 멈추더니 그의 긴 신음 소리와 함께 그가 자신
속에 모든 열정을 풀어 버렸다.

[은조...은조...]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간신히 그의 얼굴을 본 은조는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그의 입술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감각적이고 뜨거운 키스는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녀는 그의 다정한 모든 몸짓에 현혹된 체 그렇게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나른하게 허리의 오목한 부분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고는 그를 보았다.

[엘...]

그가 그녀를 보는걸 느끼며 그녀는 수줍게 이야기했다.

[나...아까...처음에는...두려웠어요...무섭기도 하고...]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에 열중해 그의 얼굴이 어두워 지는 건 보지 못했다.

[그런데....나...]

[그런데..?]

그녀는 피식 웃으며 그의 근육으로 잘 발달된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그가 들릴 정도로만 낮
게 속삭였다.

[나...일주일간...당신 곁에 있었던...이유를...알 것 같아요....]

그녀의 수줍은 고백에 그의 마음속에 얼음이 소리 없이 녹아 버리는 기분과 동시에 자신의
거짓이 한겹 옷을 껴입은 기분이었다.
그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꼭 안았다.

[내게...하나만 약속해..은조..]

은조는 그를 보았다

[날..두고 가지마...내가 어떤 잘못을 한다 해도...아니 했다 해도...나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
해줘...떠나지는 마...]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걸 느꼈다. 아마 그는 그녀가 예전에 떠나 버린 안 좋은 기억
때문에...그리고 그녀가 그와의 소중한 기억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그가 괴로워한다고 느꼈
다.

[미안해요...내가...우리 사이를...망각해서...내가...당신을 잃어 버려서...]

[아니야...새 출발의 좋은 기회인걸...단지 난 두려운 거야...당신이 날 떠날 까봐..]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떠날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난...]

그가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그의 이마에 입술을 옮겼다.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사랑한 걸요....난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엘라우드...사랑해요...]

그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거짓 위에 새워진 사랑...그는 그녀의 예전을 알면서도 이렇게 그
녀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

[은조...난...정말..행복한 놈이군...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니...]

그는 씁쓸하게 말하고는 그녀를 힘껏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따스함에 도취된 듯 그녀를
껴안았다.

-21-

그녀의 뺨은 핑크 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었구나 네 뺨이 행복에 겨워 노래하고 있으니...]

그녀는 레베카의 놀리는 말에 대항하듯이 이레네를 눈 높이로 끌어 올려 얼러주고 있었다.

[아까 정원에서 엘라우드를 봤는데.....]

그녀는 죄지은 아이처럼 얼굴을 푹 숙였다. 레베카는 그녀의 모든 속내가 드러나는 행동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아이 침대를 붙들고는 소리 높여 웃었다. 은조의 뺨은 울그락 발그락해
지며 레베카에게 불평의 말을 늘어놓았다.

[큭큭...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거야...이레네도 낳은 처지에...그래...새로운 그와 자본 경험이
어떠니 마리?]

그녀의 얼굴의 홍조가 더해졌다.

[그...그만 놀려요...]

레베카는 이제는 뒤로 넘어갈 지경으로 웃었다.

[오호호호호 너란 여자는...정말 남자를 미치게 한다니까...아이까지 낳은 여자가...그렇게 뺨
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엘라우드가 미칠 만해...피곤한 듯이 보이지만 행복한 엘라우드의
얼굴이란...호...내 나이가 조금만 젊었어도....]

[레베카!]

그녀는 빽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레베카는 더욱 유쾌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이레네를 안아 들었다.

[어땠어...무서운 것만은 아니지?]

은조는 자신의 흘러내린 셔츠를 올리며 흘긋 레베카를 보았다.

[무...무서운 건....잠시....흠....잠시 였어요......그는....]

레베카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렇게 귀여운 여자니까 엘라우드가 그렇게 사랑하는 것일
것이다.
레베카는 은조의 귀여운 얼굴을 한동안 보다가 이레네와 함께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좋아 보이는군 반]

반은 웃으며 엘라우드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 말은 제가 해야할 것 같군요 회장님 좋아 보이십니다. ]

엘라우드는 겸연쩍은 듯이 웃어 보이며 반의 옆에 앉았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으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요즘 은조는 어떻게 지냈나.]

반은 평소에 보이지 않던 웃음을 웃으며 뭔가 생각하는 듯이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얼마전...은조씨가 회장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회장님이 쿠키를 좋아하
신다고 했더니...그날 이후 후식은 모조리 쿠키였습니다. 건포도 쿠키...냉동 쿠키...모자이크
쿠키...초코칩 쿠키...탄 쿠키...덜 익은 쿠키...시큼한 쿠키 등등...하지만 맛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뭐 지금은 아주 굉장히 맛있는 쿠키를 만들고 있지만 요.]

엘라우드의 얼굴이 다정한 미소로 물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고 걱정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몰랐다.

[자내...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여....반...알고 있어? 나랑 있을 때 보다 그녀가 자네를 더 웃게
만드는 것을...]

반은 웃으며 그를 보았다.

[은조씨는 마치 봄바람처럼 따스한 여자입니다. 누구든 그녀의 다정함을 알면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요. 회장님의 다정한 미소도...제가 모셔 온 동안 보지 못 했던 미소입니다.]

그는 한동안 반을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녀 이야기는 그만하고...내가 알아보라고 한 것...알아 본 건가...]

반은 바뀌어 버린 그의 모습에 이미 웃고 이야기하던 시간은 지나버린걸알았다.

[내 명령하신 대로...윤은 지금 사업체를 새로 시작했고 지분의 34%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머지는...얼마나 모았지?]

[지금 현재는....20%입니다.]

[다른 주주 중에 가장 큰 주주는?]

[노바님 이십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프링 쿨러에서 분사되어 나오는 물줄기를 보았다.

[시장에 나오는 그의 주식을 모아...언제든 조심해야 하니까...]

반은 한동안 침묵을 하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윤의 회사가...아무리 성장을 한다고 해도...회장님의 적수는 안될 건데요...]

엘라우드는 차가운 시선을 반에게 돌렸다.

[내가 걱정하는 건...어쩌다 마주칠지도 모르는...윤과 내 아내 때문이다...그를...협박해서라
도....난 그의 입을 막아야해...]

반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가 보는 방향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회사는 잘 돌아가?]

석현은 들어오는 노바를 보며 싱긋이 웃었다.

[노바 오랜만이군. 회사의 최고 주주께서 어쩐 일이지?]

노바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많이 여윈 석현을 보았다.

[나도...독립할까...석현씨...]

석현은 노바를 흘끔 보더니 까칠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멍하니 창을 보았다.

[그러지마...회장님 정말 힘들어 하셔.]

[오빠...밉지 않어....은조씨와 헤어지게 만든 장본인...인데...]

석현의 눈에 고통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래...원망도 했지...하지만...은조가 날 떠난 이유는 그가 아니라...나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그녀에게 사실을 말했어야 했어....내가 당신과 자주 만나야 했던 이유...비록...아이는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그녀가 오해했을 수도 있어....노바...당신에게 한 말을 들어보면...그
녀...당신과 나 사이를 오해해서 떠난 거란 생각이 들어...]

노바는 죄스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하룻밤의 그릇된 행동에 의한 임신...그리고 두려움....
그리고...위선....
노바는 은조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 자신 때문에 석현이 이런 괴로움을 당한다고 생각했
다. 그리고 석현에게 말하지 못한 한가지...어쩌면...엘라우드가...이미 그녀를 찾았을지도 모른
다는 것....

[은조씨...연락은 있어?]

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벽에 걸린 은조의 웃는 사진을 보았다.

[은조씨...계속 찾을 생각이야?]

[어...찾아야지...내게 돌아오라고 말 할꺼야...내 잘못을 말하고...미안하다고 할꺼야...]

노바는 날카로운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하려던 말을 입속에 가두었다.

[자요?]

그는 일부러 자는 척 하며 가만히 있었다.

[응.....어쩌지....]

그녀는 그의 옆에 앉아 중얼거리며 그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일어나요...반이 찾아요...응?]

그는 자는 척 하며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
그는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어...당신...깨어 있죠? 그렇죠?]

그녀는 그를 때리며 앙탈을 부렸다.

[하하하...당신은 쉽게 속는 다니까. 난 당신 놀리는 재미에 맛이 들려 버렸어.]

그녀는 그의 넓은 가슴을 때리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은조....]

그는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녀는 그를 꼭 안았다.

[반이 찾는다고 했지...급한 일인가?]

그녀는 그를 올려보았다.

[무슨...팩스가 왔다는 것 같았어요....누구라던데...잭?]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그의 몸이 주는 반동에 그대로 넘어질 뻔했지만 단단한
그의 가슴 안에 꼭 안겨 있기에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미안...가봐야 겠어...여기서 기다릴 거야 은조?]

그녀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그를 보았다.
어둡고 물기를 머금은 그의 눈...그녀는 호흡이 가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살짝 벌리자 그는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입맞춤을 하였다.

[기다리고 있어...미리 잠들지 말고...어제처럼...]

그는 그녀의 귀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속삭이고는 침실을 빠져나가자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그의 눈에 나타난 생생한 욕망에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반은 그에게 잭이 보낸 팩스를 건네었다.

[노바가 눈치 챈 건가?]

날카로운 엘라우드의 말에 반은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제가 직접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엘라우드는 고민하듯이 인상을 섰다. 그리고는 노트북을 펼치고 한동안 뭔가를 보고 있었다.

[아니...피한다. 당장 전용기 대기 시켜...노바가 오기 전에 떠난다. 참...레베카도 함께 떠난다.
그리고 아는 모든 이의 입을 다물게 해. 그녀는 금발이고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하지...이름
은 엔젤. 가지.]

[회장님 바로 이륙 준비시킬 까요? 이레네는...]

[당연히 준비해야지. 바로 레베카에게 말해 난 그녀에게 말 할 태니까.]

그는 팩스 지를 반으로 접더니 커트기에 집어넣었다. 갈려서 떨어지는 종이를 무심하게 보
던 그는 비웃듯이 웃었다.

[어리석은...노바...넌 결코 나와 은조를 찾을 수 없다....반. 사진을 모조리 치워 당장.]

엘라우드는 거칠게 말하고는 발길을 돌려 버렸다.

-22-

그녀는 바쁘게 그를 따라 걸으며 설래 이는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정말요? 정말 가는 거예요?]

그는 들뜬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는 위선이라고 자신을 비난했다.

[음 대신 당신은 변장을 해야해.]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당신은 누군가 찾아와 당신에 대해 나쁜 사실을 말할까봐 두려워했어...그렇지? 거기다 내
아내가 기억상실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변장시키는 거
야 비행기 안에서는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나갈 때는 변장을 하는 것이 좋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대단히 부자인 남자의 현재 아내였고 만
약에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기억상실인 그녀의 거짓된 기사를 흘린다면 그의 이미지는 상당
히 실추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불화의 시발점이 되어 그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따를께요.]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안았다.

[시간이 얼마 없어 옷은 가서 사도록 하지. 이레네의 짐도 챙겨야 하니 이만 나가볼까?]

[아...하지만 이레네의 핑크색 코끼리는 꼭 가지고 가야해요.]

그는 웃으며 그녀의 뺨에 손을 올리고 어루만졌다.

[당연히 우리 공주님의 인형은 가지고 갈거야. 걱정마 은조.]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십니다.]

그녀는 늙고 꼬장꼬장한 집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상을 썼다. 이 집사의 어느 곳을 찔러도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바는 엘라우드가 새로 장만한 집을 보았다. 분명 혼자 살집은 아니었다. 기자의 말처럼 이
곳에 그가 아이와 아내를 숨겨둔 것일까....
그녀는 거실에 앉아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집안은 은은한 빛깔로 치장되어 있었고 어딘지 여자의 손길이 많이 거친 것처럼 보였다.

[오빠에게 연락을 안하고 온 것이 문제였군요...결혼한 건지..아니면 동거인지 만이라도 알고
싶었는데...결혼한 건가요?]

집사는 거만하게 눈썹을 올리고는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더니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그녀의 곁에 서있었다.

[동양인...인가요...]

노바는 집사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물었다.
집사는 아무런 표정 없이 노바를 보더니 싱긋이 웃었다.

[아니요 그분은 자그마한 프랑스 여자입니다. 엔젤 레귀자모 가 그분의 이름이죠.]

그녀는 이 집사가 진심으로 엔젤이라는 여자를 좋아하고 아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엔젤...은조라고 생각하고 이곳까지 온 것인데....착각인가...
노바는 다시 집을 둘러보았다. 아이사진도 한 장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오
빠가 갑자기 떠난 것이 피하기 위함인지 정말 일정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빠와 연락이 되면 알려주세요. 결혼 축하한다고.]

노바는 일어서며 발길을 돌렸다.
의구심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그녀는 거실을 빠져 나왔다.
은조를 찾으면....석현에게 알려야 할까...라는 생각을 곰곰이 하며...

[생전에 내가 미국 땅을 벗어나는 일이 있을 줄 몰랐군....]

레베카는 비행기의 좌석에서 성호를 그으며 이야기했다. 은조는 막연한 공포를 느끼며 가만
히 앉아 있었다. 비행기....그녀도 타 봤겠지...그러니 이곳에...

[무슨 생각해?]

엘라우드가 이레네를 안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는 불안한 미소
를 지었다.
그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일이지? 안 좋아 보여..비행이 처음이라 무서운 거야? 아니면 프랑스 말고 다른 곳으
로 갈까?]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나...비행기 타면 멀미할지도 몰라요....기억은 없지만...속이 이상해요...]

그는 그녀를 가만히 당겨 안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부볐다.

[불안해하지마...내가 보살펴 줄게...]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레네의 작은 손이 그녀의 뺨을 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은조는 그의 품에 안겨 이레네를 받아 안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난...가족이 없나요...아니면 당신이 모르는 건가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에 그는 인상을 썼다.

[은조...당신은....사고로 가족을 잃었다고 했어...]

거짓말...그녀의 부모님은 한국에 살아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사이고 어머니는 주부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언니와 오빠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은조는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딸
일 뿐이었다. 그들은 은조가 석현과 헤어진 후에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에 남아 있는 줄 알
고 있고 작은아버지도 은조가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물론 은조의 작은아버지는 은조가 그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석현에게는 말하지 않았
다. 그것이 은조의 의지이고 그리고 교구에 지원금 이였기에....
은조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그의 가슴에 더욱 파고들었다.

[그래서...날 만나러 오지 않았군요...그래서....]

그는 그녀가 말은 안 했지만 자신의 가족 때문에 마음 아파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자신도 마음이 아팠다.

[은조....나와 이레네는 당신의 가족이야...그러니 너무 그 생각에 매달리지는 마.]

그녀는 그의 투정부리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웃었다. 그랬다 그녀에게는 그와 이
레네 뿐이었다.

[엘라우드.... 미안해요...나에게는 당신이...그리고 나의 딸이 있는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엘라우드를 보았다. 엘라우드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천천히 내려와
덮이고는 그의 다정하지만 약간은 성질이 난 듯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있
어 그에게 더 가까이 안기지 못하는 것이 불만스러워졌다.

[흠흠....기내 침실을 이용해. 나와 반은 목석이 아니야. 내가 반을 덮치는 불상사를 만들지
말구려.]

장난스런 레베카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엘라우드는 싱긋이 웃으며 이레네를 레베
카에게 건네었다. 반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져 헛기침을 하고 있었고 은조는 말할 필요
없이 붉어진 얼굴을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

[아...죄송해요 레베카...난 그녀만 보면 흥분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요..그럼 이레네를 부
탁드릴 깨요. ]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은조를 끌고 기내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밖으로 레베카의 호탕한 웃
음소리와 반의 헛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은조는 토라진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나..나갈래요...모두 우리가 뭘 할지...알거야..]

그는 음흉하게 웃으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우리가....뭘...할건데...은조?]

그는 다시 물어 보며 셔츠를 바닥에 떨구고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난....모두들...놀릴거에요....부끄러워...]

[놀려? 누가 감히 레귀자모를 놀릴 수 있지? 은조...날 봐 부끄럽다니...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

그녀는 그의 말에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러자 그는 싱긋이 웃으며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
했다.

[부끄러울 필요 없어...우린 부부고...서로에게 너무나 빠져 있단 말이야. 이건 신혼 여행이야
당신이 건강해진 기념으로 떠나는...]

그녀는 그가 퍼부어 대는 감각의 홍수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그의 단단한 가슴을 손으로 가
볍게 쓸었다.
그의 손이 빠른 동작으로 그녀의 치마를 벗겨 내고는 간단히 안아 들고 침대로 같다.
그는 그녀의 꼭 감긴 두 눈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바보...이런 일에 부끄러워하다니...은조...날 봐..눈을 떠 당신이 보고 싶어. 어서.]

그의 꾸중하는 것 같은 어투에 간신히 눈을 뜬 그녀는 그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았다.
그의 밝게 빛나는 푸른 눈에는 그녀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싸안았다.

[사랑해요...엘...]

그의 눈에 긴장의 빛이 서리는걸 본 그녀는 의아했지만 그의 긴장된 반응을 무시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뺨을 만지더니 그녀의 입술을 스치듯이 지나가고는 그 뒤를 따라
입술이 내려 왔다.
그녀는 그의 목을 꼭 감싸 안고 입술을 열어 그의 따스한 혀를 끌어 들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고는 다정하게 가슴을 감싸쥐었다.

[은조....]

그녀는 그의 목에 두른 팔을 가슴 쪽으로 내리며 그의 단단한 가슴을 음미했다.
그의 숨가쁜 한숨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자신의 드러난 가슴을 그의 가슴에 살짝 밀며 그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바지를 벗어버린다고 정신이 없었다.

[엘....사랑해요..]

그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세찬 키스를 퍼부으며 더 이상 그녀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무아지경으로 이끌었다.

[그래...좋았니?]

놀리는 듯한 레베카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붉어져서 어쩔 줄 몰라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레베카는 깔깔거리며 의자를 뒹굴었다.
이레네가 잠든 방안에 나열된 신문을 보며 그녀는 인상을 썼다.
그가 이토록 유명한 사람일줄 몰랐다.
신문마다 그의 숨겨 놓은 아내에 관한 기사와 그녀와 아이가 비행기를 타는 스냅 사진이 원
거리 샷으로 찍혀 있었다.
가발 때문에 그녀는 멀리서 보기에는 금발 머리 여자 같이 보였지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임
을 알 수 있었다.
기사마다 최고 갑부인 그의 사생활과 과거 행적 그리고 아내에 대한 억지 적인 이야기가 가
득했다.

[무슨 생각해? 저런 쓰레기 때문에 마음 아픈 거니?]

[저...레베카....제가 레베카를 만났을 때...그에 대해 이야기 한적 있나요? 전 어떤 여자 였나
요...혹시...나쁘고 남자 등치는...그런 여자 아니었나요?]

레베카는 그런 그녀가 안타까웠다 누구보다 상냥하고 다정하던 은조는 한번도 그에 대해 이
야기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은조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불안한 은조의 마음에 더욱
가중한 압박감을 줄 것 같았다.

[엔젤...넌 상냥하고 착한 여자였어. 그리고 그에 대해 나에게 이름은 말한 적이 없지만 아이
의 아빠를 정말 사랑한다고 했단다. 넌 항상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했어 무슨 이유로 그와
싸웠는지 몰라도 난 너의 본명도 몰랐단다. 알면 아마도 그에게 연락 할 까봐 여서 그랬던
것같아.]

은조는 고개를 떨구며 다시 한번 신문을 보았다.

[난...두려워요...정말 이대로 기억이 안 돌아와...그에 대한 모든 걸 잃어 버릴 까봐...]

레베카는 은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엔젤...그는 결코 널 떠날 남자가 아니야. 그리고 그는 널 걱정하지 너의 지나 버린 과거에
연연하는 남자가 아니란다. ]

은조는 레베카의 말이 너무나 고마웠지만 한번씩 보이던 그의 차가운 모습을 생각하니...자
신의 탓인 것 같았다. 불안함...그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불안함이 그녀의 행복이라는 바다
안에 차가운 한류처럼 흐르고 있었다.

-23-

그는 전화기를 들고 뉴욕에 남아 있는 잭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곤히 자는 은조를 깨우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녀에게 수상한 이야기를 듣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노바 아가씨가 그쪽 집에 가셨다가 뉴욕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윤이 다시 교회에 들러
서 안부를 물었습니다. 우선은 실종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라는 우리의 말을 액면 그대로 전
한 것 같습니다.]]

엘라우드는 의자에 앉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뒤는]

[[윤은 자신의 일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탐정 사무실에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지시대로 했나?]

[[물론입니다. 그쪽 탐정 사무실에 익명으로 거액의 돈을 건네었고 그 탐정도 모든 조사를
접었습니다. 윤에게는 거짓 정보를 흘렸습니다. 아마 그는 영국 일대를 뒤지고 있을 겁니
다.]]

그는 이마를 문질렀다.

[영국 쪽의 일은?]

[[그 쪽에서도 이미 그의 감시망이 좁혀지면 다시 자리를 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잭의 확고한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조금 놓이는 기분이었다.

[거짓으로 유학 보낸 학생은 잘하는가?]

[[물론입니다. 학비를 대어주는 조건하에 확실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녀의 집에도 연락을 하는 거지?]

[[걱정 마십시오 한국 집에도 벌써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쪽도 안심하고 있습니
다.]]

[수고하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는 전화를 끊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려 그녀가 잠든 침실로 들어섰다.
언젠가 눈을 뜨고 그녀가 자신이 한 행동에 얼마를 원망 할까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라고
언제나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서 밝게 웃어주고 다정하게 그를 안아줄 때마다 그는 그녀의 기억이 영
영 돌아오지 않기를 기원했다.
거짓으로 그녀를 유학 보내고 거짓된 정보를 흘려 석현과 노바를 따돌리고...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와의 생활을 원했다.
병원 쪽에서는 그녀의 가장 큰 상처 부분에 모인 응혈이 풀리지 않고 있다며 현재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수술을 권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피 덩어리 때문인지...아니면 다른 요인인
지...그녀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엘라우드는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자신을 위해 돌아오지 않기를 원했다. 이기적이라고 욕해
도 좋았다.
어머니가 못다준 다정함을 그녀가 채워주고 그 이상의 사랑을 주고 있었다. 그에게는 진정
그녀가 필요하기에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바람대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음....당신 안 자요?]

그녀의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미소 지었다.

[은조...당신이 옆에 있으면...난 안 자도 잠이든 것 같은 몽환적인 상태야...]

그는 낮게 말하며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노바 어쩐 일이야?]

노바는 어색하게 웃었다.

[회사는...잘 되어가?]

석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팩스는 계속해서 신호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팩스 쪽으로 다가갔다.

//손님이 원하시는 자료를 찾았습니다. //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은조를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그는 재빨리 전화기로 달려갔다.
그의 급한 손놀림에 전화 버튼이 잘 안 눌러질 정도였다.

[무슨...일이야 석현씨?]

[은조를 찾았다는 군...있어봐...미안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은조를 찾았다....
은조는 좋은 여자인데...이다지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차라리 오빠가 먼저 찾기를 바라다
니...
그녀는 인상을 쓰며 자신을 책망했다.
은조를 사랑하는 석현을 더 이상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여전한
짝사랑에 안녕을 고하기가 이토록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요사이 바쁜 엘라우드 덕에 혼자 있을 시간이 많아진 은조는 딸아이가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날이 건강하고 귀여운 아이를 볼 때마다 자신이 그 아이를
가진 동안의 기억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그리고 그와의 사랑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 가슴아
팠다.

[나...아이 가졌을 때...행복해 했나요...]

레베카는 요즘 들어 우울해 하는 은조를 보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당연한 의문일
지도 몰랐다. 모든걸 잃어 버린 은조가 우울증에서 벗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은조의
마음속에는 안개처럼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고 있었다.
레베카는 은조의 머리를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행복해 했어...아이를 무척이나 원했단다. 아이를 위해 옷가지도 만들었는걸...]

은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가졌을 때의 자신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명백한 증거인 이레네가 있었다.
그녀는 궁금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그리고 정말..원했을까..라고..

엘라우드가 사흘만에 돌아오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는 그의 지쳐 보이는 얼굴을
안쓰럽게 보며 오두카니 서있었다.

[반갑지 않아? ]

그녀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키
스를 했다.

[미안 너무 바빠서...당신과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지 뭐야...미안]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그와 떨어져 있는 동안 그녀는 불안한 그림자와 홀로 싸워야 했다. 알지 못하는 과거가 그
녀를 괴롭힐 때마다 자신을 강하게 안아주던 이 팔이 그리웠다.

[엘...보고싶었어요...너무 그리웠어...]

그는 당장 그녀의 입술에 다급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꼭 잡고 그의 키스
를 받아 들였다. 그녀는 그의 호흡을 훔치며 그의 거친 혀에 부드럽게 자신의 혀를 감았다.

[은조..]

그는 간신히 이야기 하더니 거실을 둘러보았다.

[방으로 가자..여기는 좀..]

그녀는 얼른 그에게 떨어져서는 밀려 올라간 옷을 끌어내렸다.

[아...아니요...배고플 탠데..]

그는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더니 그녀의 팔을 쥐었다. 그녀는 그의 알 수 없는 눈빛에
빠져들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당신을 먹고 싶어...난 당신에게 굶주려 있어..]

그의 나직하지만 유혹적인 목소리에 그녀의 전신이 떨려 왔다.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려 바로 계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너무 어두워 주위가 보이지 않았다. 달리는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고동치고 있었다. 큰
유리창이 보이고...그녀의 등뒤로 어떤 남자의 어두운 영상이 보이는 순간 그 남자가 그녀를
들쳐 안고는 아주 아주 거대한 침대로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머리를 저으며 반항했지만 그 남자의 거친 손이 그녀의 옷을 찢어 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비명소리에 질려가고 있었다....그 남자..

[은조!]

그녀는 헉하고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자신의 앞에 어두운 남자의 형상이 서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은조! 나야 은조!]

그가 그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지만 그녀의 비명은 잠들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비명 지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얼굴이 백짓장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기억을 되찾은 것일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굴러 떨어지는걸 본 그는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은조..이러지마...은조...]

그의 품에 안긴 그녀의 비명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그녀의 몸에 약한 전율이 흘렀다. 두려움
공포로 마비된 그녀의 몸에 천천히 온기가 돌자 그는 그녀를 내려보았다.
은조의 흐느낌이 그의 귀를 찢어 놓을 듯이 울렸다.

[엘...나...무서워요...무서워.....내가....무슨 일을...당한 건가요...당신은 아나요...]

그녀의 흐느낌...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그녀의 볼에 입술을 댔다.
그녀는 흐느끼며 그의 목을 안았다.
엘라우드는 그녀에게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안도하는 자신을 느꼈다.

[아니야..당신에게 아무 일도 없었어....걱정하지만...모두 나에게 이야기하고...마음속에 두지
마...은조...울지마..]

그녀는 그를 올려보았다. 흐릿한 꿈처럼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어서 이 아름다운 남자를 떠난 걸까...그것도 아이를 가진 채..

[안아줘요..엘...안아줘요....날..모두 잊어 버릴 수 있게...]

그는 그녀의 입술에 깊은 입맞춤을 하며 그녀를 망각의 세계로 이끌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정열로 그녀를 품으며 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녀를 놓
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24-

갑갑한 하늘을 보며 그녀는 인상을 썼다.
영국에 도착한지 일주일..그는 회의를 참석하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디트로이트의 집이 그
리워지고 있었다.

[레베카...집에 가고 싶어요...]

레베카는 이레네가 자꾸 물건을 안고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미국을 떠난 지 이미 1년째였다.
이미 이레네는 나이를 한 살 먹었고 애법 아빠라는 소리와 엄마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구...워낙에 바쁘니..가자는 말도 못하지...그의 마음도 이해해야지 얼마나 널 때놓고 싶지
않으면 이렇게 대리고 다니겠니.]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를 잠시만 안 봐도 몹시 불안해 했다.

<내가...도망 쳤기 때문이야....그래서 그가 날 못 믿는 거야...>

그녀는 우울하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는 하늘을 보았다.

[오늘은 어떻게 지냈어?]

그가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녀는 볼이 부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묻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디트로이트의 집으로 가고 싶어요.]

그는 그녀의 말에 인상을 섰다.

[나랑...떨어지고 싶어?]

그녀는 심하게 도리질을 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그를 보았다.

[당신과 떨어지는 건 싫어요...하지만...집이 그리워요...호텔에 있기만 하기에는 너무...나의 공
간이 없어요..]

그는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녀를 품에서 풀어내고는 호텔의 창가로 가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못할 말을 한 것 같아 그를 불안한 시선으로 보았다.

[피곤하군...]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 처음으로 혼자 샤워 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그 자
리에 서 있었다.
그가 화가 난 거야...그가...
그녀는 떨리는 다리로 소파에 가서 가만히 주저앉았다.

그는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 꼭지 아래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 그녀가 미국에 가 있다가 노바나 다른 이
를 만날 까봐 불안한 그의 마음이 그녀에 대한 짜증으로 표출되었다. 그녀가 얼마나 겁먹을
지를 생각하자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째서 항상 일을 이따위로 만드는 것인지...
그는 샤워 기를 끄고는 타월로 몸을 닦고 머리도 털어 버린 후에 욕실에서 나왔다. 침대에
보이는 자그마한 영상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파고 들어왔다.

[은조..]

흔들리던 영상이 갑자기 긴장을 하더니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미...미안해요...난...]

그는 그녀의 겁먹은 모습에 마음이 상해서 그녀에게 다가가 단호하게 입술을 겹쳤다.
그녀는 그에게 입술을 열어주며 그의 넓은 등을 껴안았다.

[당신을...나와 떨어트려 놓기..싫어...내 마음을 이해해 줘..]

그녀는 그의 다급한 손길에 옷이 벗겨지는걸 느끼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은조는 그가 이러는 것이 자신이 떠난 뒤에 나타난 스트레스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약
간은 성급한 애무를 받아 들였다.

[사랑해요...엘...사랑해요..]

그녀가 그의 귀에 쏟아내는 밀어를 들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으스러져라 끌어 안고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이마에 이
마를 댔다.

[은조...]

그녀는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미소지었다.

[알아요...말하지 않아도...내가 못 미덥죠? 당신을 떠나버린 내가...미안해요..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한다는 것 알아요...미안해요 엘..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꺼에요..]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녀를 그렇게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석현의 아내가 되는 그
녀를 용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대한 결혼식으로
그녀를 기쁘게 했을 것이다.

[은조..미안한 사람은 나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아니요..날 찾아 준 걸요...날 사랑해 준 걸요..날..부족한 날..아내로 맞아 준 걸요..]

그는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의 매끈한 허리를 더듬어 내려가는 그의 손길에는 절박함
이 묻어있었다.

[은조...두번 다시..날 떠나지마...부탁이야...]

은조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안 떠나요..내가 어딜 간다고..]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그가 섭섭도 하지만 자신이 그에게 그런 상처를
줬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여기는...]

그녀는 커다란 정원이 딸린 대저택을 보며 그를 돌아보았다.

[마음에 들어? 아직 끝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어서...그런데 당신이 혼자 있을 공간을 원하
니까..그리고 우리 이레네 에게도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어차피 출장도 자주오니..집
을 한 채 장만했어 마음에 들어?]

그녀는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보았다. 동화책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집이 그녀의 발아래 있었
다.

[다음에는 어떤 일로 날 놀라게 할지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 그를 보며 말했다.

[아직..일년정도 집으로 갈 수 없어...영국에도 일이 남아 있고 ]

그녀는 그의 팔에 매달려 그를 보았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한동안 보던 그는 자신도 모
르게 그녀의 뺨으로 손을 올렸다.

[흠흠...그만 멈추게...반과 난 어쩌라고 자꾸 이러누..]

반은 민망한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레베카는 눈을 부라리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싱긋이 웃더니 보란 듯이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레베카의 인상이 심하게 일그러졌고 반은 아예 집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만...해요..엘라우드..안 그러면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거야..]

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감아쥔 그녀의 손을 보았다.

[내 머리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뿐이야...]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뺨에 키스했다.

[고마워요.]

[너무 돈을 물 쓰듯이 하는군...이런 집이 몇 채인지...]

레베카는 혀를 차며 이야기했다.
은조는 고개를 들어 레베카를 보았다. 이미 집에는 그녀의 물건이 가득했다. 레베카의 옷가
지까지 완벽한 집을 보며 레베카는 아까부터 불만을 토하고 있었다.

[마음에...안 들어요?]

레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가 어디 있어....단지...이런 성이 몇 채나 되니 낭비 같다는 거지...말로
는 뉴욕에 한 채...영국에 한 채...프랑스에 한 채..샌프란시스코에 한 채...거기다 펜트하우스
만해도..]

그녀는 인상을 쓰며 레베카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는 이레네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레베카를 돌아보았다.

[그가...이 집을 장만한 것이 저 때문이라는 말 같아요..]

[당연하지..네가 파리를 같고 싶다고 하면 사주고도 남을 사람이다. ]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레베카를 보았다.
레베카가 툴툴거리는 이유를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반은 회장의 차가운 얼굴을 보았다.

[노바님이 이곳에 오신다는 전갈입니다.]

[누구와..]

[에...윤 이라는 군요.]

[뭐 때문에]

엘라우드는 건조하게 말하며 서류를 넘겼다.
반은 그런 그의 동작이 나른하게 느려지는걸 보며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우리 쪽에서 주식에 손을 댄다 는걸 아시는 것 같습니다.]

[바쁘다고 해. 만날 시간은 내년쯤에나 있다고..]

엘라우드는 일어나 주위를 서성였다. 그러다 문득 멈추어 서며 반을 보았다.

[꽃은?]

[보냈습니다..]

엘라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의자에 눌러 앉았다.

[반...그 자가 아직도 아내에 대해 알아보고 있나?]

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우드는 욕설을 내뱉으며 팬을 던져버렸다.
반은 그의 차가운 눈을 한동안 보았다.

[오늘은 그만 들어간다. 아내에게는 알리지 말어.]

[알겠습니다.]

엘라우드는 회사를 나서며 생각에 빠졌다. 그때는 그녀를 납치해서 끌고 다녔는데...
우스운 생각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노바라는 짐을 지워준 어머니가 야속하기도 하고 노
바를 재대로 보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은조가 너무나 보고싶었다. 자신의 모든 것...그리고 자신의 살아 있는 약점..

-25-

멀리 보이는 그의 차를 보던 그녀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며 인상을 썼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늦게..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녀는 차에서 위험한 걸음으로 내려서는 엘라우드를 보며 당혹함을 느꼈다.

[엘..]

그는 약간 흐트러진 호흡을 불안정하게 내쉬고는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은조...내. 아내..]

그녀는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에 놀라며 그의 뒤에선 반을 보았지만 반의 얼굴은 여느
때 처럼 무표정 할 뿐이었다.
그녀는 엘라우드의 어깨를 받치며 그와 집으로 들어갔다.
레베카는 잠이 들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녀는 선뜻 나서는 반을 보며 고마움의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의 도움으로 방까지 무사
히 올라갔다.

[무슨..일이 있어요?]

반은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은조는 눈을 감고 소파에 주저앉아 있는 그를 한동안 보았다.

[고마워요. 반 수고하셨어요.]

반은 조용히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이렇게 술을 마시다니..그 답지 않다.

[은조...]

그녀는 엘라우드의 옆에 앉아 그의 재킷을 벗기며 그를 보았다.

[당신은...누구지....]

그녀는 약하게 들리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당신을 만난 5년여간....난..당신 아닌 다른 사람을...생각한 적 없어....]

그녀는 그가 처음으로 자신과의 만남을 이야기 한다는 걸 알고는 바짝 긴장해 그의 비웃음
이 서린 얼굴을 보았다.

[왜...하필 당신 이였을까....]

[날..어떻게 만났어요...엘...?]

그는 웃으며 그녀의 뺨에 손을 올렸다.

[공황에서...그리고..납치했지..바로 5년전 오늘...]

그녀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2년간 당신을 피했어...왜인지..알어? 훗....당신이..너무....좋아서...내가...차지할까봐...겁
났어...동생도 버리고...당신을 뒤따를까봐....]

그는 그녀의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한동안 말을 끊었다. 그리고 가벼운 키스로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당신이..탐나서...죽을 것 같았어...잊어 본적 없었지..내 여자가 될 수 없는 당신을....너무...다
정해서...]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왜...오늘..인가요...]

그는 그녀에게서 손을 대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엘?]

[오늘이...어머님 기일이야...내...나이가 몇인지 기억나? 아니..모르지...난 올해로 서른 다섯이
야...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이십 육년이지...]

그녀는 그가 침대에 아무렇게나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다가가 구두를 벗겨주고는 그의 셔츠를 크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돌아가셨어요..아버지는...]

[아버지..말도 하지마...지겨우니까....어머니가 돌아가신 건...나 때문이지만...내가 그렇게 된건
아버지의 탓이니까....]

그녀는 그의 공허한 목소리에 마음이 아파 그를 올려보았다.

[난...철부지 바보였어...경호원 따위..따돌려도 상관없는 존재로...나하나 살리려고 하다가..반
의 아버지랑 내 어머님이 동시에 사망했어...우습지? 겨우 아홉 살짜리 하나 구하려고 성인
둘이 죽다니....]

그녀는 그의 자조적인 말에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엘....]

[아버지는 상권을 위해...폭력과 사기를 일삼으셨어..그 덕에 우리 가문은 날로 더 번창했지..
그런 아버지의 최대 약점은 바로 나였어....후계자라고 온 사방에 떠드셨고..아버지의 사업에
앙심을 품은 자들은 날 없에버릴 계획을 새운 거지..경호원에 둘러싸인 날 죽인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망나니인 내가 경호원을 따돌린 것이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한 꼴이었지...순
식간에 일어났어. 날 감싸신 어머니와 반의 아버지의 얼굴이 스친 것은...그 이후는...말 안
해도 알지? 바보스러운 아들 덕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어린 여동생은 졸지에 고아아닌 고
아가 된 거야.]

그녀는 그의 씁쓸한 말에 눈물이 어렸다.

[어머니의 유언은 내게 동생을 부탁한 거였고....아버지는 딸아이 따위..필요 없었어...그런데
말이야..알어? 내 아버지라는 자..내게 뭐라고 한지...어머니가 죽고 내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했어...내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그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지만 그녀는 그가 너무나 상처로 얼룩져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은조...당신이..날...어떻게 만들었는지 알어? 당신이 아니면...난 얼어죽을 것 같아...영원히 당
신을 숨길 수 있다면..당신을 영원히 내 옆에만 둘 수 있다면 난 못할 짓이 없어...내 어머니
의 유언 따위 무시해도 좋을 만큼...당신을 원해 당신이 내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야....]

그는 그녀의 젖어드는 눈을 보았다.

[내가...어떤 짓을 했는지 알게 된다 해도....날 사랑할 수 있을까...응...은조...]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그 손에 뺨을 부볐다.

[당신이..어떤 잘못을 했다해도...떠나지는 않아요....당신 없이 살수 없는 사람은 나니까요....
사랑해요 엘....]

그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은조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엘....내년에는 저와 함께..어머님을 찾아가요...그렇게 해줄 거죠?]

[....그래...]

잠긴 목소리....그리고 한숨..그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사랑해.....정말...사랑해..은조...]

그녀는 처음 듣는 그의 고백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가 자신을 용서한 것이
다...그녀는 그의 머리를 꼭 안으며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검은 차...공포에 질린 자신의 얼굴...그리고 그의 등...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가쁜 숨을 쉬었다. 언제나 자신을 그림자처럼 죄어오는 두
통에 그녀는 짧은 호흡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고 후유증이지만 그가 걱정할까봐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그에게 말 안한 한가지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헝클어진 긴 머리를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트리며 무방비 상태의 그를 보았다.
그의 고백대로라면 그녀와 그가 만난 건 5년전이였다. 그녀는 침울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나
이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과연 그가 말한 나이가 정말일지도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아는 건 그가 자신을 찾아온 것과 그의 아이를 그녀가 낳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속눈썹을 손으로 살짝 어루만졌다.
그의 아내....
하지만 왠지 모를 공허...
정말 그들은 사랑했을까....
은조는 엘라우드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무거운 눈꺼풀사이로 햇살이 내리 비치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침실은 비어있었다.
언제나 처럼 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재빠르게 시트를 걷어차고 일어나 방안을 돌
아보았다.

[은조!]

그는 거친 음성으로 그녀를 부르며 방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욕실의 문이 열리며 창백한 그녀가 보인 것은...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프면 말을 했어야지!]

그는 서둘러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로 대리고 갔다.

[내가...괴롭힌 거야?]

그녀는 그의 안쓰런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는 미소지었다.

[내...당신 때문이에요....당신이 날 아침마다 괴롭게 해요...]

그는 움찔해 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뺨에 입술을 댔다.

[하지만 기뻐요...아침마다 괴로워도...그리고 당신이 기뻐할걸 생각하면....]

그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임신했어요 엘...당신과 나의 아이를....]

그의 표정에 만가지 행복이 지나고 있었다.

[은....은조.....난....]

그녀는 웃으며 그를 보았다.

[요 며칠 아파서....레베카에게 물었더니 시약을 사다주었어요. 임신이라고 나오는데...오늘 나
랑 병원에 가줄꺼죠?]

그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다정한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웃으며 행복으로 마
비된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는 자신에게 너무나 큰 행복을 안겨준 여자를 꽉 껴안았다.
빼앗길 수 없는 여자였다. 자신만의 여자...

-26-

병원 안에 둘러싼 자신의 경호원들 사이에서 한동안 우물거리던 엘라우드는 이렇게 초조해
보기 처음이었다. 그저 확인하는 것뿐이데 이렇게 떨리고 초조하다니...
진단실의 문이 열리고 수줍은 미소의 은조와 그녀의 의사가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 들어오
라는 말을 했다. 그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달음에 안으로 들어갔다.

[축하합니다 레귀자모씨. 곳 아이의 아빠가 되실 것 같군요.]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의사와 은조를 보았다.
은조는 인상을 살짝 쓰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엘?]

그제야 정신이 든 그는 의사가 보던 말던 그녀를 힘주어 당겨 안고는 뜨겁게 키스를 퍼부었
다. 그녀는 버둥거리며 그를 밀쳐내고는 그의 품에 얼굴을 숨겼다.

[부끄러워요....]

그녀의 수줍은 말에 그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은조를 한 팔로 안은 체 의사
에게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감사합니다. 바쁘신 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의사는 불꺼진 다른 진찰실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최고의 부를 가진 남자가 이렇게 작은 여자 하나 때문에 병원전채를 예약하는 이기적인 모
습을 보이다니...

[아닙니다. 제가 영광이지요 미스터 레귀자모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게 어디 가능한 일입니
까. 특히 저 같은 산부인과 의사는요.]

의사의 말에 품에 안긴 은조는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그런 그녀를 더욱 꼭 안으며 미소지어 주었다.

[그런데...부부관계를 가지면 문제가 될까요?]

의사는 씨익 웃으며 엘라우드를 보았다. 조금은 뻔뻔한 엘라우드의 질문에 은조는 얼굴을
붉히고 그의 가슴을 때려주었다.
의사는 간단한 설명을 해주며 그에게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밖에서는 경호원들이 그녀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주었고 그에게는 축하의 말을 해주었다.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라 그저 고개를 숙이고 인사만 할뿐이었다.
차에 어떻게 올라탔는지 기억도 안날 정도로 허겁지겁 올라탄 그녀는 차가 출발하자 그를
휙 노려보았다.

[어떻게...그...그런 질문을 해요?]

[왜?]

그가 능글 거리며 그녀를 보자 그녀는 화가 난다는 듯이 발을 굴렀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
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녀를 꼭 껴안았다.

[너무 이쁜 은조...뭘 원하는 거야. 내가 오늘은 뭐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그를 올려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는 앞에 타고있는 경호원이 보던 말던 상관
없이 그녀의 조그마한 입술에 입술을 포개고는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가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도 그의 목을 팔로 휘감고는 그의 요구대로 그를 받아 드렸다.
그는 한동안 키스에 열중해서 경호원이 헛기침으로 그의 주의를 돌리려고 하는 것도 눈치채
지 못했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때었다.

[무슨..일이지?]

그는 쉬고 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손으로 가리고는 그를 올려보았다.
그의 눈은 짜증과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반의 긴급전갈입니다.]

그의 인상이 돌연 차가워지자 그녀는 흠칫해 졌다. 그가 화내고 있어....
그녀의 머리속에 혼란스러운 그림이 지났다. 어두운 집에 서있는 그의 차가운 얼굴...그리고
덜면서 울고 있는 자신....
뭐지....
그는 전화기를 받아 들고 한동안 가만히 이야기를 듣더니 거칠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엘라우드? 무슨...]

그는 가만히 창 밖을 보더니 그녀의 불안한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니. 귀찮은 손님이 집으로 오고있다는 군...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중이야.]

[음...만나기 싫어서 그래요? 그들이 오면 당신이 또 멀리 출장가야 하는 거예요? 난..싫은
데...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은 걸요.]

아이처럼 슬픈 표정을 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우리 그들을 피해 도망갈까?]

[도망?]

그녀가 어리둥절한 듯이 그를 올려보자 그는 미소지으며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기다려봐 당신에게 멋진 밤을 선사하지.]

그녀는 입을 벌리고 배에 올라탔다.

[여..여긴...]

[전화로 바로 출항 할수 있게 해뒀어. 그들은 얼마간 내 얼굴도 못 볼 거야. 물론 당신도.]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여객선을 통째 빌리다니....

[엘라우드...]

그는 그녀의 입술에 소리날 정도로 키스해 주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차 한대가 서더니 이레네를 안은 레베카와 경호원들이 반과 함께 내렸다.
그들은 트렁크에서 그녀와 그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을 배 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뭔 일이누? 이구...정신없어....사진앨범까지 가지고 다니는 가족은 자네들 뿐 일거
야!]

레베카는 머리를 흔들며 투덜댔지만 그녀의 눈은 난생처음 타보는 호화 유람선에서 떠날 줄
을 몰랐다.
그들이 올라타고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들 무렵 그들은 출항을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 배는 본디 크루즈 여행용이지. 아마 이스탄불과 그리스 에게해를 돌게될 거야. 당신의
배가 불러오기 전에 에게해는 때 버리자고. 더 많은걸 보여주고 싶지만...우리 아이가 태어나
면 그때 다른 곳을 안내할게. 당신과 우리아이를 위해.]

그는 그녀에게 와인 한잔을 건네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
으로 그가 내민 와인잔을 쥐고 가볍게 글라스를 부딪쳤다.
그녀의 옆으로는 이레네가 바다에 감탄한 체 연발의 비명을 울리며 늙은 레베카를 운동시키
듯이 불안하게 뛰어 다니고 있었다.

노바는 집에 아무도 없는걸 확인하고도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육아 방과 완벽하게 배치된 가구로 보아 분명 이 집은 오빠와 그 아내가 머물던 집 이였지
만 어찌된 영문인지 엘라우드는 사라지고 없었다. 거기다가 기약 없는 여행이라니...오빠가
이런 사람인지는 몰랐던 그녀였다.
노바는 석현과 함께 집을 둘러보다 한숨을 쉬었다. 석현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엘라우드가 보
유한 그의 회사의 주식을 사기 위해서였지만 석현의 연락에 엘라우드는 한번도 답이 없었
다.
석현은 유심히 가구 하나 하나를 보다가 충격을 받은 듯이 집을 둘러보았다.

[너무...이상해...이건 마치....]

[마치?]

석현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은조가 꾸민 것 같아...그녀가 결혼하기 전에 이야기하던 집 같아...이상하지...저 가구...그리
고 이 양탄자...모두 너무 고가라서 구입할 수 없다며 투덜거리고 그리고는 비슷한 물건도
많다며 웃곤 하던 그것들이야...벽지 색도...그리고 커튼 색도...]

그의 얼떨떨한 말을 듣던 노바는 침을 삼키며 이것이 우연일까를 생각했다.

[하지만...은조는 지금 다른 나라에 있다고 들었어...이상하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석현의 눈에도 의심이 가득했다.
아직도 찾고는 있지만 이제는 거의 포기상태에 있던 그였지만 이렇게 은조와 너무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자가 엘라우드의 옆에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그만 가지...반과 연락을 해야겠어.]

노바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의심을 묻으려는 듯이 환히 웃었다.

[오빠...은조씨 좋게 생각했잖아. 그러니 비슷한 여자에게 끌린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석
현씨.]

하지만 석현은 노바처럼 태연할 수 없었다.

이상한 마음...그리고 뭔가 허전한....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뺨을 닦으며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엘라우드의 약한 신음소리를 들
으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흐른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마음속의 암흑에는 어떤 다른 사람이 떠오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남자의 영상...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그녀에게 뭔가
를 설득하기 위해 이야기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을 부르던 것도...
그 사람은 누구일까 친오빠? 아니..그녀는 고아였다고 그가 말했다.
은조는 불안한 시선으로 어두운 방안을 보았다.
혹시 그를 떠난 동안 부정한 짓을 한건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는걸 그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모두가 뒤죽박죽이라
그가 그녀를 떠날까봐 겁이 나서였다.
차라리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꿈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은조..]

엘라우드의 탁한 목소리에 그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깬 그가 두리번거리는 모습
에 그녀는 얼른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카락이 등으로 흘러내리며 그의 몸과 대조를 이루었다.

[어디 있었던 거야?]

약간의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그녀는 웃어 보이며 그의 목을 안았다.

[잠이 깼어요..그래서 당신 깰까봐....]

그는 그녀를 품에 꼭 안고는 다시 침대로 쓰러지듯이 누웠다.

[당신이 내 품에서 벗어나면..난 정말 잠에서 깨게 된다구...그러니..그냥 내 품안에 있어..]

그는 줄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더니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꼭 안겨 정말 아무기억도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가 자신에게 실망할까봐 그녀는 너무나 두려웠다.

-27-

그는 계속해서 인상을 쓰며 전화기를 들고 돌아다녔다.
반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며 다음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왜...그자가 주식을 찾으려고 그렇게 안간힘이지?]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 그자가 지긋지긋해...만약 아버지 세대였다면 없애 버리고 말았을 거야...]

엘라우드는 이빨사이로 밀어내듯이 이야기하며 항구 저쪽을 보았다. 작은 보트를 탄 그의
아내가 딸아이와 함께 이국적인 정취를 즐기러 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설마..그러시진 않을 것 아닙니까?]

엘라우드는 차가운 눈으로 반을 보았다.

[아니...그럴 수 있다면 죽이고 싶어...내 눈앞에서 영원히..지워버리고 싶어.]

반은 엘라우드의 표정을 보며 그가 진심을 말한다는 걸 알았다.
엘라우드는 재빨리 다른 몇 곳에 전화를 하고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노바에게 가는 자금줄을 끊어..그러면 아무리 노바라고 해도 더 이상 그를 도와주지 못할
테지...나가고 싶으면 나가라고 해...더 이상 내 안에 부어 터질 상처를 끌어안고 있지 않겠
어.]

반은 조용히 일어났다.

[분부하실 일은 그것 뿐 입니까?]

엘라우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쪽도 한가하게 사람 찾아 여행 못 하게 바쁘게 만들어.]

반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대기중인 보트로 내려갔다.
그는 한동안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이 싫었다. 만약...그녀와 그들이 만날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놀라서 일어
날 지경이었다.

[엉? 반이 떠나는군...무슨 일이지?]

이레네가 뛰지 못하게 잡고있던 은조는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보트를 보았다.
레베카가 몸을 앞으로 쑥 내밀자 경호원이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후덥지근한 더위를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급한 일이 있나봐요..음....그가 간게 아니면 좋을 건데...]

은조는 섭섭한 마음에 멀어지는 보트를 보았다. 그리고 요트를 보던 그녀는 방긋 웃었다. 난
간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긴머리를 보는 순간 자신의 남편이 아직도 그곳에 있다는 걸 알았
다.

[엘라우드는 있어요.]

[이구...저 웃는 얼굴을 봐...그렇게 좋아? 매일 붙어살면서...]

그녀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레베카를 보았다.
그녀는 보트가 안전하게 다이자 먼저 위로 올라갔다.

[이런...조심해야지..나의 주니어를 가진 사람이.]

그의 느긋한 목소리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느끼며 그녀는 방긋 웃었다.
이레네가 아빠를 외쳐 불러대자 그는 손을 벌려 딸아이를 안아들었다.

[이레네..내 사랑하는 아기..]

그는 속삭이며 이레네의 통통한 뺨에 입술을 눌렀다.
이레네는 자신이 아는 몇 가지 단어로 열심히 오늘 본 것을 설명했고 그의 입술에는 편안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멀어지는 작은 보트를 불안한 시선으로 보았다. 반도 빨리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과
재발 큰일이 아니라 그가 계속 머물러 주길 바라고 있었다.

[말도 안돼요..오빠가...]

노바는 고개를 저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잭을 보았다.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쓸데없는 투자로 인한 손해까지 책임지실 수 없다는 회장님
의 명이신 지라...]

노바는 기가차 반을 보았다. 반은 아무표정 없이 그녀에게 이야기하고는 서류를 내밀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남겨주신 주식이 있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죠?]

[노바님. 이미 그 주식중의 일부를 시장에 파셨지요? 그렇게 거금을 주고 살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노바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빨리 팔린 매물...그것은 석현의 회사 설립자금으로 그녀가 변통
해 주고 그 회사의 주식을 받은 것이었다.

[더 이상 노바님이 레귀자모 일원이길 거부하신 다면 그분도 더 이상 잡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기가 몹시 불편하시다 고요. 노바님 한 명 때문에 신진 사업가
한 명을 사장시키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회장님이 어떤 분인걸 잊어 버리지 마시길 바랍니
다.]

완곡한 압력에 노바는 손끝이 저려 왔다. 한번도 오빠인 엘라우드가 그녀에게 이토록 매정
한 적이 없었다.
비록 삐뚤어진 관심으로 그녀에게 삐딱하게 굴기는 했지만 이토록 그녀의 사지를 끊어버리
지는 않았다.

[오빠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 듣겠어요.]

반은 장갑을 끼며 피식 웃었다.

[그분을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전 그분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렸습니다. 그럼.]

노바는 인사하고 멀어지는 반을 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실질적인 좌천...그녀는 더 이상 임
원도 아니고 명목만 유지하는 이사일 뿐이었다.
무엇이 오빠를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인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은조는 검은 물을 한없이 보고있었다.
예전에...어딘가 에서 바닷물을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때는 너무나 슬프고...아픈 마음에...

[은조?]

긴장한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엘라우드의 긴장한 얼굴을 올려보았다.

[뭘...생각하는 거지?]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아...아무 것도...그냥...]

그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뭘 숨기는 걸까...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고는 밤바다를 보았다.

[은조...나에게..못 할 말이라도 있나?]

은조는 당황해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보았다.

[아..아니에요...단지....]

[단지?]

그녀는 쓸쓸한 눈으로 바다를 보았다.

[모르겠어요...요즘 문득...아..나도 이렇게 했었지..하는 생각이 들어요...예전에 밤바다를 보며
무척이나 슬퍼했던 기억에...모르겠어요...강인지 바다인지도..]

그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다른...기억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어두웠다.

[그리고....누군가..날 야단쳐요...모르겠어요...미안해요..난..]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는 바다를 노려보았다. 병원에 가봐야 할 때이다...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그녀의 기억이 돌아올 시기가 아니었다.

[너무..과거에 매달리지마...난..이대로의 당신이 좋아...애쓰지마..]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처음으로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가 기억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그가 뭔가를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침대에 잠든 그녀를 보는 그의 눈은 어두웠다.
뭔가를 자꾸 기억해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질려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그는 술을 한잔 따라 마시며 인상을 썼다.
오히려 집에 있고 그녀가 안정을 취한다면 기억을 못할까...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등으로 흘러내린 체 아이처럼 잠든 그녀를 보는 그의 손에는 힘
이 들어갔다.
어떻게 차지한 그녀인데...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었다.
그녀 없이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이란 있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노바도 윤도 다가 올 수 없게 만들고야 말리라...
엘라우드는 술을 단숨에 마시고 잠든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부드러운 등에
입술을 눌렀다.

[엘..]

졸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래....당신이 부르는 사람이 나야..은조..내 아내..]

그는 그렇게 말하며 피곤한 듯이 눈을 감고 안기는 그녀를 깨우기 시작했다.

-28-

디트로이트의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뛰지마 은조. 넘어지면 책임 못져.]

그녀는 움찔한 듯이 멈추더니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쥐고는 자신
의 배에 올렸다.

[봐요 아기도 기뻐해요. 휴...오랜만에 집에 돌아온걸 축하해요 내 남편씨.]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녀는 이미 임신 마지막 달이었다.
정기검진을 위해 간간이 의사들이 후송되어 오곤 했지만 이번 임신에서 그녀는 입덧도 그렇
게 길게 하지 않고 잘 자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처음 그들의 아기사진을 초음파로 받은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너무나 신기한 순간을 선사해준 그녀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 될 정도 였
다.

[예정일이 언제지?]

그녀는 손을 꼽아 보았다. 그러더니 씩 웃었다.

[아이가 빨리 보고 싶어서예요?]

그는 피식 웃고는 그녀의 귀에 낯 뜨거운 말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얼굴을 금세 곱게 물이
들더니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요즘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고는 몹시 즐거워 하고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아내를 놀
리는 일이었다.

[또.....날 놀리는 거죠? 코끼리 같은 부인을 놀리면....뭐가 재미있다고...]

그녀는 핑핑거리며 그에게 멀어지려고 했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코끼리라니...세상에 이렇게 쪼그마한 코끼리가 어디 있어? 미니 하마
라면 모를까.]

그는 웃음을 참으며 억지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양주먹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으며 쇼파로
쓰러지고 말았다.

[엄마..아빠 때리지마.]

죽어라 아빠 편을 드는 이레네를 보며 그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이제 울기까지 하는 이레네
를 곤란한 얼굴로 바라보는 은조를 보던 그는 이레네를 번쩍 안아들었다.

[이런..울지마 아가야 설마 엄마가 진짜 아빠를 죽이려고 했겠니?]

[엘라우드!]

그는 킬킬거리고는 어린 공주의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유독 엘라우드를 따르는 이레네는
엄마는 하나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며 그녀는 투덜거렸다.
그는 딸아이를 꼭 안고는 그녀를 보고 거만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우리 아들을 낳으면 당신 편으로 만들라구. 난 아군이 든든하거든. 그렇지 이레
네?]

그녀는 뒤 돌아서며 또랑또랑하게 이야기했다.

[당신 많이 변한 것 알아요? 처음 만났을 때는 웃지도 않던 사람이...장난까지 치다니....]

그녀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뭐라고 한 거지를 반문하며...
그녀는 등돌리고 서있어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걸 보지 못했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바삐 회의실로 향했다.
반은 여느 때처럼 그를 동행하며 그의 뒤쪽에 서있었다.

[무슨 문제지?]

[문제가 아니라...합병 건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

[어느 회사?]

[그곳 회사 사장이 곳 올 겁니다.]

그는 탁자를 손톱으로 톡톡 치며 반이 건넨 서류를 보았다.
원하던 것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지긋지긋한 거머리를 제거하는 순간...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석현을 보았다. 이미 6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은조와 얽힌
일들....그는 잠시 눈을 내려떴다. 이자가 아니었다면 은조를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사랑도 모르고 지나갔겠지...

[오랜만이군요 회장님.]

그는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석현을 보았다.

[그렇군...오랜만이지.]

그는 석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곳 협상에 돌입했다.

석현의 마음속에는 이자의 알 수 없는 꿍꿍이가 안개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근 5개월 동안
그의 회사를 압박해오며 그를 눈코 뜰 수 없게 만들어 놓았고 회사에서 노바 마저 잘라 버
렸다. 노바는 석현이 설립한 S.R엔터프라이즈의 중역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녀 또한 너무
바빠서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자만 아니었어도 은조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거란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리고 엘라우드의 미묘한 변화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자는 은조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작은 목소리...
그는 눈을 내리뜬 엘라우드를 한동안 보았다. 세월은 석현에게만 흐른 듯이 엘라우드는 여
전히 그대로였다. 이미 서른 여섯의 나이인데....엘라우드는 누가 봐도 삼십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였다. 석현은 쓰게 은조의 나이를 생각했다. 이제 스물 아홉인가...그는 그녀가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라....난 경영진중 일부를 자르고 싶고 그쪽은 그럴 수 없다....]

엘라우드는 비꼬는 어투로 말하고는 싱긋이 웃었다. 저 미소는 예전에도 종종 본적이 있었
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석현의 회사를 박살내려고 하고있었다.
그때였다. 반이 갑자기 전화를 받고는 그에게 빠르게 귓속말을 했다. 엘라우드의 얼굴이 순
식간에 굳어지더니 벌떡 일어났다.

[오늘회의는 이것으로 마친다. 다음으로 기회를 잡도록.]

엘라우드는 모두에게 명령조의 말을 남기더니 바람처럼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생전에 엘라우드 레귀자모가 뭔가에 쫓기듯이 뛰어나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레베카. 은조는요?]

레베카는 초조한 듯이 들어오는 그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맙소사...예정일보다 한 주나 빠른데....]

엘라우드는 어쩔 줄 몰라하며 병원복도를 서성거렸다.
병원복도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할 정도의 경호원이 깔려있었다.
이레네가 우는소리에 정신을 차린 엘라우드는 이레네를 꼭 안았다.

[어..엄마가 아야야했어...엄마 막 울었어...아프데...]

그는 어쩔 줄 몰라하며 이레네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괜찮아 이레네..엄마는..]

하지만 그도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이레네에게 설명은 무리였다. 그는 이 복도에 서자 지난
번 그녀의 출산이 생각나 악몽 같았다.

[걱정마 이번에는 그래도 달수는 채우고 나오는 거니까. 이구...식구들 알면 난리 나겠군...그
래..이번에는 친구들 불러 파티 하게 해줄 거지? 모두 궁금해 한다구.]

그는 레베카의 말은 건성으로 들으며 수술실 문을 보고있었다.
이미 실려 들어간지가 언제인데...아직도 진통중이라니...심장이 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구...이틀을 진통하는 여자도 있어...너무 조급해 하지마. 우린 은조가 아야 소리하자마자
실어 왔어. 그러니 오래 걸리는 것이 당연해.]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걸 느끼며 품안의 이레네를 더욱 꼭 안았다.
한시간 정도 흐르자 의사가 그를 찾았다. 그는 이레네를 레베카에게 넘기고는 의사를 따라
들어갔다.

[자. 레귀자모씨. 어린 레귀자모 군입니다.]

그는 소독가운과 장갑을 낀 채 은조의 피곤한 듯이 보이는 얼굴을 보았다. 여리게 울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은조뿐이었다.

[엘...아기가 이뻐요...봐요....내 아군이라고요..]

그녀의 약간은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
았다. 아기는 금방 씻겨 빨갛고 쪼글쪼글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세상 어느 아기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아이였다.

[은조...난..]

그는 목이 매여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가 간호사에게 부탁해 넘겨주는 아이를 안았
다. 아기는 처음으로 눈을 뜨고는 아직은 뿌연 눈으로 그를 보는 것처럼 한동안 있더니 이
내 눈을 감고는 칭얼거렸다.

[내...아들...]

그의 목에서 자신이 들어도 나약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감
돌아 이었다.

[은조..고마워....너무나..]

그녀는 그의 그 한마디에 산고가 확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아기보다 자신
을 먼저 찾아준 것이 그녀는 너무나 고마웠다. 아이보다 사랑 받는 존재라는 기분에 약간은
쑥스러운 기분...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사랑해 은조...사랑해..]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곳 그는 수술실에서 쫓겨났다. 아직 처치가 덜 끝났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나가고 나자 그녀는 피곤함에 지쳐 잠으로 빠져들었다.

-29-

퇴원을 해서 돌아온 그들의 침실은 장미가 만발한 정원 같았다.

[오...]

[그래 오..]

그가 따라 말하더니 그녀의 허리를 안고는 입술을 덮었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키스를 받으며 흡족해 했다.

[미니 하마에서 탈피한걸 축하해.]

그녀는 키들거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말아 쥐고는 당겼다.

[아얏.]

[날 놀린 대가예요. 그런데...머리카락 계속 기를 거예요? 아이들이 당신이 엄마인줄 알겠어
요.]

그는 어두운 눈으로 그녀의 손에 감긴 머리카락을 보았다.

[은조...이건...내..죄를 잊지 않기 위해 기른 머리야...그리고 어머니의 유언을 기억하기 위해...
언젠가 그 책임에서 해방 될 때..그때 자를 거야.]

그녀는 그의 어두운 눈을 보고는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해 졌다.

[엘라우드..난...음...당신의 기른 머리도 좋아해요...알죠?]

그는 피식 웃고는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레베카는 아이를 보고는 이번에도 그를 빼 닮았다
고 연신 투덜거렸다. 파란 눈보다 검은 눈이 이쁘다는 둥. 아빠같이 포악해 저서는 안 된다
는 둥...
그는 웃으며 레베카가 아이 침실로 들어가는걸 보았다.

[이봐. 작작 좀해. 이건 꽃밭을 옮겨 논거나 마찬가지잖아...이구....냄새야..]

[미안해요 레베카. 레베카가 결혼하면 제가 숲을 통째로 옮겨 드릴 깨요.]

엘라우드의 장난말에 그녀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반을 찾았다.

[그래. 시킨 대로했나?]

[내 6개월의 기간을 주었습니다. 그 기간 안에 그가 정상화 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왜 그
런 결정을 하셨나요?]

엘라우드의 입술에는 비정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의 아내 앞에서는 한번도 짖지 않았던 얼
굴에 반도 고개를 저었다.

[내 아들이 세상에 태어난 날에 그런 나쁜 짓을 하기가 그렇더군. 그래서 말미를 준거야.]

그는 자리에 앉으며 반을 보았다.

[노바는?]

[요즘 석현과의 관계보다 의사인 로드릭과의 관계에 더 신경을 쓰더군요.]

[로드릭? 그 친구는 유부남이잖아?]

[이혼한지 3년 째 라는 군요. 한때 사귀었다는 소문 때문에 언론이 시끄러운데요...막을까
요?]

그는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턱을 괴고 한동안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로드릭...그와 사귄 게 언제 일이지?]

[네?]

[노바는 어디 있나.]

반은 엉거주춤 일어서다 간신히 노바가 있는 곳을 말할 수 있었다.

은조는 남편이 갑자기 떠난걸 알고는 어쩔 줄 몰라했다. 무슨 문제인지...
그녀는 어린 헤르 레귀자모를 만나기 위해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일어났니? 참 이쁜 아기지?]

그녀는 보조개가 패일 만큼 웃으며 어린 아들을 보았다.

[그이 닮아서 여자 꽤나 울리겠죠?]

레베카는 눈을 굴리며 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만 열면 지 남편 자랑이라니...너도 중증이다 어떻게 떨어져 지냈는지...]

그녀는 이레네가 뛰어 들어오는걸 보고는 아기를 안아 주었다.

[엄마!]

[오 우리아기...]

그녀는 나날이 예뻐지는 이레네를 보며 미소지었다.

[아빠는?]

그녀는 인상을 살짝 썼다. 어째서 이다지도 지 아빠만 찾는 건지...
그녀는 딸아이의 얼굴을 한 동안 보고는 인상을 썼다.

[이레네..엄마는 안 좋아?]

그러자 요 조그마한 여우는 야실 거리고 웃으며 그녀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미안한
듯이 웃어 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엄마도 좋아. 아빠도 좋고.]

그녀는 여우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아이였다.

기내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엘라우드의 앞에는 반이 앉아 있었다. 반 또한 밝은 표정은 아
니었다.

[내게...거짓말을 하다니.....]

엘라우드가 억눌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반 또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두 남자는 나란히
술을 들이켰다. 엘라우드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눈으로 술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바의 가증스런 얼굴...

[그 녀석은 책임감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야.....내가 그렇게 키웠다니....내가...]

엘라우드는 다시 술을 들이키고는 술잔을 팽겨쳐 버렸다.

[집에 알릴까요. 몇 시에 도착한다고.]

반이 조용히 물어보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정당하지 못한 분노의 화살로 그녀를 해친 기억에 그의 마음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울며 그에게 보내달라고 하던 그녀를 자신이 어떻게 했었던가...
그녀를 믿지 않고 자신에게 처음으로 다정하게 대해준 여자를 어떻게 다루었었던가...
그는 술잔을 거칠게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모든걸 엉망으로 만든 자신이라는 남자가 싫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노바만의 탓이 아니었다. 그녀를 가지고 싶어서 달겨든 자신도 문제였다.
은조의 얼굴을 어떻게 볼까....자신이 해친 그녀를 아내로 잡아둔 그가 과연 그녀에게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엘라우드는 눈을 감으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반은 그런 그의 행동을 한동안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호텔에 연락할까요?]

[아니...아무 곳에도 연락하지마..만약 아침에 신문을 보면 그녀가 오해할거야. 집으로 간다.]

밤에 차가 서는 소리에 일어난 은조는 창문 틈으로 비틀거리며 내리는 엘라우드를 보았다.

[엘..]

그녀는 자신의 나이트 가운을 부산하게 껴입고는 계단을 구르듯이 내려갔다.
일주일만에 돌아오는 그가 이렇게 취해서 오다니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반 무슨 일이죠? 그이가 왜..]

엘라우드가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 안에 깃든 한없는 고통에 그녀는 움찔했다. 그는
덥석 그녀를 안더니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방으로 가자...은조..]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한께 계단을 올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육아 실로
들어가 아이의 잠든 얼굴을 한 동안 보고는 아기의 손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사랑한다..아들아...나의 작은 헤르..]

그녀는 그의 이상한 행동에 멍해져서 그를 보았다.

[엘라우드..무슨 일이에요.]

그는 양복을 벗으며 그녀를 보지도 않고 있었다.

[엘!]

그는 그녀의 부름에 우뚝 멈추더니 그녀를 향해 한 팔을 내밀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는 한 손에 머리를 묻고 서있었다. 은조는 그의 어깨가 여리게 흔들리는걸 보며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발자국 물러났다.

[다가...오지마....]

그의 거부에 그녀는 설곳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움찔해서 멈추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들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숨이 멈출 것 같았다. 그의
뺨을 따라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는 것이 마치 고문 같았다.

[은조...난...난...]

그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영문을 모르는 그녀를 꼭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안..미안해 은조...미안해....내가 나빴어..내가....미안해..당신에게 상처를 줘서...당신을 아프
게 해서....당신을 너무나 아프게 해서.]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 놀란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의 고통의 무게에 그녀는 눌려지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내 동생의 거짓말로 당신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미안해..]

그녀는 어쩔 줄 몰라 그를 안고 있었다. 그가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고 그의 뺨이 다인 이
마가 축축해 졌다.

[엘라우드....]

그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아파 미칠 것 같았다.

[엘...무슨 일이죠? 당신 동생 때문이라니...난 몰라요..]

그는 그녀를 내려보았다.

[부끄럽군...내 동생의 거짓말이..그리고 나의 행동이...]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의 뺨에 흐른 눈물자국을 지워 주었다.

[무슨 일인지 난 몰라요 그런 일에 미안하다고 하다니...그리고 아마 내가 모든 걸 기억해도
당신이 뭘 잘못 했건 용서했을 거예요. 그러니..미안하다는 말은 말아요. 날 사랑하지 않는
것만 미안해해야 한다구요. 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죠?]

그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내 눈을 봐...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다면...이런 짓도 하지 않았어...당신을 사랑해서...죽
을 것만 같아...너무나 사랑해..은조...당신이 나에게는 생명이고 희망이야..날 떠나지마...]

그녀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가 무슨 잘못을 했던지 그녀는 그것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떠나지 않아요...결코...]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는 한동안 눈을 감고 그렇게 있었다. 제발 그녀가 아무 것
도 기억하지 못하길 바라며..

-30-

어디선가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그의 위성수신용 전화기 소리라는 걸 알고는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전화기의 플립을 열었다.

[네.]

[[..............저...미스터 레귀자모의..]]

그녀는 어딘지 익숙한 남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아...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어제 늦게 도착하셔서요.]

상대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전화를 받으시는 분은..]]

그녀는 살짝 웃으며 잠든 그를 보았다.

[그의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상대방이 머뭇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윤 성빈입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메모지를 들고는 거기에 메모를 했다.

[융선빈? 오..죄송해요....아닌가요?]

나직한 웃음소리...그녀는 이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친근해서 잠시 이 사람을 안다는 착각이
들었다.

[[윤입니다. 그렇게 말하시면 되요. 아..그리고 결혼 축하 드립니다.]]

그녀는 전화를 닫으며 자신이 메모한 종이를 보았다.

전화를 한동안 보는 석현의 눈에는 이상한 감정이 서려있었다. 많이 들어본 듯한 목소리...하
지만 은조라고 하기에는 발음이 약간 이상했다.
은조 특유의 한국식 발음이 아니었다.
착각....약간은 느리게 빼는 어투는 분명 은조의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던 방향은
아니었던 것이다.
석현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막연히 은조가 회장의 주위에 있을 것이란 생각이 빗나간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녀를 마음에서 떠나보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았다.
이미 너무나 긴 시간을 허비했고 그녀는 어쩌면 다른 이를 만나 결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노바도 자신의 사랑을 찾아 가고 난 지금..그는 더 이상 힘겨운 숨박꼭질에 질려
있었다.

[음..은조...누구야.]

그녀는 그를 보고 생긋 웃고는 침대 옆으로 파고 들어가 그에게 안겼다.

[회사 사람인 것 같았어요..이름이....윤....성...]

[윤.]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자와 무슨 이야기했지?]

그녀는 그의 차갑고 어두운 눈에 놀라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그냥...당신에게 자신이 전화했었다고....나쁜 사람인가요?]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거짓의 흔적이나 기억의 흔적이 있는지 면밀히 살폈다. 하지만 그녀
의 검고 다정한 눈은 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아...그래..이번에 협상하는 회사의 소유주야..]

그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 서둘러 말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일
어나 그의 목을 안았다.

[협상 건이 마음에 안 드는군요..그렇죠? 화 풀어요. 당신이 못할 일은 없어요. 웬 줄 알아
요?]

그는 모른다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에 나는 듯이
키스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나와..이레네와 헤르가 있으니까...못할 일은 없어요.]

그는 그녀의 다정한 말을 들으며 자신의 불안을 죽여버리기 위해 노력하며 그녀를 꼭 안았
다.

[당신 말은 뭐든지 다 정답이야. 은조....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어...]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안겨 기쁨에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의 눈은 어두운 계획
을 새우느라 분주해 있었다.

[전화했다고..요행히 내 번호를 알고 있었군...]

그는 그 쪽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전화를 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단지 이번에 저에게 주신 기회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 싶어서 언제쯤
뉴욕으로 돌아오실 지를 물어본 겁니다.]]

그는 석현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낌새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
다.

[한 이틀 후에 갈 거야. 그때 회의 날짜를 잡도록 하지.]

그와 석현은 거의 말을 주고받지 않았고 회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주고받
았다.

[[아...회장님 결혼하신 것 축하합니다. 부인이 상냥하시더군요. 프랑스식 발음이 썩인 분이라
제 이름 발음에 무척 애를 쓰시더군요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는 순간 뭔가 요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다시 어학을 익히며 변한 그녀의 발음에 석현이 속은 것이었다.

[꼭...아내에게 전하도록 하지.]

그는 낮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숨기려고 그 난리 였더니....알아듣지 못 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말려 올라가는걸 느꼈다. 석현은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건 누
가 봐도 아는 사실이었는데 은조가 받은 전화 한 통 때문에 모든게 번복되어 버렸다.

은조는 계속 고민에 빠져 어린 아들을 보고 있었다. 이레네는 자기 아버지의 가랑이에 매달
려 뭘 하는지 연신 깔깔거렸다.

<이상해...왜 이렇게 그 목소리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거지....왜 그럴까...>

은조는 헤르의 모빌을 돌려주면서 한동안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은조씨?]

그녀는 놀라 고개를 들다가 반을 보았다.

[어머..반...미안해요.]

[회장님이 찾아 계십니다. ]

그녀는 레베카에게 아이를 부탁하고는 그를 찾아 나갔다.

[엄마. 아빠가...]

[쉿. 이레네. 비밀..]

이레네는 입을 잠그는 시늉을 하더니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비밀이에요?]

그녀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는 싱긋이 미소지어 보이더니 그녀를 한번 보았다.

[레베카를 위해 파티를 열어주자구..이번 연말에는 멕시코로 가볼까 싶어. 그때 이레네의 친
구들을 이 집에 불러서 맘껏 놀게 하자구.]

그녀는 인상을 썼다.

[같이 안가요?]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레베카를 흠모하시는 어떤 신사 분의 부탁이야.]

그녀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레베카와의 지난날은 모두 레베카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
만 그녀와의 첫 만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고는 입이 빨게 저라 잡고 있는 딸아이를 보았다.

[나보다 먼저 이레네 입 단속을 시켜야 할 것 같군요.]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먼저 석현과의 일을 끝을 보기로 했다.
그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은조가 아침나절 만들던 태디베어를 빼앗는 것에 성공한
그는 그녀가 깨기 전에 아들의 인형을 들고 도망친 것이다.
사실 아들의 인형을 들고 도망치는 치사한 아빠는 자신뿐일지도 모르지만 은조가 열심히 만
들던 모습에 묘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어머니도 그녀처럼 자신을 위해 인형을 만들어 주셨을까 하는 의심..그리고 느껴보고
싶은 사랑...
그는 은조가 만든 테디베어를 들어올려 가슴에 안았다. 그녀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인형을 자
신이 가지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에 자신도 모를 웃음을 지으며...

반은 석현과 들어서다가 인형을 안고 서있는 엘라우드에 놀라 우뚝 멈추었다. 그도 저 인형
을 알고 있었다. 며칠동안 씨름하며 만들던 인형이니까...
엘라우드의 표정은 평소에 볼 수 없는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가득했다.
석현도 그 모습에 놀란 것인지 숨이 들이켰다.
석현의 눈에도 저런 회장은 처음이었다. 항상 남에게 명령하고 상대에게 냉정하고 잔인한
엘라우드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 서있는 남자는 정말로 사랑을 아는 남자의 모습
이었고 여유로와 보였다.

[흠...회장님.]

반의 기침소리에 고개를 돌린 엘라우드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테디베어를 손에 쥐
고는 싱긋 웃었다.

[여..어서와 석현 너무 이른 시간이라 미안하군.]

석현은 처음으로 윤이라고 부르지 않는 회장에게 긴장감을 느끼며 짧은 인사를 하고는 회의
실로 들어갔다.
회의 내내 엘라우드는 신중했고 잔인한 일면을 보였지만 왠지 관대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협상으로 그는 여전히 사장으로 남아도 좋다는 조건이 성립되었다. 그는 악수하고
일어나며 회장의 손을 떠나지 않는 작은 인형을 보았다.
분명 누군가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인형의 얼굴은 눈이 비뚤하게 달린 어찌 보면 못난 얼굴
이었다.

[누군가가 직접 만든 인형이군요...]

엘라우드의 입술에 화사한 미소가 어렸다. 아..이것을 만든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석현의 머리 속을 파고들었다.

[아내가...아들에게 주려고 만들었는데..내가 빼앗았어. 아..소문은 내지 말게.]

석현은 처음으로 이 사람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엘라우드가 진심으로 자신의 아이와 아내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도.
그는 뭔가 마음속에 구멍이 뚫린 느낌을 가지고 말없이 돌아섰다.

-31-

[엘라우드에요. 그가 분명해요...아이처럼..]

은조의 불퉁한 목소리에 레베카는 인상을 썼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지 알면서...]

그녀는 헤르를 목욕시키며 연신 툴툴거렸다. 이레네는 계속해서 아빠를 뭐라 한다고 징징거
렸고 그래도 여전히 화난 은조는 툴툴거렸다.

[이구...질투가 났는 가 보군..]

은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레베카를 보았다.

[어머? 질투라뇨? 누구 아들인데요? 이 애가 내 아들이기만 한가요? 일주일동안 집에 있으
면서...그이 하는 것 보셨죠?]

레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일주일간 엘라우드는 자상한 남편이라기보다 버림받은 아이
같았다. 아들을 무한하게 이뻐 하다가도 심술이 나기 일수였다. 거기다 이 아기는 아비 닮아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은조와 엘라우드가 조금서로의 시간을 가지려고 하면 가차없이 울어 은조를 옆에
붙어 있게 만드는 것으로 벌써 엘라우드와 애정전선에 반군으로 등장하였다.
은조야 아빠를 쏙 빼 닮은 아들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지경이지만 아내를 빼앗긴 엘라우드
야 심술이 날만도 했다.

[그럼 너도 생각해 보렴 헤르 운다고 엘라우드 버리고 뛰어가곤 했잖아. 거기다 아들 준다
고 테디베어 만든다고 한동안 그가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고는...]

은조는 기가 차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어머? 그렇다고 인형 들고 출장가요?]

[두 달이잖아. 너랑 같이 못 가니 그거라도 가지고 가고싶었겠지.]

은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긴..긴 출장 기간이었다. 그가 옆에 있어주면 더 좋겠지
만 그에게는 일이 있었다.
은조는 속이 상했다. 그녀 또한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에게 이레네 때 못한 아기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는 자신의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그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하지만 헤르를 안고 있는 순간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면 그가 가엽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 자신을 감싸다가 살해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그도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랄 나이에 너무 빨리 성숙해 버린 것이다. 그의 고독한 모습..그리고...
순간 그녀는 그의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뒷모습이 언뜩 스치며 그때 느낀 감정들이 고
스란히 기억나는걸 느꼈다.
그의 외로움과 슬픔...고독...아...그런 그를 얼마나 안아주고 싶었던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순간을 현재인지 과거인지 잘 구분을 못하고 있었다.

두 달이 이리도 지겨운지...그는 노바와의 식사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삐딱하게 앉아있었다.
노바의 옆에는 로드릭이 진땀을 흘리며 앉아있었다.

[그때. 전..이혼 문제로..노바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포크로 접시를 긁어 불협화음을 만들며 로드릭을 노려보았다. 노바는 오빠의 차가운
얼굴을 한동안 보다가 절망적인 한숨을 쉬었다.

[오빠..나..결혼하고 싶어요..]

[결혼?]

이번에는 눈을 내리떠 접시를 보며 다시 한번 끽하는 소리가 울릴 때 가지 내려그었다.
노바는 오빠의 이런 버릇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생전에 싸울 때면 어김없이 이런 짓을 하
곤 했다. 분명 심사가 굉장히 꼬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짜증스럽고...이런 오래된 버릇
이 나온걸 보니 오빠의 심사가 몹시 나쁘다는 것이었다.

[제가..청혼을 했습니다.]

엘라우드는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로드릭을 보았다.

[하면 되지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지?]

노바의 얼굴이 확 붉어 졌다.

[알아서 하게 난 이제 노바와 상관이 없으니. 그날 난 너에게 분명하게 말했어. 이제부터 널
책임지지 않는 다고 결혼하게 되면 축하한다. 그럼 가도 되겠지? 내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
서 말이야.]

엘라우드는 일어나며 차게 말하고는 반에게 고갯짓을 하고는 나가 버렸다. 노바는 그런 엘
라우드를 뒤따라 나왔다.

[오빠. 이렇게 가면 어쩔 꺼야. 난..]

[노바. 넌 성인이야 그를 사랑한다면 그와 결혼해 내 눈치 보지 말고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다면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잡아.]

노바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그의 등에 기대었다.

[미..미안해 오빠...그리고 고마워..]

그는 등뒤로 자신을 안는 노바의 손을 잡고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손을 토닥여주더니 차에
올라탔다.

[웃긴 일이군...집으로 돌아가는데 겁부터 나다니...]

엘라우드의 목소리에 어린 느낌에 웃음을 참으며 반은 앞만 보았다.

[웃고 있군...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니까...]

그는 자신의 차를 가득 채운 인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은조가 만든 테디베어가 그의 품
에 안겨있는 모습은 아주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이렇게 차가워 보이는 남자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은조씨는 그런 일 잊었을 겁니다.]

[아니..그녀는 아들에게는 맹수로 변하는 엄마야. 나하고 이레네는 찬밥이지..]

그의 심드렁한 목소리에 반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흥..버릇이 망가졌어. 상사 앞에서 그렇게 웃다니..]

하지만 반의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사실 그도 야단치려고 한말이 아니었다.
은조가 얼마나 화가 나있을지를 생각하던 그는 순간 천하의 엘라우드를 겁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몸무게의 반도 안 되는 자그마한 여자라는 사실에 실소할 뻔했다.

[아...도착은 다 했는데...어떻게 할 겁니까. 선물부터 들고 내릴까요?]

[아..그렇게 해..]

하지만 그가 돌아온 집에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레베카와 딸아이와 헤르만이 집에 남아있
었다.

[어떻게..]

[이구..하루 빨리 왔잖아. 은조는 자네 좋아하는 것 사러갔어. 식사 준비한다고.]

[그런 건 사람 시키면 될 건데..]

그는 짜증을 내며 이야기했다.

[그런 말하지 말라구. 직접 고른 걸로 직접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원 모르겠어? 얼마나 좋
아하면 그런 것까지 신경 쓸까....무심하기는...]

그는 레베카의 말을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음식보다 은조가 더 보고싶었다는 말을 했
다가는 정말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았다.
그는 화를 삭이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러다 문득 아내가 기억이 돌아와 자신의 곁에서
도망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아무이상 없습니다. 가끔 기억이 돌아오는 것은 나쁜 징조가 아니니까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얀 박사의 얼굴을 보았다.

[가끔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해서요...]

[혈정들이 많이 흡수 된건 사실이지만 아직 위험부위에 남은 혈정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수술을 권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속에 이는 파문을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행복하다가...만약
자는 듯이 죽기라도 한다면 이레네와 헤르 그리고 사랑하는 그를 누가 보살펴 줄지 걱정이
되었다.

[저...생명에는..]

얀은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장애는 지금 겪고 계신 언어적인 장애가 전부입니다. 아직
도 말하실 때 걱정부터 되시나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약간 느리게 말하는 편이지만 모두들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요. 요즘은 전화
를 받는 것도 익숙해지고 있어요.]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머리 아플 때 먹는 약과 나머지 말을 건네었다.
요즘 들어 종종 머리가 아프고 뭔가 뚜렸 하지 않은 기억에 괴로울 때가 많았다. 그에게 말
하면 병원 전체를 예약하는 해프닝이 일어날것이 분명해서 요리사와 경호원 둘만 대리고 온
것이었다.

[레귀자모씨는 안녕하시죠?]

[네...감사해요 항상 그이가 박사님을 당황하게 하죠?]

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니 당연하지요 오히려 저희가 영광이랍니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서다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이가 왔어요...오...]

그녀는 허둥대며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그이는 요?]

레베카는 머리에 손가락을 올려 뿔이 난 표시를 하고는 아이들 침실을 가르쳤다. 그녀는 빠
른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엘..]

그는 그녀를 본척 만척하고는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엄마!]

이레네가 뛰어와 그녀에게 안겼다.

[외출을 너무 오래하는군.]

그는 쏘듯이 말하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아빠 막 화냈어. 엄마 없다고...전화기에 대고 소리질렀어. 그래서 헤르막 울었어 이레네도
울었어. 아빠 무서워 화났어. 엄마가 아빠를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화났어.]

은조는 순간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그녀가 떠났다고 생각했다니...아이가 둘이나 있는
여자가 가면 어딜 간다고....
그녀는 답답한 마음으로 그를 찾아 방으로 갔다.

[엘..이야기 좀 해요..]

그는 옷을 벗으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한번 당신을 떠났다고 이렇게 오해..]

갑자기 그가 당겨 안자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멀리 가지마...날 불안하게 하지마...이 행복을 불안한 허상으로 만들지마....당신이 그리워 미
치는 줄 알았어..사랑해 은조..]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그를 안아주었다. 이 애정 결핍증 환자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이 그를
끔찍하게 사랑해서 떠날 수 없다는 걸 알려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32-

머리가 지끈거리자 그는 인상을 쓰고는 더욱 신문의 활자를 보려고 기를 썼다.
석현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기쁜 반면...
그녀가 언젠가 기억을 해낸다면...하는 속된 마음...
최고의 방해자인 노바가 결혼하면 로드릭을 따라 스페인으로 떠날 것이란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드릭이 노바를 대리고 뭘 하던 상관이 없었다. 단지..그에게 기
대지만 않으면 그만 이라는 마음이었다.
노바 마저 떠나면 그녀와 맘놓고 살수 있을까....
그는 다시 한번 심하게 인상을 쓰며 이마를 쥐고는 가볍게 문질렀다.

[머리 아파요? 어제 잠도 안자고 일해서 그런 거예요.]

그녀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 그는 흘끔 그녀를 보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복숭아 색의 산뜻한 원피스 차림으로 이제 길게 기른 머리를 풀고는 그의 옆에 서있
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더욱 신문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할 일없이 그의 긴 머리카락을 풀더니 손으로 쓸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기는걸 느끼고는 신문을 더 꽉 붙들었다.
그녀는 그를 보며 빙긋이 미소지으며 그의 귀 볼에 입술을 눌렀다. 그는 펄쩍 뛸 듯이 놀라
며 신문이 무기인양 펼쳐들었다.

[메튜 아저씨...다시 공장에 취직시킨 사람...당신이죠?]

[흠...난 아니야.]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차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계속 어루만지고 손가락으
로 꼬며 눈썹을 위로 올리더니 슬쩍 미소지었다.

[정말? 흠...그럼....선물도 필요 없겠군요...그렇죠?]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만지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는 그의 몸을 따라 손을 내린
뒤에 그의 머리 끈을 손에 들고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홀린 듯이 그녀의 멀어지는 뒷모습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귀를 기울였다. 아직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안 들렸다. 그녀는 어
깨를 으쓱하고는 눈을 내리떴다.
오늘 일찍 아이들과 레베카와 반은 소풍이라는 이름 하에 집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원피스의 단추를 느슨하게 풀고는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가 뭔가 화가 나서 서
재에 틀어박힌 것에 대해 레베카와 심도 깊게 이야기한 결과...
레베카는 그것이 욕구 불만이라고 했다.
뭐...그 단어에 대해 적당한 표현을 생각하기 위해 여러 시간 그녀에게 설명을 했지만...
은조는 그의 긴장이 어디에 기인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가지 그가 굉장한 스트레스 상
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은조는 서두르는 것 같은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미소지었다. 레베카가 말하는 것처럼
그에게 몸을 던지고 싶지는 안았다..그리고 그를 유혹하기 위해 안 하던 야한 화장 또한 하
기 싫었다.

[뭐 하는 거야..]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보던 그녀는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머리 아플 때는 뭐하나만 달고 있어도 아픈 거예요. 두통에서 해방시켜 준 걸요.]

그녀는 시치미를 때며 말하고는 손목에 걸린 그의 머리 끈을 흔들어 보였다.

[필요하면 가져가요.]

그는 한동안 그녀의 진위를 가늠하는 것처럼 보더니 단호한 걸음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
다.

[장난은 그만해. 난 바빠.]

그녀는 그의 내민 손을 보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를 올려보고는 그의 머리 끈을 자신의
옷의 앞섶으로 흘려 넣었다.
그는 숨을 훅하고 들이쉬며 그녀의 가슴계곡사이로 사라지는 끈을 멍하니 보았다.

[나한태도 시간을 못 내요?  출장에 다녀오고 바로 일에 착수해야 하나요? 아니면...나에게
실증이 난 거예요?]

그는 인상을 쓰며 그녀를 보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한 거야.]

그는 성질을 내며 머리를 끌어올렸다.

[그럼...날 피하는 거예요? 어제의 일로?]

그는 초조하게 방안을 왔다갔다가 했다. 그녀는 의자로 다가가 편안하게 앉았고 그 덕에 그
녀의 풀어둔 원피스 속으로 그를 놀리는 것처럼 머리 끈이 삐죽하게 솟아올랐다.

[아니야...그런 건...]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지었다.

[난..]

[이런....엘...당신답지 않아요. 머뭇거리다니...난..당신이 이렇게 미적거리는 것 원하지 않아
요...]

그는 우뚝 멈추더니 그녀를 보았다. 그의 호흡이 약간 불안정하게 느껴지더니 한달음에 그
녀를 안아들었다.

[그런데....괜찮은 거야?]

그가 머뭇거리며 물어보자 그녀는 그의 귀에 소곤거렸다. 그는 한쪽눈썹을 올리더니 씩 미
소지어 보이고는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낙인을 찍었다.
그녀는 그의 혀를 반기며 그의 머리를 꽉 안고는 안 놓아줄 기세로 그의 키스에 회답했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그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진도가..너무 빠르군...]

그녀는 미소지으며 그의 셔츠를 풀어 내렸다.

[그럴거에요....당신을 보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탐나거든요.]

그는 그녀의 장난스런 말에 끙하고 신음을 하며 그녀의 원피스를 한번에 벗겨냈다. 그녀의
가슴은  이전보다 풍만해져 있었고 더욱 탐스러워져 있었다. 그는 손을 올려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는 입술을 댔다. 그녀는 미약한 저항을 하더니 그의 옷을 마저 벗겨주었다.

[일부러....브레지어 안 한 거지..]

그가 날카롭게 물어보자 그녀는 낄낄거렸다.

[레베카가 그렇게 해야 한데요...오....그만..]

그는 그녀의 배 쪽으로 미끄러지듯이 입술을 옮기며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가 마지막 속옷을 벗겨 내리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감았다.

[아름다워...]

[아이를 둘이나 낳은 걸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그녀를 안아들고는 침대로 향했다.

[아니...너무나 아름다워...]

그는 그녀의 곁에 몸을 뉘며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성급할 지도 몰라.....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아..]

[나도...원하지 않아요...]

그는 그녀의 뻔뻔스런 말을 환영하며 그녀의 다리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단번에 파고 들어갔
다. 그녀는 등을 휘며 약간 주춤대다가 그의 행위에 동조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레도...내가 떠날까봐 겁나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오목하게 들어간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얼굴을 들어올리며 그의 턱에 입술을 부볐다.

[사랑해요...그러니 그런 걱정하지 말아요.]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난...자신이 없어...내가...당신을 사랑해도 되는 건지..이렇게 사랑 받아도 되는 건지.]

그녀는 이 당당한 남자가 자신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실소할 뻔
했다.

[당신..날 놀리는 거예요? 너무 과분하게 생각되는 사람이...난 당신에게 사랑 받아 행복한
걸요. 그리고..헤르가 이쁜 이유가 뭔 줄 알아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건...그 애가 당신과 너무 닮아서 에요. 그리고 당신과 나의 아이니까...모르겠어요 엘? 당
신이 소중하지 않다면...당신의 곁에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지 않아요. 당신이 있기에 아이도
있는 거예요 당신이 기쁘면 나도 기쁘고 당신이 슬프면 나도 슬퍼요. 이레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의심할 꺼에요?]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고는 눈을 감았다.

[알어 당신이 나의 최고의 선물인걸...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인걸..그러기에 항상 불안해. ]

그녀는 작은 한숨을 쉬며 그를 올려보았다.

[서면으로 남겨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고?]

그는 그녀를 아무 표정 없이 보았다.

[당신이 안심할 수 있다면 적을 깨요. 당신이 날 믿을 수 만 있다면...]

[믿어 은조...진심이야..]

그녀는 그의 가슴에 안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그의 단단한 가슴을 할 일없이 어루만
지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그는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을 물끄러미 보았다.

[원하시던 것 아닌가요...]

반이 웃음기 없이 이야기하자 그는 눈을 감았다. 정말 이런 종이를 주다니...증인으로 반과
레베카를 새운 그녀의 서약서에 그는 할말을 잃었다. 그가 어떠한 잘못을 하던 아니면 했건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 적힌 종이...
그는 그것을 금고에 잘 넣었다.

[그래...뭐든 조심하는 것이 좋지...]

반은 그의 차가운 얼굴을 한동안 보더니 조용히 서류를 내밀었다.

[아침에 들어온 보고입니다. 노바아가씨...결혼하신다는 군요. 회장님의 아내와 함께 참석해
달라고 하시는 데요...]

그는 정원에서 뛰어 다니는 은조와 이레네를 보고있었다.
그러더니 손톱으로 탁자를 톡톡 치기 시작했다.

[혼자 벌린 일이니 혼자 책임지겠지...]

[내년이면....석현도 카나다로 사라지고 노바아가씨도 스페인으로 사라지겠군요.]

그는 반을 올려보았다.

[비난하는가?]

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그에게 다른 서류를 넘겼다.

[아니요 사실 감탄 중입니다. 불가능할 것 같던 생활을 영속으로 이끄시는걸 보며...사실 조
마조마 했습니다.]

그는 다시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불가능한 일은 없어....만들고 감시하면 그만이야...난 그녀를 원해..그녀 없는 삶을 생각해
본적 없어...누구든..날 위협하면. 그에 응당 하는 대가를 져야 할거야.]

그는 나직하게 이야기하며 일어서다 잔디밭위로 은조가 갑자기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다.

[은조!]

그가 뛰어나가는 모습에 놀란 반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멀리서 이레네가 우는소리와
레베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마음속에는 누군가가 암살하려고 했던 장면과 그의 어
머니가 쓰러지는 영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33-

[응...]

그는 눈을 번쩍 뜨고는 그녀를 살폈다. 장장 9시간이나 깨어나지 못하는 그녀 옆에서 얼마
나 초조했던가를 생각하며...

[엘라우드...]

그는 가녀린 그녀의 목소리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녀가 눈을 뜨더니 약한 신음을 냈다.

[움직이지마....머리에 계란 만한 혹이 생겼어...]

그녀는 움찔하며 그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어떻게...]

그는 그녀의 눈을 한 동안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쓰러졌어....의사의 말로는 당신...어제 병원에 왔었다던데...]

그녀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움찔했다.

[많이 아팠어?]

그녀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핑글 돌았다. 이 남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걱
정했다는 걸 그의 구겨진 옷에서 그리고 까칠한 얼굴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고는 당황한 듯이 어쩔 줄 몰라했다.

[미..미안해요...당신 걱정했죠...]

그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 앞에서 다시 쓰러지지마...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그녀는 약간은 퉁명스런 그의 목소리에 행복해져서 우는 것 반 웃는 것 반으로 그를 보았
다.

[아내는 어떤가요.]

그는 의사를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다른 이상은 없습니다만 정확한 검사가 필요합니다. 워낙 많이 다쳤었고...아직도 후유
증이 있으니... 오늘 혈액검사를 보니..약간의 빈혈이 있었습니다. ...]

엘라우드는 의심스런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며 의사를 노려보았다.

[혈정이 대부분 사라졌는데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스럽습니다. 뇌가 다친
쪽의 후유증으로 언어 장애를 가진 것에 비해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의 이유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군요...]

그는 순간 간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돌아올 확률이...]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미 4년이 다 된 일이라...]

엘라우드는 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어째...아이처럼 잘 뛰고 잘 논다고 했어...그러게 조심하라니까...]

은조는 엄마처럼 나무라는 레베카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머리 옆에 생긴 혹이 너무 아파 눈
물이 나올 정도였다.

[혹시..나 옮기다가 미워서 벽에 머리 박은 것 아니에요?]

레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네 남편이 행여...이구 지 마누라 죽을까봐 허옇게 질리던데...너도 봐야 했다. 그런 표정이
라니...]

은조는 피식 웃었다. 그의 얼굴이 질리다니..그의 그런 표정은 그녀를....
은조의 입술에 걸린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의 질린 표정은....

[엔젤?]

은조는 멍한 눈으로 레베카를 보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

[미안해요....공상을 하다니...자꾸 이상한 생각만 난다니까...]

그녀는 자신이 아까 생각했던 기억을 자신의 상상이라고 치부하며 고개를 저었다.

은조는 그의 긴 머리카락을 한동안 보았다. 이상한 기분...생소함...
그는 책에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잠이 안 와? 아니면 머리가 아픈 거야?]

그의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그녀는 조그마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개인 공간인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다가오는 그녀를 팔을 벌려 안아 주며 이마에 키스했다.

[엘...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는 긴장하며 그녀를 보았다.

[무슨 말...]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웠다.

[거짓 없이 말해야 해요..]

그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말을 재촉했다.

[나...당신에게...처음으로...그러니까.....처음으로..음....]

[처음으로....당신을 가진 날?]

그녀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긴장한 그를 보았다.

[강제 였나요? 아니면..동의하에서 였나요..]

그이 손이 뻣뻣해졌다. 그녀는 그의 행동에서 이미 답을 알고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풀고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진실을 말하길 원해...그렇지..]

그녀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를 일으키고는 그녀에게서 빠져 나와 방안을 서성였다.

[난...당신이 탐났어....당신은...처음부터..내 여자가 아니었어....내 여자가....정말 원했지만...내
여자가 아니었어...]

그의 입에서 도저히 자신이 강탈했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녀가 어떤 강도의 강제라
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지금은 더욱...
그녀는 멀리 벽을 보고있는 그를 올려보았다.

[나에게 오기 위한 방법은...어쩔 수 없는...]

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쥐고 떨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사랑해...너무나 사랑해...]

그녀는 그의 흔들리는 눈을 보았다.

[난...그래요....문득..당신과 내가.....처음이 순탄했을까..하는 생각을 했어요..의문을 지워줘서
고마워요...난 내가 무척 속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그런데..아니었군요..]

그는 그녀를 당겨 안고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는 그녀의 가슴을 모아 쥐며 더욱 깊은 키스
를 퍼부었다.
그녀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그를 사랑했다는 걸 기억했다.

[난...그때도 당신 사랑했어요...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녀를 장의자에 뉘이고는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그를 당겨 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그걸 숨기며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까를 떠올리자 마음이 아팠다.

[엘...나의 사랑하는 사람...]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부비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그를 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다시는 강제로..그러지 말아요...나 무서웠어요...분명 그랬을 꺼야...]

[기억...안나?]

그는 조심스럽게 물으며 그녀의 잠옷 자락을 걷어 올렸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옷을 올리는
것에 정신이 산란해져서 입술을 깨물었다.

[자세한..기억은...안나...오..엘..]

그녀는 그의 손길에 파르르 떨며 그를 보았다. 그는 그녀의 흥분으로 어두워지는 눈을 보았
다.

[더 이상..그런 기억에 매달리지마...은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셔츠로 손을 뻗었다. 그는 자신의 옷을 벗으며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올리고 젖무덤을 힘차게 빨아 당겼다. 그녀의 나직한 신음소리를 들으며 그는 그녀
의 배를 더듬으며 몸을 눌렀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꽉 안고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그의 바지춤을 잡아 당기기 시작
했다.

[은조....]

그는 그녀의 손을 치우고는 자신이 바지를 벗어 던지고는 그녀의 준비된 그곳으로 파고 들
어가기 시작했다. 낮은 헐떡임과 가녀린 신음소리를 들으며 그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
작했다.

[처음은 잊어.....우리가 결혼한 그 순간만 기억해..은조..]

그녀는 그의 목을 안고는 엉덩이를 밀어 올리며 절박하게 신음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키
스를 퍼부으며 점점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칭얼대는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그는 그녀의 목과 가슴을 점령하며 그녀에게서 모
든 기억을 앗아갈 것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그의 품안에 안긴 체 모든 걸 망각해갔다. 그는 자신의 사람이고 자신의 미래이고
과거였다.
그녀는 그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나른하게 그에게 안겨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그는 그녀와 한 몸인 체 그렇게 그녀
위에 누워 그녀에게 잘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아까..내가 물었던 말에 정직하게 답해줘서 고마워요...하지만...그 한번 뿐 이었죠? 당신이
강제로 날 안은 것...그럴 것 같아요...당신은 굉장한 연인이니까..]

그녀의 장난스런 말을 들으며 그는 가슴이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실....그런걸 말한 기억
이 없었다.
그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그녀가 아무 것도 알아내려 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그녀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34-

석현은 한동안 담배를 입에 물고 서있었다.
노바의 결혼소식을 접하며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자신이 노바를
친구이상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 한켠을 차지한 은조의 사진을 보았다.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사진은 이제 예전의 모습이 되어 처량하게 보였다. 얼마나 변했을까...
얼마나 달라졌을까....
석현은 의구심도 모두 노바의 결혼으로 날려버리기로 했다.
오해를 했던 안 했던...은조에게 밝혀야할 진실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어버렸다.
석현은 한숨을 쉬며 조용히 자신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혼식.....]

은조는 인상을 쓰며 청첩장으로 보이는 카드를 보았다.

[왜 그는 자신의 여동생의 결혼식인데 가지 않는 걸까요....아니면 내가 미워서 두고 다니
나....]

레베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이봐. 아마 보여줘도 안 간다고 했을걸? 사람 만나는 자체를 싫어하는 여자가...]

하지만 내심 섭섭한 은조는 괜히 커튼만 잡아 당겼다.

[그렇게 하다가 찢어질 거다. 커튼을 다는 게 아니라 땔려는 것 같아.]

레베카의 투덜거림에 그녀는 손을 홱 잡아 빼고는 뒤돌아 쭈그리고 앉았다.

[섭섭하니?]

그녀는 커튼을 들치며 아무 말 안 했다.

[엄마~~~~헤르가~~앙~~]

이레네의 우는소리에 은조는 손을 닦으며 일어서 바삐 아이들의 방으로 갔다.
기어다니기 시작하는 헤르는 집안의 폭탄이었다.
이레네의 머리를 한 웅큼 뭉뜻은 헤르는 엄마를 보자 방긋거리기 시작했다.
은조는 혀를 차며 다가가 헤르를 야단치고는 우는 이레네를 달래기 시작했다.

[헤르 미워! 아빠...앙.....]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이레네에게 아빠가 오지 못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몰라...아빠...아빠....앙앙..]

은조는 울보 떼쟁이 딸아이에게 두 손을 들고는 뚱한 목소리로 회사로 전화를 했다.

[[네]]

[나 에요.]

[[아. 무슨 일이야.]]

그가 걱정스럽게 물어보자 그녀는 인상을 쓰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레네가 아빠보고 싶다고 울고 난리예요.]

[[오..이런...]]

그녀는 이레네에게 전화기를 건네었다.

[아빠..]

영락없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작은 여우는 아빠의 혼을 빼놓고 말았다. 아이는 전화를 끊
으며 득의 양양하게 웃었다.

[아빠 오면 헤르 야단친다고 했어. 메롱~`]

이레네는 혀를 낼름거리고는 방을 뛰어나가기 시작했고 헤르는 뭐가 좋은지 은조를 잡고 겅
둥거렸다.

[내가 보고싶다고 할 때는 일 때문에 미안하다더니...]

그녀는 툴툴거리며 헤르를 고쳐 안았다.

[미안하군 집안 일이라.]

그는 양해를 구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석현은 그런 회장의 생소한 모습에 어안이 없었다.
회의 중 동생인 노바의 전화조차도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남자가 저렇게 상냥하게 전화를 받
다니...그도 늙어버린 걸까....
엘라우드는 석현을 빤히 보았다.

[뭐 이상한가?]

비꼬는 듯한 목소리...엘라우드가 다정해 질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뿐인 것 같았다.
석현은 미소지어 보이고는 자신 속에 남은 엘라우드에 관한 미움을 접어버리기로 했다.

[아닙니다. 행복해 보이셔서요.]

엘라우드의 입술에 기묘한 미소가 어렸다. 회의는 금방 끝이 났지만 엘라우드의 기묘한 표
정은 연장선상에 있었다.
석현의 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켕기는 기분...
행복해 보이셔서요...
그는 눈을 내리떴다. 어찌 보면 자신이 지금누리는 행복은 응당 석현의 것이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고상한 여느 남자처럼 은조를 보내주거나 놓아줄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
을 가리고 그녀의 귀를 막아 지속할 수 있다면 간신히 차지한 행복을 움켜쥐고 싶었다.
아무리 죄스럽다고 해도..그녀를 찾은 남자는 자신이었고 이제 그녀는 자신의 아내였다. 그
것도 아이가 둘이나 되는...
아무리 은조가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도 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그녀가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막아 버렸다.
은조의 한국 국적도...
은조의 작은아버지에게도...
석현과 노바에게도...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그와 그의 집뿐이었다.
국적 심사 때는 거의 완력으로 그녀의 국적을 바꾸어버렸다.
완전한 자신의 여자...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고 해도..영원히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여자...
그는 손톱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은조는 영원히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문처럼 이야기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아내인 은조가 너무나 보고싶었다.

[오늘 돌아간다. 잭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하도록. 반 지금 떠날 준비해.]

[내일이 노바아가씨 결혼이신 데요.]

그는 반을 돌아보고는 이마를 문질렀다.

[이미 할 결혼...나 없다고 진행 안될 일은 아니잖아? 난 아내에게 가야겠어.]

[반. 어쩐 일이죠?]

노바가 웃으며 그를 맞이하자 반은 아무표정 없이 자신이 가지고온 것을 내밀었다.

[회장님은 결혼식에 참여 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대신온점 양해를 구합니다.]

노바는 정중한 반의 목소리에 움찔해서 그를 올려보았다. 물론 오빠가 참석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은조의 일로 자신을 찾아와 원망 어린 말을 할 때부터..
오빠는 은조를 진심으로 원했다....그녀의 일 때문에 은조를 버린 오빠로서야 그녀가 마음에
안들 것이다.

[반...물어보고 싶어요...오빠 행복한가요?]

반은 그녀에게 선물을 안겨주고는 야릇하게 미소지었다.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면...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죠.]

노바는 그 방해자가 자신임을 어렴풋이 알고는 한숨을 쉬었다.

[석현은...]

[그 회사는 다시 살아날 겁니다. 곳 노바님도 일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반은 돌아 나오며 속으로 노바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은조?]

그는 침실 문을 열며 은조의 이름을 불렀지만 침실은 썰렁했다. 지금에야 겨우 도착했는데...
그는 넥타이를 푸르고는 그녀를 찾아 집을 돌기 시작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레베카는 이
미 잠들어 있었고 반도 잠자리에 들고 없었다.
그는 딸아이 방도 가보고 헤르의 방도 가봤지만 은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순간 얼굴에 있는 피가 땅으로 꺼지는 기분을 느끼며 거실과 다른곳을 뒤지기 시작했
다. 하지만 은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미친 듯 그녀를 찾아 해맨지 1시간만에 그는 그녀가 통가지 않는 그의 서재에 잠들어
있는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의 의자에 앉아 그녀가 손수 뜬 조각이불을 덮고 아이처럼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
다. 그는 그녀가 깰까봐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약간 미간을 찡그리고는 몸을 더 웅크리며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핑돌았다.
이 여자를 지켜야했다. 그의 행복을 위해...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거짓말로 마음 깊은 곳까지 상처 입을 그녀자신을 위해 그는
이 거짓이라는 기반 위의 삶을 지켜야만 했다.
그는 잠든 은조의 허리를 꼭 안았다.

[음....]

그녀가 잠결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버렸다.
그는 그 상태로 그녀를 안고 한동안 있었다.

-35-

결혼식장은 그의 집 명성보다 조촐했다. 그는 노바의 환한 얼굴을 보며 자신도 미소지었다.

[석현씨...와주었군요..]

노바의 약간은 당황한 목소리에 그는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노바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신의 남편이 된 로드릭을 봤다. 로드릭은 석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그녀를 돌봐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미소지었다.

[노바 축하해 얼마 만에 결혼이니? 그와 안지도 꽤 오래지?]

노바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석현의 손을 꼭 쥐었다.

[이야기 좀 해요..나 당신에게 말할 것 있어요..]

석현은 새 신부가 자신에게 할말이 뭔지 의문스럽게 생각하며 노바를 보았다.

[먼저....은조씨가 떠나기 전의 상황을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화내지 말고 들어줘...]

석현은 샴페인 글라스를 손에 쥔체 노바를 보고있었다.

[은조씨.....오해하고 떠났어...석현씨 말대로...그녀에게 이야기를 했어야 했어...]

석현은 엉거주춤 일어나며 노바를 보았다.

[은조씨는...내가....유산한 아이를 착각하고 떠난 거야......나도..어떻게 그녀가 알게 된 건지
몰랐어....그런데..얼마 전 오빠가 화를 내며 왔을 때 알게 되었어...그녀가 떠난 건 나 때문이
었어..미안 석현씨...]

석현은 아무 말 없이 노바를 보고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괴로웠겠구나..그런걸 숨기고 있었으니...]

노바는 놀란 눈으로 석현을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날...용서하는 거야?]

석현은 노바에게서 멀어져 창가로 갔다.

[이미...지난 일이야. 이제 은조를 찾지 않아...나 어쩌면 은조를 사랑해서 찾는 게 아니라 그
사랑이 변질되고 썩어서 집착하는 것일 뿐이야..이제 예전 일로 매달리지는 말아야지.]

석현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노바를 돌아보았다

[행복해....알았지? 내게 미안함을 표하고 싶다면 내가 부러워 할만큼 행복해.]

노바는 눈물이 그렁거려 손으로 입술을 막았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고는 웃어 보였다.

[사랑해...석현씨...알지?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어...아직도 사랑하고...영원히 사랑할게...]

석현은 노바의 뺨에 손을 올리고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노바의 입술에 살짝 키스해주고는
그녀의 인생에서 걸어나왔다.

[엘....언제 온 거예요?]

그는 졸려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고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밤늦게....일어날거야?]

그녀는 눈을 감은 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그의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나만 일으켜봐요...그럼 당신 머리카락을 뽑아 버릴 거야...]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마에 입술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녀를 더 꼭 안았다. 엘라우드는 시계를 설핏 보았다.

[약속 있어요? 시계보고 있었죠?]

그는 움찔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약간은 화가 난 듯한 눈을 보았다.

[오늘 회의 취소했어....그러니 시간은 있어.]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가운을 입었다.

[은조?]

[나 한번씩 이해가 안가요...]

그는 일어나며 그녀를 잡았다.

[은조...이러 지마..뭐가 이해가 안 되는 지도 말해줘야지.]

은조는 그를 돌아보았다.

[일이 그렇게 중요해요? 나랑 아이들은 이곳에 숨겨두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뉴욕외곽에 집을 준비중이야 아이들과 당신이 옮기기에 아직은 집이 단장이 안되어서 그런
거야 이해 해줘 은조 나도 빨리 당신을 대리고 가고싶어.]

은조는 입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외곽 집에는 마당도 넓고 큰 창과.......]

은조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손을 타고 긴장이 흘렀다. 그의 눈이 차가워지더니 그녀를 확
잡아 당겼다.

[엘!]

[외곽 집이라니.....]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의 차가운 눈을 보았다.

[난...몰라요...그냥....]

은조는 당황해서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엘라우드는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풀며 천
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미안해...나도 모르게 당신을 겁주려고 한건 아니야.]

그녀는 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체 그를 올려보더니 그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바로 욕실
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지독한 하루의 시작 이였다.

[별로 상쾌한 하루는 아니군요. 회장님.]

그는 반이 건네어 주는 신문을 받아 들며 인상을 썼다.
반도 미간에 주름이 잡힌 체 이야기했다.

[무슨 말이지?]

반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방 쪽을 시선을 주었다.

[오늘 은조씨 기분이 엉망입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는 주방에 들어가더니..방금 전에는
쿠키를 모조리 태우고 화가나 정원으로 나가버리셨습니다.]

그는 인상을 쓰며 희미한 연기 너머로 투덜대는 레베카를 보았다.
엘라우드는 인상을 쓰며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은 그런 엘라우드를 한동안 보다가 레베카에게로 걸어갔다.

[아이들은?]

반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아까의 자세 그대로인 엘라우드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잭과 놀고있습니다.]

엘라우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있었다. 한동안 죄 없는 신문을 이리저리 고문하던
엘라우드는 못 참겠는지 벌떡 일어나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의 바람은 꽤나 매소 웠다. 이런 날씨에 도대체 밖에서 뭘 하는지....
은조는 저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잡아 듣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
게 다가가며 한숨을 쉬었다.

[은조..]

은조는 움찔한 듯이 보였지만 발딱 일어나 저만치 멀어졌다.
그는 약간은 짜증스러워 그녀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쥐고 돌렸다.
그녀의 코가 빨간 걸로 보아 나온 지 한참인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스웨터를 벗어 그녀에
게 억지로 입혔다.

[화나는 일은 말을 해야지 알지..]

그녀는 고개를 고집스럽게 돌리고는 그를 무시했다.

[은조.]

[몰라요...나도 왜 이러는지...아까는 어렴풋이 기억이 나더니....이제는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난 마치 유령 같은 기분이에요...당신은 내가 뉴욕에 나타나는걸 싫어해요. 당신의 동생과는
인사도 시켜 주지 않아요. 난 당신의 친구도 하나도 몰라요. 그리고 당신과 관계된 어느 누
구도 몰라요. 물론 경호원들만 알죠....사람 만나는 걸 싫어는 하지만...당신을 위해 못할 것도
없어요..왜..나에게 숨기는 거예요? 내가 뭔가를 잘못한 거예요...아니면...내가 부끄러운 거예
요..]

그는 그녀를 보며 인상을 썼다.

[부끄럽다 생각한 적 없어 동생을 만나지 못하게 한건.....당신을 만나면....그 애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야...나의 나쁜 점을 말할까봐...]

그녀는 머뭇거리는 그의 대답이 성애 안 차는걸 느끼며 무리하게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었
다.
순간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옆으로 넘어져 버렸다. 자신도 모를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
렀다. 그가 숨기는 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가족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그의 동생 때
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그녀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껴 울자 당황한 엘라우드는 황급하게 그녀를 안아주
며 옆에 앉았다.

[은조 이러지마...제발....]

[미워요....몰라...말하기 싫어.....]

그는 은조를 안고 얼러주며 한동안 그녀를 달랬다.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까? 응?]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러더니 자기 같은 사람 둘
이 들어갈 스웨터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그를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업어줘요...그럼 조금 용서해줄께...]

그는 눈을 크게 뜨고는 그녀를 보았다.

[봐...그런 것도 안 해주잖아..이제 내가 싫어진 거야.....]

그녀가 다시 손바닥에 고개를 묻어버리자. 그는 당황하며 그녀를 안았다.

[아니야 단지...동생도 업어 줘 본적이 없어서....]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자.]

그녀는 그의 넓은 등을 보더니 냉큼 업혔다. 그는 그녀를 업고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엘..]

[응?]

[나....한번쯤 이렇게 하고싶었어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다른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나....낳아 준 엄마도 이렇게 해 주셨겠죠?]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난 당신이 있으니까.....언제까지고..이렇게 있어줘요...응?]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이 목덜미를 스치는 느낌과 함께 올해 처음 날리기 시작하는 눈
송이를 보았다.

[그래..약속해 은조...언제고..]

그녀는 그의 등에 뺨을 대고는 날리는 눈송이를 한없이 보고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가 더 이상 숨기는 존재가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어느덧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였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지금이라도 노력해서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
가 되고 싶었다.

-36-

[보기 좋았습니다...]

반의 시치미 땐 말에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잠들었나보군요.]

엘라우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뉴욕 쪽의 일은?]

[노바님은 올해를 넘기면 바로 스페인으로 가실 계획입니다. 그런데...스페인 병원에 투자하
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엘라우드는 반을 흘긋 보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노바가 떠나준다면...못할 것도 없지....]

반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네는?]

[공부 중이세요. 지금쯤 동화책 읽고 계실 겁니다.]

그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그리고 석현이 이번 해 안에 다른 곳으로 떠날 겁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흘긋 다른 곳을 보았다.

[아내와 여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춥지 않은 곳으로.]

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보라나 타히티는 어떨까요?]

[보라보라섬이 좋을 것 같군. 알아봐.]

[내 회장님.]

누굴까...그렇게 슬픈 눈으로 날 보지마...난..난...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방금 전에 본 영상을 다시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답답함을 느끼며 눈이 내리는 창가로 갔다.

[애구...일어났어? ]

[레베카..]

그녀의 목소리는 쉬어있었다.

[머리 아파요...]

[이구..그렇게 추운데 오래 나가 있었으니....이제 그 스웨터 벗는 게 어때? 무슨 곰돌이도 지
마누라 감기 걸릴 까봐 저렇게 싸둔 건지....]

그녀는 레베카의 말처럼 걷기 힘들 정도로 둘둘 말린 자신의 옷을 벗었다.
그녀는 그의 스웨터를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싸웠어? 오늘 너답지 않았어.]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어요. 요즘..나 다운게 뭔지도 알 수 없어요....그가 떠나있을 때마다...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요...만약...이대로 기억이 영원히 안 돌아온다면..그리고..이렇게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혈정이 위험부위로 옮겨간다면.....아이들은..그리고 그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무섭고 두려워요...]

레베카는 애처로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행복한 줄 알았던 그녀에
게 이런 두려움이 숨어있다는 것이 안쓰러웠다.

[절 때 그런 일은 없을 거다...아마 너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엘라우드도 견디지 못해..그
리고 너의 기억이 안 돌아온다고 현재 불편한 게 있니? 너무 기억에 매달릴 필요는 없단
다.]

그녀는 레베카를 올려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이...화났죠...내가 너무 화내고 못때게 굴어서...]

[아니. 지금은 아이들과 놀고있어. 헤르와 이레네에게 싸여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단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리를 끌어 모았다.

[회장님과의 면담을 신청했는데요...]

비서는 석현에게 난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장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고 남아있는 인원
도 모두 회장의 직통번호를 모르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럼 반이나..잭이라도..]

[모두 대동하고 떠나셨어요. 저희도 갑자기 떠나셔서...]

석현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회장실을 흘긋 보았다.

[안 오신지 2주 째입니다. 아마 디트로이트 댁에 계신 것 같은데....그쪽이랑은 연락을 할 방
법이 없어서요.]

[아..제가 회장님의 번호를 알고있습니다. 제가 연락하죠.]

석현은 바쁘게 말하고는 회장비서실을 빠져 나왔다.
2주나 집에서 일 처리하고 안 올 정도면 회장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안 나타날 사람이 아니었다.
석현은 예정보다 빨리 지사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에게 면담을 요청했던 것인데 회장의
스케줄에 갑자기 변동이 생겨버렸다.
그는 재빨리 전화번호를 뒤지기 시작했다.

[응...받지 말아요...분명 당신 찾는 전화일거야...]

그는 감기로 열이 많이 나는 은조의 중얼거림에 신경 쓰며 그녀를 품에 꼭 안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그는 순간 움찔하며 은조를 내려보았다.

[무슨 일인가.]

[[이곳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조금 빨리 진행이 되어서요. 회장님에게 보고를 끝내면 바로
지사로 가고싶은데요. ]]

엘라우드는 인상을 쓰며 은조를 내려보았다. 아픈 은조를 두고 가기가 여간 껄끄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석현이 재발로 떠나겠다는 데 그걸 늦추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은조가 그가 간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낼 것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살짝 은조를 밀고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며칠 기다려 주게...우선 아내가 지금 아프니까...]

전화를 타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겠습니다. 행복하시군요. 부럽습니다.]]

석현이 전화를 끊고 그는 멍하니 벽을 보았다. 행복하시군요 부럽습니다....
그 행복을 잡기 위해...그는 그녀를 희생시켰다...
마음의 고통 따위 몰랐던 시절이 어쩔 때는 그리웠다. 그렇다면 이런 양심의 해묵은 이야기
따위는 들어오지도 않았을 태니까.

요즘 들어 생각에 잠긴 그를 곧잘 보는 은조는 인상을 쓰며 그의 시큰둥한 옆모습을 보았
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난 투명인간 인 것 같아.]

엘라우드는 은조를 흘긋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냥...이런저런...잡다한 것들...]

은조는 그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는 한동안 그를 올려보았다.

[고민 하지 마요....무슨 일인지 모르지만...난 당신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해 마음 아파요...동
생 때문이에요?]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나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동생....그래...그럴 수도 있지...하지만...난 ....나 자신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는 한동안 다시 침묵했다.

[은조....동생을...버리고...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기고...사람들이 날..뭐라고 한다고 해도...난 당
신만 있으면 된다는 걸 알아줘....사랑해...정말 사랑해..]

그녀는 그의 쓸쓸한 음성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에 뭔가가 무겁게 내려앉는걸 느꼈다.
그는 뭘 두려워하는 걸까...
그가 고민하는 건 무엇일까....
그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다가 조급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난...당신 없으면 안돼...사랑해...]

눈발이 창가를 물들이는 동안 그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은조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동안 보다가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감아쥐고는
그의 무릎에 올라가 앉았다.

[사랑해요. 엘라우드...내 모든걸 걸고...]

엘라우드의 눈에 쓸쓸한 뭔가가 지나더니 그가 눈을 피했다. 그리고는 쓰게 미소지으며 그
녀의 허리를 안았다.

[잊지마...은조...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내가 당신과 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영원히 잊지마.]

-37-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야?]

레베카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요. 두분..정말 잘 되셔야 해요. 그이가 추운 날은 레베카의 관절염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고 결정했어요. 크루즈 여행..]

[사실 네가 갈 여행 이였잖아?]

레베카는 계속해서 여권을 만지작거리며 은조를 보았다.

[그이 일이 있어 뉴욕에 돌아간 걸요...그리고 우리는 다음에 가면 되요. 뉴욕 집으로 오셔야
하는 것 알죠? 저도 조만 간에 뉴욕으로 갈거에요.]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말고..걱정마. 그럼...]

그녀는 매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 잘 부탁해요...제게는 어머니 같은 분이세요..]

레베카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은조를 보았다. 그리고는 얼른 돌아서 눈물을 닦았다.

[넌 정말 엔젤이야....날 어머니라고 부르다니...]

은조는 웃으며 레베카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레베카가 차를 타고 떠나자 마자 그녀는 극심한 외로움에 빠졌다. 집은 너무 크고...엘라우드
는 없었다. 급한 일이라며 그녀가 감기가 어느 정도 차도를 보이자 뉴욕으로 가버렸다. 일주
일 정도 걸릴 거라며...
은조는 유모와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녀는 나직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래...아이들이 있어 일주일은 금방 갈 거야...내가 너무 엘에게 기대는 거야..>

엘라우드는 건물 너머로 보이는 하얀 풍경을 멍하니 보고있었다.

[회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는 반의 목소리에 돌아보며 잭과 함께 들어오는 석현을 보았다.

[어서 오게. 그래 살집은 구했나? 아니면 사옥을 쓰려나?]

석현은 엘라우드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차마 좋아할 수 없는 사내...강한 남자...하지
만 은조가 사랑했던 남자...
석현은 자신이 이제서야 인정한 사실을 말없이 받아 드렸다.
은조의 머뭇거림...어쩌면 은조가 그렇게 떠난 것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다른 남자를 품에 안고 사는 여자를 의심해야 하는 자신의 인생도 비참했을 것이기 때문
에...
석현은 엘라우드의 얼굴을 한동안 보았다.
그를 포기한 은조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이야기를 하고싶었다.
그때 빨리 보내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그리고 이제는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인
생을 살아가려는 자신의 마음을...

[회장님...개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엘라우드는 서류에서 눈을 때고 석현을 보았다.
그리고는 반과 잭에게 눈짓으로 나갈 것을 명령했다.

[말해봐.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뭐든 들어줄 태니...]

석현은 한동안 엘라우드의 얼굴을 보았다.

[은조...사랑했습니까.....그때 당시..은조...사랑했습니까...]

엘라우드의 얼굴이 굳어 들어가더니 심기가 불편한지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석현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너무 오래된 이야기니까요. 그럼...다음 번에 만남이 마지막이겠군
요. 그럼 다음에..]

엘라우드는 석현의 나가는 뒷모습을 한동안 보았다. 마음속에 다시 한번 그의 양심이라는
것이 소리를 냈다.

<남의 행복을 갈취하고 나니..행복해? 아니면 언제 깨어질지 몰라 불안해? 넌 너 자신을 지
옥으로 내몬 거야...넌 그녀를 영원히 가지지 못할 거다..언제나 반쪽만 가지겠지....>

그는 눈을 꽉 감았다. 아니..그녀는 자신의 여자다...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라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며..하루빨리 일이 끝나길 기원했다.

[그러니까...아빠가 안 오는 거야...]

이레네의 앙큼한 목소리에 은조는 한숨을 쉬었다.

[아빠는 바뻐.]

[이레네의 생일에 안 오는 아빠는 이레네가 오길 기다리는 거야. 아빠가 이레네의 생일에
안 온적 없어.]

은조는 책을 내리고는 이레네의 울어서 퉁퉁부어버린 얼굴을 보았다.

[좋아 이레네..그럼 아빠 회사는 말고 아빠 팬트하우스에 가는 거야. 거기서 생일 파티를 하
자 어때 좋지?]

이레네의 얼굴이 금세 환해지더니 왠지 모를 앙큼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완전히 바뀌어버린 경호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뜻을 전했고 경호원들은 흔
쾌히 그녀의 뉴욕 행을 허락했다.
은조는 헤르의 물건과 이레네의 물건을 정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불여우에게 또 당한 기분이라니까...]

[은조가 뉴욕에와?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이미 비행기는 출발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회장님.]

엘라우드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한동안 서있었다.

[석현은 언제 떠나지?]

[이틀 후 입니다.]

엘라우드는 인상을 쓰며 한동안 있었다. 은조의 성격으로 보아 팬트하우스 밖은 얼씬도 안
할 것이다...
모험...

[공황으로 마중가. 오히려 화내면 마음상해 할거야. 아니. 내가 직접가지.]

엘라우드는 몸을 일으키며 초조하게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는 바쁘게 어딘 가로 전화를 하고는 뭔가 지시를 했다.
반은 엘라우드와 보조를 맞추며 묵묵하게 그의 통화 내용을 들었다.

은조는 공황을 빠져 나오다가 검은 남자들로 둘러싸인 남자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몰래
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헤르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경호원들과 함께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빠!]

꼬마여우가 금세 알아보고는 소리소리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엘라우드의 표정도 금세 밝아
져서는 딸아이를 끌어안고는 눈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했다.

[어서와 은조.]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일주일이 지나서 왔어요...음...당신 감시하러...]

그는 싱긋이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잘 왔어 여보.]

그녀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그와 함께 공황을 빠져 나왔다.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당신 놀라게 할 일이 없군요.]

그녀는 짐짓 우울한 듯 말을 했지만 그의 표정은 금방 엄숙해 졌다.

[날 놀릴 생각은 마. 난 놀라고 싶지 않아. 생각보다 심장이 약해.]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인상을 썼다.

[농담이죠?]

그도 마주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팔 안쪽을 쓸었다.

[농담인지 아닌지는...나중에 보면 알잖아? 안 그래...]

그녀는 그의 은근한 유혹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그의 눈에 나타난 어두운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그는 창문을 보았다. 어서어서 이틀이 지나고 뉴욕에서 은조를 잡고 이야기해서 진실을 알
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었다.

-38-

[음...이곳이 당신의 요새예요?]

엘라우드는 코트를 받아주며 자신의 펜트 하우스를 흘금 보았다.
회사가 바로 보이는 건물...그는 속으로 올라오는 쓴 물을 삼키며 미소지었다.

[미안해요 연락도 없이...이레네가 너무 오고싶어해서요...그리고 나도 당신이 너무 보고싶었
어요. 화내지 않죠?]

그는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했다.

[나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보고싶었어. 우리꼬마들은 반과 나갔으니 우리 둘 뿐이군.]

은조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이뻐요....]

그는 그녀가 보는 경치를 바라보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당신보다는 아니야. 요즘도 머리 아파? 의사는 뭐라고 하지?]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조그마한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실망하는 거야?]

은조는 몸을 틀어 그를 마주보고는 그의 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에요...더 이상 미련 없어요..돌아오지 않을 기억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
하는 것 보다 난 당신과 우리아이들에게 신경 쓰고 싶어요.]

엘라우드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안심하는 자신을 느끼고는 쓰게 비웃었다.
은조는 그의 눈에 나타난 안도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이대로가 더 바람직한 가족의 모습이
라고 단정지었다.
자신의 기억이 돌아와 그를 괴롭힌다면...그건 용서 못 할 일이었다. 그가 무엇을 잘못했던..
그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이고 그녀의 아이들의 아빠였다.

[당신은...소중한 사람이에요....내가 살아왔던 시간들 보다..더 소중한 사람...]

그녀는 단언하며 그에게 이야기하고는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사랑해요...엘라우드 이상하게..당신만 보면 그것을 상기시켜 줘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요.]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언제나..확인 시켜 줘....당신의 사랑을 날 사랑하는 당신을...]

[안녕 석현씨. 오빠랑 미팅은 어땠어?]

석현은 노바를 보며 미소지었다. 남편인 로드릭은 그녀의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좋은 조건으로 해결해 주시더군...그리고 로드릭...]

[로리라고 불러요 그녀를 여러모로 도와주신 점 너무나 고맙게 생각합니다. 약혼녀를 찾고
계시다구요.]

석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그녀가 숨어버린 것이라면 더 이상 찾지 않을 겁니다...어쩌면 저의 존재가 거북해
서일수도 있으니까요. 참. 회장님 부인이랑 통화했는데...]

순간 노바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은조일까...아니면...

[아주 상냥하신 분이더라. 회장님 너무 행복해 보여...정말 사랑하는 것 같았어. 그런 회장
님...처음 이였거든. 그에게 그런 부분이 있다는 걸 알고 나니..더 이상 미워할 수가 없더라.
너도 오빠에 대한 안 좋은 감정 버려.]

노바는 석현의 상냥한 이야기에 눈물이 핑글 돌았다. 이 남자는...어쩌자고 매사 좋은 부분만
을 보는 것일까....

[응....나 이번 주에 스페인으로 떠나 석현씨는 언제 떠나?]

[나도 이번 주..]

그는 자신의 책상을 손바닥으로 다독거렸다. 그리고는 서랍 속에 손을 넣어 은조의 사진을
빼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의 모습그대로 23살의 그날 그대로였다.
이제 정말 작별을 할 시기였다. 앞으로 한 5년쯤 지나면 그녀와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자연
스럽게 인사를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석현의 눈가에 눈물이 감돌았다.
노바는 그런 석현의 손을 잡아주었다.

[윤...정말 유감이군요. 약혼녀의 일은..거기다 약혼녀가 나와 노바의 부주의로 당신을 떠났다
니...저도 당신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낍니다.]

로드릭은 우울하게 말하며 그를 보았다. 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녀가 오해하기 전에
엘라우드에게 마음을 빼앗긴걸 알고 있었기에...

[내일이면 회장님 더 이상 볼일도 없겠군...아...신문과 TV빼면 말이지.]

그는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하고는 노바를 돌아보았다. 노바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를 보
았다.

이레네와 엘라우드는 열심히 성을 만들고 있었고 어린 헤르는 열심히 블록을 던져서 그들을
방해하고 있었다.
은조는 웃음을 머금고 식당 벽에 기대 그들을 보았다. 저녁을 먹으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들
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 부를 수가 없었다.
순간 그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의 다정한 눈빛을 보며 아직도
남편을 보면 가슴이 뛰는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레네 엄마가 부르는구나. 저녁 먹어야지?]

그는 헤르를 끌어안으며 이레네에게 말하고는 식당으로 걸어왔다.

[부르지 않고 왜 서있었어?]

[너무 보기 좋아서요...당신이 내 아이의 아빠라는게 너무 행복해서요..]

엘라우드는 아기를 그녀에게 넘기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고마워.]

그녀는 식당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일 아이들이랑 회사에 가보고 싶어요. 그래도 되요?]

순간 그의 발걸음이 느려 지더니 천천히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
무표정이 없었다.

[지루한 곳이야. ]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싫어한다...

[하지만 오후 늦게라면 시간을 낼 수 있어...오후에 보지.]

그녀는 그의 한마디에 풀죽었던 강아지에서 금방 되살아났다.

[오 고마워요 엘. ]

그녀는 재빨리 말하고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는 키들거렸다.
엘라우드의 얼굴에 서린 걱정은 모른 체...

[아내가 회사에 오고싶어해 윤과의 일이 끝나는 대로 대려오도록.]

반은 인상을 쓰며 엘라우드를 보았다.

[눈이 많이 왔습니다...]

[그럼...내가 연락할 태니....아니 3시가 좋겠군. 3시에 대리고 오면 될 꺼야. ]

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경호원과 기사에게 말을 하고는 그를 대동해서 회사로 출발했
다.

은조는 엘이 했던 약속을 생각하며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
그가 회사로 와도 된다고 했다. 그건 그가 어느 정도 자신의 세계에 그녀를 받아들인다는
뜻일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벌떡 일어나 이레네와 헤르가 잠든 방으로 갔다.
가정부가 와서는 아기의 기저귀는 갈아둔 상황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과 처음 가는 회사...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알
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녀는 혼자의 고민에 빠져 아기들의 얼굴을 보고있었다.

눈 때문에 교통은 엉망이었고 석현은 약속보다 2시간이나 늦어 회사에 도착했다.
석현은 힐끔 시계를 보며 자신의 출발 날짜를 연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늦으셨군요.]

약간 초조해 보이는 반을 보며 석현은 어리둥절했다. 항상 빈틈없고 어느 모로 보나 회장과
가장 비슷한 분위기의 인간이라고 생각한 그가 이토록 당황하는 일은 무엇인지...

[죄송합니다. 길이 너무 혼잡해서요. 회장님께 이 서류를 건네 드릴려고....]

그는 밀리다 싶이 회장실로 들어섰고 역시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엘라우드를 보았다.
엘라우드는 뭐에 그래 초조한지 그와의 면담을 건성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는 엘라우드에게 그간 고마운 점들을 이야기하고 노바가 뉴욕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
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들어갔다. 그러더니 한동안 아무 말이 없이 있다가 그에게 다시
보고하라고 이야기하고는 초조한 듯 시계를 보았다. 이상한 하루였다.

엘라우드는 거의 2시 30분이 된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는 반에게 눈짓으로 은조가 출발하는
시간을 늦추라고 명령을 내렸다. 곳 반은 신속하게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이제...그만 가봐야 겠군요. 짐을 싸다가 말아서요. 내일 떠나기로 했는데..짐이 많아서 늦추
어 졌지만...하여튼 빨리 떠나고 싶습니다.]

엘라우드는 벌떡 일어나 성급하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더니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지막이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장실을 빠져 나왔다.
석현이 나오는 순간 반이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이미 집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사와는 통화가 안되고요.]

엘라우드는 순간 자신의 소중한 왕국에 금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회장실로 바로 올라오라고 했지 않아?]

반은 고개를 저었다.

[은조씨가 아이들과 구경을 하겠다고....]

[바로 내려가지....뭔가 모르게 불안하군...]

그는 자신의 이마가 촉촉할 정도로 식은땀이 흐르는걸 느끼며 이마를 쓸었다. 그리고는 재
빨리 반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반에게 계속 전화하라고 시키고는 소매가 걷어진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바쁘게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이미 석현이 탄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30여분 남았다.....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초조하게 자신에게 주문처럼 이야기했다.

-39-

[이레네 뛰면 안 된다. 알았지?]

그녀는 미끄러운 도로에 이레네를 내려주며 당부했다.
이레네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고 덩치 큰 경호원들은 요 깍쟁이 아가씨 때문에 고생이
여간이 아니었다.

[한 30여분 남았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기사가 친절하게 물어보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회사를 구경하고 싶어요 먼저 들어가죠. 그리고 그이 놀라게 해주고싶기도 하구요.]

그녀는 웃으며 걸어서 커다란 건물로 들어갔다. 유리로 된 로비가 눈에 보이자 이상한 기분
이 들었다. 와 본적이....

[마미!! 너무 예뻐요!!]

이레네는 소리지르며 허둥대는 경호원을 해치고 회전문으로 뛰어들었다.
헤르는 잭의 품에 안겨 박수를 치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렸다.

[아가씨 조심 하셔 야죠 이레네 아가씨!]

잭은 큰소리로 이레네를 부르고는 그녀가 잘 걸을 수 있도록 팔을 내밀어 주었다.

[고마워요 잭.]

은조의 인사에 잭은 얼굴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은조는 그가 결혼기념일에 선물한 원피스에 모피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고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으로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며 흥분한 딸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석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이제 그녀와 자주 만나던 회사의 로비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벽에 기대어 미소
지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멈추자 그는 내려서며 환한 그 공간을 미소를 머금고 보았다.

[마미!!너무 예뻐요!!]

작은 여자아이의 경쾌한 목소리에 그는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4살에서 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까만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바람처럼 뛰어다녔다.
회색의 원피스는 가장자리가 모피로 둘러싸인 호화로운 것으로 웬만한 집 아이로서는 상상
도 못할 옷이었다.
아이를 쫓고 있는 경호원을 보던 그는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말로만 듣던 회장의 딸아이인
듯 했다.
회장의 경호원들은 진땀을 흘리며 아이가 넘어질까 봐 뒤따르고 있었다.
아이의 구슬 같은 웃음소리를 듣던 그는 아련하게 은조의 밝은 웃음소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로 그윽한 웃음소리....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코트의 어깨를 덮은 여자가 아이를 향해 미소지어 보이고 있었
다.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여자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많이 본듯한 옆모습....
그리고...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문득 멈추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부드러운 미소가 머금은 얼굴은 시간의 흐름에
도 변화가 없어 보였고 오히려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은...조....]

그는 자신의 눈에 눈물이 핑 도는걸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부름을 들은 것인지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조...]

차라리 계단으로 뛰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엘라우드는 엘리베이터 안을 서성거렸다.

[전화는?]

반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보았다. 이렇게 초조해 보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엘리베
이터 문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석현의 뒷모습...그리고 달려오는 이레네....

[데디!!!]

그는 얼은 듯이 은조와 석현의 뒷모습을 보았다.
은조가 이레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쪽으로 천천히 걸
어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다가오는 모습을 그리고....석현을 스치는 모습을 보았
다.

[은...조?]

석현의 흐린 목소리...

[엘 기다린거에요? 이레네가 너무 회사를 구경하고 싶다고...]

[은조!]

그녀는 엘라우드에게 말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엘라우드는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아버렸다.
그를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석현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내였다...

석현은 그녀가 웃으며 다가오자 드디어 자신을 용서하기로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녀가 누군가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고...마치 그가 거기서 있는걸 모른다는 듯이 그를 지나
쳐 다른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 남자...엘라우드에게....

[은조!]

그는 그녀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엘라우드의 강한 손이 그녀를 휘감아 품에 안아버렸다.
그는 엘라우드의 소유욕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멍하니 그렇게 서있었다.

[그녀는...내 아내다....상관 마라.....윤...]

엘라우드의 씹어 뱉는 것 같은 목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감정이 저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며 그녀와 엘라우드가 자신을 놀리고 비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은조! 어떻게....넌..]

그녀는 엘라우드의 품에서 몸을 비틀어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남자를 보았다.
저 사람은 누구기에 자신을 저렇게 슬프게 부르는 걸까...
그리고 엘라우드는...
엘라우드는 더욱 꼭 그녀를 품에 안았다.

[밖으로 모셔..반...]

반은 곳 석현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끼고는 그의 걸음을 재촉했다.

[이럴 순 없어 은조!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 거야!]

은조는 그 남자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엘...저 사람 날 알아요...날 놔줘요...엘?]

그는 아무 말 없이 멀어지는 석현을 보고있었다.
그가...자신을 속이고 있다...그가 뭔가를 숨기려고 한다...

[놔줘요 엘!]

엘라우드는 간신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 사람은...누구죠?]

반에게 강제로 끌려나온 석현은 반을 노려보았다.

[위선자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당신은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니까.]

반은 차게 이야기하고는 그의 팔을 놔주었다.

[날 속이는 것도 모자라 회사까지 말아먹었군...]

반은 차갑게 석현을 보았다.

[당신은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더 이상 김 은조라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
시오.]

반은 그렇게 말하며 멀어졌다.
그는 한동안 유리로 된 로비안을 보았다. 엘라우드가 그녀와 다투는 듯한 모습이 잠시 보이
고는....엘리베이터 너머로 사라졌다.
은조가 자신을 속였다...
엘라우드에게 간다는 말 한마디 했더라도 이렇게 가슴에 상처가 되지는 안았을 것이다..
뭐가 그렇게 두려워 자신을 피해 달아났던 것일까...
그는 은조를 만나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레네 아가씨. 이쪽으로..]

반이 이레네를 대리고 나가자 그녀는 그를 휙 돌아보았다.

[누구죠? 날 아는 사람이죠? 그렇죠?]

그녀가 그를 보며 이야기 시작했다.

[알려고 하지마...제발..]

그는 쓰게 이야기하고는 등을 돌렸다. 그녀는 엘라우드의 긴장으로 뻣뻣한 등을 보았다.

[나에게...숨기는 것이 뭐죠...엘?]

그는 그녀의 메마른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을 저주하고 싶었다. 눈이 내린 날씨를..
그리고 늦게 들어온 석현을...빨리 출발한 기사를...막지 못한 자신을...

[숨기는 것...없어..]

그녀가 가만히 있다고 생각한순간 그의 등에 뭔가가 휙 날아와 부디 쳤다.
그는 등을 돌려 자신의 아래 떨어진 곰 인형을 보았다.

[난...알아야 해요...그 사람...너무 슬퍼 보였어.....엘...날 못 믿어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뭘
숨기는 거예요?]

엘라우드는 천천히 인형을 주워 들었다.

[뭘...알고 싶어.....알면..당신이 얼마나 슬퍼질 이야기인데....나만 욕먹으면 된다구...그러니...알
려고 하지마...]

은조는 얼은 듯이 그를 보았다. 상냥하던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비정하고
차가운 모습....마음속 어디에선가 이게 엘라우드의 진짜 모습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눈물이 차오는 것을 느꼈다.

[난...이해할 수 없어요...아니...이해가..안...]

그는 쓰러지는 그녀를 끌어안고는 정신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은조! 은조! 반. 어서 반!]

엘라우드는 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어떻게 잡은 그녀인데....어떻게 잡은 행복
인데....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40-

의사와 마주한 그는 찹찹한 심정이었다. 의사는 여러 사진을 다각도에서 보고있었다.

[두통을 호소할 때부터...생각은 했었지만....]

엘라우드는 고개를 들어 디트로이트에서 급하게 온 의사를 보았다.

[지금 미세스 레귀자모는 썩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위치에 혈청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충
격이나 그 외 심적인 불안 요소를 느끼면 정신을 잃는 경우가 종종 생길 겁니다. 지난번도
그녀의 가중한 심리적인 불안 때문에 혼절한 것이지요...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그 스트레스가 그녀를 이런 상황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엘라우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속은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은조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는 그로서는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요양이나 입원을 하시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의사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엘라우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 속의 산소가 모두 빠져나간 기분....
그리고 머리 속은 검은 장막이 감겨 있는 기분....
은조는 눈을 감고 열까지 해아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리 기억을 뒤집어도 로비에서 만난 그런 남자는 기억에 없었다. 그는 누구이고 왜 그런
눈으로 자신과 엘을 본 걸까...
그리고 엘은 왜 그 사람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한 걸까....
은조는 다시 눈을 감았다.

[깨어난 것 알아....]

어두운 엘라우드의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한쪽 벽에 기대어 서서 허공을 응시하는
그를 보았다. 그의 눈은 메말라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그녀는 너무나 싫었다.

[엘...]

[궁금한 것...내가 말해 줄께...그러니..너무 기억하기 위해...애쓰지마..당신...생각보다....]

그녀는 그의 무관심한 듯이 울리는 목소리를 듣다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난 당신 부인이에요 모르는 사람처럼 이야기하지 말아요. ]

그녀는 일어나려다 두통에 다시 무너졌다. 그가 얼른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주었다.

[엘라우드....난 누구죠? 그리고 그 사람은 누구죠?]

엘라우드는 그녀의 숙여진 목덜미를 말없이 보다가 서서히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렇게...중요해?]

은조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등지고 돌아섰다.

[그는....나의..부하이고..나의 연적이야....내가 말한 적 있지....당신은 내 여자가 아니었다고....
그 남자가 바로 당신의 전 약혼자였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 기다려요. 난...]

그는 손잡이를 힘겹게 잡았다.

[더 이상...말하지 말자...집에 가서..이야기하자...]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이는 가는 파장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아까 본 그 남자가...자신의 기
억 속에 한자리도 남아있지 않은 자가....
그녀의 약혼자였다니....

집으로 돌아온 그는 먼저 아이들을 보고는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그런 그가 답답했다. 전 약혼자라는 그 사람은 그녀에게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일
까...
그녀는 서재 문을 열고는 그를 보았다. 그는 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이야기 좀 해요 엘라우드.]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보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술잔을 빼앗았다.

[지금은 나랑 이야기해요 술은 나중 문제고요.]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외면...그가 이 일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내게...얼마만큼의 거짓을 말한 거예요...엘?]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하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그의 외면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사람이 약혼자....라는 것만 비밀인가요..아니면...날...사랑했다는 것이 거짓인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엘라우드는 마음속의 고통을 누르며 천천히 눈을
떠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여자를 보았다.

[내가...당신에게 한 거짓은...모두야...모두다 거짓이야.....당신은..날 사랑한 적도...날 원한 적도
없었어....]

그녀의 눈에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녀를 달콤한 말로 유혹해 진실을 숨
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길길이 날뛰었다.

[왜......왜...내게 이러는 거예요...엘? 왜...거짓말해요? 난...당신 사랑해요...전 약혼자라는 사
람....나...기억 안나요...당신처럼.....명확한 느낌도 없어요.....왜...거짓말해요? 네?]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그녀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두려워...당신의 기억이..언제 돌아올지...아니면 당신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질까
봐...너무 두려워.....]

그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당신이..이대로 기억 없이 내 곁에 머물러 주길 원했어...그도 누구도 만나지 않고...나를 사
랑하며...하지만..이제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던 그를 만났고...과거를 알고싶어해....기억이 돌아
오는 건 시간문제일 테지..아무리 많이 다치고 많이 아프다고 해도....하지만 먼저 요양부터
해..마음속의...그런 앙금은..지우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서 빠져 나왔다.

[아니요. 난 당신을 보면 더 과거를 알고싶어요...왜..당신이 거짓을 말하는지....당신을 사랑하
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지...그럼..우리가 같이한 시간은 뭐예요? 우리가...함께.....이레네를 가
진 것은?]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녀는 그가 거짓으로 만든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는 뭐라고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조....당분간..이곳을 떠나서..요양을 하자...]

[아니요 그러지 않아요..난 온실의 화초가 아닌 걸요..알고 싶어요.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
어....믿지 않을래..]

엘라우드는 그녀의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보았다.

<떠나지마.....>

[어디로...가고 싶은 거야..뭐를 알기 위해...]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해 은조...>

[난......모르겠어요...]

은조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말들은 모두가 거짓 같았고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었다. 머리
속은 망치로 때리는 기분이고 처참했다. 그가 자신을 어디론가 보내려 한다는 사실에 그녀
의 속은 타 들어갔다.

[날...보면 더...기억하고 싶어진다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았다.

[네.....당신이 말하는 과거는 믿지 않아요...난 내 느낌을 믿어요..당신을 사랑해요....]

그는 눈을 감았다. 정말 사랑한다면...자신이 만든 거짓 속에서가 아니라 정말 그녀가 그 당
시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럼...내가 떠날께.....억지로 기억을 더듬지마...그럼 당신건강에 나빠...당신은 다 났은 것도
아니야. 은조...내가..떠날께...]

은조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황급하게 올려보았다.

<잡아 줘....제발....>

그는 소리 없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 없이 그를 올
려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거짓 위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기억을 덮어둔다고 해서 해결 될 일
은 없었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아 떠나길 원한다면 보내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가장 큰 슬픔이 된다 하더라도.....
그녀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그렇게 사라지는 그를 보았다.
그가....그가 떠난 것이다....자신을 두고......그녀는 반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느린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문이 열리고 닫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떠났다....

[엘라우드.......엘....]

그녀의 눈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바닥으로 쓰러져 몸을 둥글게 말고 하염없이
울며 그를 불렀다.

-41-

석현은 비워진 술병을 옆으로 밀어버리며 눈을 감았다. 이런 만남일 줄은 몰랐다....
은조는 그를 기만하고....엘라우드와 둘이서 자신을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토록 잔인한 여자라니...
석현은 시린 마음으로 술을 마시다 아직도 자신의 가방 위에 올려진 은조의 사진을 들어 찢
어버렸다.
자신의 기억 속의 은조는 사라져버리고 거기에는 간악한 모습으로 자신을 희롱한 다른 여자
가 들어차 있었다.
노바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의 오빠기에...
흥...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그는 삐뚤어진 심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술을 퍼마셨다. 자신이 타고 갈 비행기가 떠나버
린 것도...어느 하나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오직 생각나는 건 자신을 보고 모르는 척 그냥 지나치던 은조의 놀랍도록 아름다워진 뻔뻔
스런 얼굴이었다.

[왜...왜...은조야...어째서...]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울려대던 벨소리가 멈추더니 이번에는 초인종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벌써 삼일 째인가.....
석현은 비틀거리며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싸늘한 표정의 반이 서있었다.

[흥...뭐야...이제 날 죽이기라도 할 샘인가?]

그는 어눌한 어투로 이야기하며 반을 조소했다. 순간 반의 차가운 눈에 살기가 비치더니 그
의 팔목을 비틀어 잡았다.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싶어 윤....난 회장님이 아니니까....하지만 회장님이 당신을 곱게
모셔오라고 했으니...]

그는 석현을 아이처럼 질질 끌어 들어가서는 그의 자켓을 던져 주고는 다시 그렇게 끌고 밖
으로 향했다.
석현은 분하지만 힘으로 반을 당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술을 빨리 깨는 게 좋을 거야.]

반이 차게 말했지만 석현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여자가 시켰나? 돈 많은 남편에게 날 봐주라고?]

반의 눈이 험악해지더니 그의 턱을 아플 정도로 꽉 쥐고는 눈을 마주보게 했다.

[한번만 더 사모님을 나쁘게 말하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아....아무리 회장님이 당신을 곱게
대려오라 했어도 알겠어?]

차는 돌고 돌아 엘라우드가 예전에 살던 집에 도착했다. 겨울눈에 뒤덮인 집은 넓기만 할뿐
사람이 사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석현은 떠다밀리다 싶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미안하군..이렇게 오게 해서...자네가 카나다로 가지 않았다는 걸 알고 대려오라고 했어.]

엘라우드의 목소리는 낮고 음침했다. 그는 얼마 전에 봐왔던 회장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곳
에 예전에 알던 그 차가운 남자가 서있는걸 알고는 흠칫해서 멈추었다.

[할말이 뭡니까. 당신은 이미 모든 걸 가지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나의 약혼녀까지.]

엘라우드는 슬프고 메마른 눈으로 석현을 보더니 그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그녀를 나쁘게 말하지는 말아 줘.]

석현의 눈에 광폭한 감정이 번들거렸다.

[책임은 두 사람이 지는 거요. 회장...당신이 꼬드기고 그녀가 동조한 거겠지.]

[내 아내를 욕하지 마라...그녀는 욕먹을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으니...날 얼마든지 욕해도 좋
아...하지만..내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참지 않겠어.]

엘라우드도 지지 않고 차갑게 대구했다.
그러더니 석현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은조는 아무 것도 몰라....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 나야...그러니..날 욕해..]

석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라우드를 보았다.

[무...무슨....]

엘라우드는 침통한 표정으로 석현을 보았다.

[자네는 내 아내를 만나고 싶어하고 만나겠지....하지만...그녀에게 충격을 주지는 말았으면
해...]

엘라우드는 손을 늘어트리고는 한숨을 쉬며 멀리 벽을 보았다.

[은조는....과거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아.....나 때문에...사고가 났고....그리고 모든 걸 잃어 버
렸어...자신이 누구인지...어디에서 왔는지....모국의 말이 어떠했는지 까지....]

석현은 정리가 안 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고의 후유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언어 장애와 두통이 그 증상이고....지금 혈정이 분
포한 자리가 안 좋다는 판단을 받았어...심한 충격은 무리지...그녀는 요양을 해야해...]

[그...그렇다면......]

엘라우드는 고개를 들어 석현을 올려보았다.

[그녀에게 화내거나 하지 말아달라는 말이야..나에게 화를 내도 좋아..그러니..]

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전에 떠난다고 전화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녀는.....먼저..떠난...]

엘라우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과오를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이 너
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런 자만심 따위 버리고 이자의 발
아래 쓰러져도 좋았다.

[그녀는...내가...보낸 거야...자네와 헤어지라고..내가..시킨 거야...]

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왜? 왜 은조가 자신을 떠나야 한 건지 알 수가 없는 그였기에...

[난...그때당시 아이가 윤의 아이인줄 알고...그녀를 위협했어....그녀는 아무 것도 몰랐는데.....]

[어떻게....그럴 수가 있었죠?]

석현의 떨리는 목소리는 감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회장이 그녀를 찾은 건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왜 회장이 그녀를 찾은 거란 말인가...

[그녀는....내 여자니까....]

석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회장의 입에서 자신의 여자라니...

[마지막까지...그녀는 윤에게 대답을 듣겠다고 버텼어...자네를.....사랑한다고...날 믿을 수 없다
고...]

석현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은조가...어떻게 회장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회장이 어떻게
그녀를 다루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쁜...]

석현의 주먹이 말보다 빨랐다. 엘라우드의 얼굴이 휙 돌아가더니 그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
다. 석현이 일어 날 때의 반동으로 의자는 저만치 떨궈져 있었고 그 소리에 놀란 반이 문을
열고는 험악하게 석현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그만둬 반. 나가 있어...]

반은 주춤대더니 그에게 불만이 가득한 말을 던지고는 어쩔 수 없이 방을 나갔다.
엘라우드는 고개를 들어 석현을 마주보았다. 입술이 찢어져서 피가 흐른 입가에는 슬픈 미
소가 어려있었다.
엘라우드는 천천히 일어서 석현을 마주섰다.

[날 때려서 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하지만 은조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는
마..그녀가 나쁘다는 소리도...모두 나의 잘못이니까...그녀를 욕하지는 말아주게.]

석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엘라우드에게서 울며 도망쳤을 은조의 얼굴이 겹치자 한순간 그녀
를 오해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는 엘라우드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자신이 진정으로 옹졸
했다는 걸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으아아아아.......]

석현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는 머리를 감싸안으며 흐느끼는 석현을 보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엘라우드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의 끝을 보는 그의 기분은 이렇게 두들겨 맞
는다고 해결 될 것이 아니었다.

석현은 어느 정도 자신이 진정되자 옆에 앉아 멍하니 밖을 보는 엘라우드를 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 황량함을 그렇게 보고만 있었다.

[왜...그렇게 한 거죠...당신의 위협에....수그러지지 않은 그녀가...미운거였나요...아니면..날 벌
주고 싶었나요...]

엘라우드의 입에 자조적이고 회의적인 미소가 어렸다.

[아니....나 자신이 미웠어....은조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그녀를 원하고 내심 그녀
가 날 사랑하길 바라는 나 자신이....그녀를 통제하고 싶었어...어떻게 해서든....윤 석현이라는
남자를 지우고싶었지.....]

엘라우드는 담배를 한 개피 물고는 석현에게 건네었다. 석현도 그에게 담배를 받아 들고는
멍하게 밖을 보았다.

[은조는......기억이 돌아올 가망성이 없나요...]

엘라우드의 입술에 서린 미소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한동안 침묵을 일관하며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머금었다.

[요양하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정상으로 돌아올지도 모르지....만약...그녀가 기억이 돌아와...
날 거부하고 날 증오한다고 해도....난 그녀를 보낼 수 없어......]

엘라우드의 얼굴에는 아픔이 가득했다.

[날 미워할 것을 뻔히 알며.....그녀를 옆에 두는 나 자신이 비참하지만...그녀가 기억을 한다
면...내게 남는 건 그녀와의 결혼이라는 서약서 한 장뿐이지...명목상의 남편이라도..그녀가 내
여자라는 하나로 만족해야 할거야..하지만 그녀에게 고통을 주는 나라는 남자의 얼굴은 들이
밀고 살수 없겠지...]

석현은 담배를 피며 엘라우드의 고뇌로 가득한 얼굴을 보았다. 이 남자.. 누가 뭐라 해도 웃
어넘길 수 있는 권력과 돈과 힘을 가진 남자가....사랑이라는 너울 때문에 이토록 초라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그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은조를 되찾으리라는 마음도....은
조를 사랑한다는 마음도....

[그럼...은조를 떠날 건가요...]

엘라우드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입가에 흐른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석현을 돌아보았다.
석현은 처음으로 엘라우드의 눈을 마주보았다. 남자로서...한 명의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로서
엘라우드는 누구보다 나약해 질 수 있는 상태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엘라우드의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사랑은 그가 아는 어느 사랑보다 간절한 것이었다. 석현
은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런 엘라우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은조를 다시 찾는 것에 아
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숨겠지...그녀가..나에게 이혼을 요구 못하는 곳으로...그리고 아이들이라는 명목으
로...그녀를 대하겠지....]

[힘들지 않을까요...]

엘라우드는 다시 멀리를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힘들어도...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 나라는 것은 지워지지 않아...난...나의 죄를 어
쩌지 못하니까...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짓밟은 죄가...쉽게 지워지지는 않을 거니까...]

석현은 엘라우드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엘라우드의 사랑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이 굴지의 남자가 지키려는 사랑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의 사랑 따위....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강한 엘라우드의 모습으로 호령하고 독선을 떤다면 오히려 홀가분하게 그녀에게 진실
을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석현은 눈을 감았다.

-43-

은조는 아이들이 움츠려 든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어 주었지만 아이들은 그녀를 슬슬 피했
다. 울며 보낸 시간동안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생각을 더듬어 보았지만 그녀의 머릿속
은 진공상태의 그것처럼 아무 것도 남아 있이 않았다. 엘라우드가 떠나고.....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끔 반이 오고가면....그녀는 정말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인지 궁금해졌다. 엘라우드
가 그리웠다. 그를 이렇게 사랑하는데....그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멀어진 그가 야속한
반면 모든 열쇠를 자신의 예전 약혼자가 쥐고 있을 거란 생각에 그녀는 마음까지 싸늘하게
얼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은조.....
아니 엔젤 레귀자모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엘라우드 레귀자모의 아내이다...
그녀에게는 가정이 있고 그것을 지켜야 했다.
그녀는 일어서 반에게 급하게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는 가까운 친척이 있었냐고 물어보고는
그에게서 겨우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친척들이 있다는 것에 묘한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그가 어쩌면 그녀에게 가족에 대해
거짓을 말한 건..그녀가 충격을 받을까봐서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속삭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우선 그들과 통화를 해야했다.
그녀는 재빨리 전화번호를 찾아 그곳의 번호를 알아냈다.

[[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혹시...은조라고...]

[[은조...혹시 은조니?]]

그녀는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자신의 이름 이였다.

[죄송합니다.....지금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그러니 영어로 말해 주세요...]

한동안 전화선 넘어로 숨을 멈추는 것처럼 다급한 소리와 함께 아무 말이 없었다. 답답한
순간이 지나고 놀람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말이...진실 이였구나....은조야...난 작은아버지야...레귀자모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네가 고국어까지 잊은 줄은 생각도 못했단다....]]

은조는 눈물이 핑글 돌았다. 어떻게 이 답답함을 이야기 해야할까,....

[저....그곳에 찾아봐도 될까요...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다시 침묵이 지나고...

[[괜..찮겠니? 아프지 않겠어?]]

그녀는 눈물이 흐르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전..좋아요...단지 댁에 피해가 갈까봐...]

[[피해는...레귀자모씨덕에 교구가 날로 번창한단다.....기다리마...]]

그녀는 전화를 끊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이 번지는걸 느꼈다.

작은 교회였다. 하지만 내부는 무척이나 화려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
올 누군가를 기다렸다.
순간 누군가 자신을 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은조야...]

그녀는 긴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늙은 남자였다. 흰머리가 중간중간 보이는 자신과 같은
인종의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전 사고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알고 있단다...이미 들었어....레귀자모씨가 널 찾은 날 알려줬단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글 돌았다.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어요...]

작은아버지는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조의 손을 잡았다 이상한 친밀감..그리고 뭔
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
은조는 자신의 발길이 끌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계단...그리고 이층으로 오르는 반질반질한 부분을 손으로 쓸어가며 천천히 계단을 걸
어 올라갔다.
그리고 하얀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숨을 훅하고 들이마셨다.

[거기는...네 방이었단다..네가 떠날 때 그대로 두었단다...]

그녀는 충격으로 흐려진 얼굴로 작은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은조는 자신의 방이었다는 곳에 들어와서 옷장을 열어보고는 한동안 멈추어 서있었다. 그곳
에는 다른 옷은 아무 것도 없이 단지 드레스 한 벌이 걸려있었다.
아련하게 그녀의 코끝을 감도는 향기로운 냄새처럼 그녀는 향수에 젖어들었다.

[이것만 남기고 떠났단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아버지라는 사람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작은어머니라는 분은
너무 울어 이야기를 못할 정도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모국어로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조용히 앉아서 밖을 보았다.
그가 왔었다....
그녀는 문득 그 기억에 놀라 다시 거리를 보았다.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무척이나 슬펐던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노트를 꺼낸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이 낙서한 이름을 보았다.
온통 그의 이름이었다. 적 다가 만 것도 있었고 적 고는 지워 버린 것도 있었다.

[난.....]

작은아버지는 그녀가 보던 노트를 한동안 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는 눈물이 흐른 눈으로 작은아버지를 올려보고는
노트를 품에 안았다.

[알고 싶어요...제가 약혼한 남자에 대해...]

작은아버지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리고는 침대로 가서 앉더니 작은 서랍을 열어 사진틀을
건네어 주었다. 거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그녀가 밝게 웃으며 회사에서 본 남자
와 사진을 찍은 것이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만져보았다. 오누이.....마치 오누이 같은 사진....
정말 이 남자를 사랑해서 약혼한 걸까.....정말?

[석현이는....아주 착실한 남자지...난 너희들이 정말 결혼할 줄 알았다...그런데 석현이 해외로
파견되면서 삐걱거린 것 같아...아니면 그전부터...]

작은아버지는 한동안 창을 보았다.

[그래...엘라우드 레귀자모라는 남자가 나타나면서...네가 무척 흔들렸던 것 같아. 한나라에
오래 머물지 않던 남자가 이곳에 아주 자주 왔었단다...기자들이 나중에 그가 결혼하고 이
집에 들이 닥쳤지...넌....그와 만나면서 흔들린 것 같아....네가 홍콩을 가기로 한 그전날 밤
에..그가 왔었단다...]

작은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동안 보았다.

[난...은조...네가 사고가 났을 때..그리고 네가 떠났을 때...오히려 레귀자모와 헤어질려고 하
는 줄 알았단다..하지만..잊을 수 없었어...너와 그가 그렇게 끌어안고 있던 장면을..정말 헤어
질 수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있던 장면을...]

은조는 눈물이 그렁거리며 작은아버지를 보았다.

[널 찾지 않았단다..어쩌면 그에게 연락이 오고는 난...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지..일주일간 석현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있던 네가...석현과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널 책임진 그가 당연하게 생각되었단다...]

그녀는 일순 가슴이 싸늘해졌다. 일주일간 다른 남자..책임...어쩌면..그는 이레네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창을 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너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너의 약혼자에게 함구했다.]

[그이가...시켰군요..말하지 말라고...]

침묵....그녀는 그 침묵에 더 많은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엘라우드와 함께 일주일을 보낸
그녀를 작은아버지가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그녀의 과거를 지움으로 엘라우드에게 돈을 받
았다는 걸....
작은아버지는 힘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믿고 싶지 않았다...
엘라우드가 거짓을 말할 리 없었다...
그를 믿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강제로 안았다고 말하며 몹시 괴로워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고의로 그녀를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조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창을 보았다.
엘라우드가 보고싶었다...더 이상 그가 밀어내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바보...왜 몰라요....나의 과거보다 날 더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이 당신이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 이라는 것을....]

은조는 두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창틀에 기대었다. 자신의 과거는 어떻게 되었던 상관없었
다. 그를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이제는....내가 당신을 찾아야 하나요 엘라우드..그런거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하며 자신이 내려놓은 사진틀을 보았다. 사진 속에 웃고있는 남자...
이 남자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전 약혼자라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그래서 엘라우드가 무슨 잘못을 했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42-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맥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엘라우드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던 그녀는 그를 사랑했
고 그는 자신의 남자였다.

[그는 날 사랑해.....그는 날 보내고 싶어하지 않아...]

은조는 일어서 엉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리고는 방을 나섰다. 그녀가 나타나자 잭이 당장에
따라 왔다.

[그이 어디 있나요...]

잭은 난처한 듯이 그녀를 한동안 보았다.

[숨기지 말아요 그이 어디 있어요 난 그이를 만나야 해요.]

잭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처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
했다.

[잭!]

[내...알겠습니다 모시도록 하죠...]

멀찍이 떨어진 저택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음산하게 떠오른 달만큼
이나 음산한 저택은 그녀의 가장 심약한 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게 뒤
틀린 그림자가 튀어나와 그녀의 목을 조르는 기분....

[나 혼자 들어갈 깨요...오늘 집에 가지 않아요. 엘이 여기 있다면..저도 여기 있어요...]

은조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곧 잭이 따라 내리며 은조를 뒤따랐다. 그는 연신
전화를 하고있었다. 안 봐도 뻔한 사실....
멀리 반이 보이더니 정중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반..]

반의 어두운 얼굴은 그녀가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십시오...지금은 좋은 시기가 아닙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싸늘하게 이야기하는 반을 보며 마음한구석에 얼음이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난...그의 아내에요..좋건 싫건 그건 내가 정하는 거예요. 반...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그를 만나야겠어요.]

그녀는 황급하게 걸음을 옮겨 집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반이 뛰어와 그녀의 어깨를 쥐고는 당겼다.
그녀는 반을 노려보고는 그의 손을 매정하게 쳐냈다.

[뭘 생각하는지 모르지만...난 이런 상황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난 충격만 받으면 쓰러지는
그런 여자 아니에요. 그리고 전 약혼자가 나타났던 뭘 하던 상관 안 해요 내가 걱정하는 건
엘이에요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있는지 모르지만 난 그와 이야기 해야해요.]

반은 은조의 결의로 가득한 눈을 보고는 힘없이 길을 터 주었다.

[그분....놀라거나 하지 마시길....그리고...당신이 정말 그분을 사랑한다면..떠나지 마십시오....잡
지도 못하는 회장님이 가엽습니다.]

은조는 문득 반을 돌아보았다. 왜 모두들 그녀가 떠난다고 생각하는 걸까....

[반...그가...내가 떠날 만큼 잘못한 것이 있나요? 나만 모르는 뭔가가 더 있나요?]

반은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는 그녀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보
였다.
그녀는 의구심을 떨구지 못하고는 어두운 실내를 향해 발걸음을 때어놓았다.
어느 곳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2층으로 오르다가 문득 멈
추었다. 방 하나가 눈에 보이는데...그 방이 무지하게 싫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에 위험이라는 빨간딱지를 단 방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방의 의자에 걸터앉은 그가 보였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지...피지 않던 담배를 비스듬
히 물고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 마음 아팠다.
왜 그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뒤흔들 정도로 아픈 모습으로 다가올까...누군가 안아줘
야 할 것처럼 애처로운.....다가가서 안아줘야 할 것 같은....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여자...그 여자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다 신경전 때문에 그녀가 있
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난 오빠가 그런 인간인지 몰랐어...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의심은 했지만....]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지?]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는 공허했다. 은조는 얼음처럼 방문 앞에 멈추어 있었다.
그의 동생.....
분명 그의 동생이었다.

[난 오빠처럼 비열한 인간은 처음이야 오빠는 하트 따위는 없어 그러지 않고서야 석현씨를
그렇게 무너트릴 수는 없어.]

어둠의 배일 뒤에 앉아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키자 날씬한 몸을 감싼 고급스런 옷이 보였다
긴 검은 머리카락에 그와 같은 푸른 눈.....하지만.....

[오빠가 무슨 짓을 했는 줄 알아? 남의 약혼녀를 갈취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사업마저 무
너트렸어.]

그는 다시 길게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의 눈에 서린 어떠한 외로움에 그녀의 마음이
저렸다. 왜 저 여자는 동생이라고 하면서 그를 미워하지?
그녀는 그를 미워한다...아무도 그이에게...사랑을 주지 않았어...모두들 그를 무서워해.....
은조는 차가운 가슴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감정에 흠칫했다. 모두들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너무나 마음 아팠다. 소리내어..그를 부를 수도 없었다....그를 감쌀 수도 없었다....

[오빠는 인간이 아니야 날 그렇게 보내려고 한 것도 무리가 아니야. 은조는 어떻게..그럴 수
있지? 그녀 또한 오빠의 거짓에 놀아난 거야 아니면 돈에? 우습군 난 은조가 정말 좋은 여
자인줄 알고 석현씨를 포기했는데...]

[그녀를 욕하지마. 그녀는 사고로 아무 것도 몰라. 날 얼마든지 욕해도 좋지만 은조를 욕하
는 건 나도 용서 못해! 그리고 말은 바로 하렴. 석현을 양보해? 너에게 그런 고상한 성품이
있니? 우리 레귀자모 집안에 그런 관용이 존재해?]

엘라우드가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그 반동으로 쓰러졌다. 엘라우드는 적개심이 가득한 눈으
로 동생을 보고있었다. 그의 동생 또한 그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고있었
다.
나 때문이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순간 짝하는 소리와 함께 엘라우드의 얼굴이 핑글 돌아갔다.

[야만인...냉혈한...]

[그만둬요!]

은조는 그 여자가 그의 뺨을 때리는걸 본 순간 더 이상 과거로의 여행의 문이 열리지 않는
걸 느끼며 소리쳤다.
그가 먼저 그녀를 돌아보았다 놀람과 고통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는 그의 애처로운 눈을 보다가 그에게 뛰어가 안겼다.

[은조....]

[은조 어떻게...마침 잘 왔어요 이야기 좀 해요.]

그 여자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돌리려고 했다. 은조는 그 여자의 손에 심한 적
개심을 느끼며 휙 돌아서 그 여자를 때어냈다.

[이야기 하고싶지 않아요. 난 당신을 모르고 안다고 해도 이야기 하고싶지 않아요. 어떻게
오빠인 사람을.....자신의 친오빠를 그렇게 대할 수 있죠? 아무리 그가 잘못을 했다고 해도
당신만은 그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떻게...당신을...엘라우드를 그렇게 미워하
는 거죠? 그는...그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은조의 눈 안 가득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노바는 너무나 당황한눈으로 은조를 보았다. 그리고 예전에 은조가 노바에게 했던 말이 떠
올랐다. 한집에 살잖아요? 그가 다친 걸 몰랐어요...라고 하던....
은조가......

[은조...]

은조는 손을 올려 그의 손자국이 난 뺨을 만졌다.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얼굴....
그녀는 그의 품에 꼭 안겼다.

[가세요....그가 당신을 용서해도...이제 제가 용서 안해요. 그리고 과거는 과거 에요. 전 약혼
자라는 분께 전하세요. 제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도...그분께는 가지 않아요. 그리고....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이상하게 당신을 보면 화가 나요 그리고 기분이 나빠요 당신이 엘을
미워했다는 걸 알게 된 지금...그래요 그것만 기억나요...당신이 엘을 좋아하지 않은 것....그의
마음속에 많은 상처 중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당신을 보고싶지 않아요 가주세요.]

노바는 당황한 얼굴로 은조를 보았다 은조는 그에게 안겨 있었다 노바를 보려고도 하지 안
았다. 은조는...엘라우드를 사랑하고 있었다....
맙소사....은조는 예전부터...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 속에 노바를 안
좋게 기억하는 것이다...엘라우드를 미워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노바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가 떨구었다.

[은조...당신은 오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오빠에게 속고 있는...]

[그만 둬요 난 누구의 말도 믿지 않아요 내 마음이 하는 소리와 그의 말을 믿어요 그러니
가주세요 더 이상 그에 관해 나쁘게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단호한 은조의 목소리에 노바는 할말을 잃어 버렸다.

떨리는 은조의 손이 그의 허리를 꼭 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노바는 그를 노려보고는 나가
버렸다 아침나절부터 찾아온 노바가 그를 끔찍할 정도로 볶아댔다. 그는 지치고 힘들었다.
자신의 잘못이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하지만 그녀를 잃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품에 안겨 맹렬하게 자신의 편을 들던 은조...
그는 그녀의 머리를 꼭 안았다.

[엘...아파하지 말아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꽉 안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한없는 고통이
가득한 그의 눈.....그리고 포기....

[그만....은조....이런 장면을 봤다고...날 용서하지마......아직 우리사이에는 시간이 필요해...당신
이 모든 걸 알고 나서...돌아올 수 있다면...돌아 와줘...]

그는 억지로 은조를 때내며 뒤돌아 섰다. 은조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보고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그렇게 돌처럼 서있었다.

[너무나..미워요...전 약혼자라는 사람...그냥...이렇게 당신과...아무 것도 모른 체...살아가면 안
돼요? 난...당신만 있으면...과거 따위는 필요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랑해요...엘라우드...떠나지 말아요.......더 이상 과거 따위..기억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을 깨
요...내 과거가 당신에게 그렇게 힘든 일이라면....나 아무 것도 알고싶지 않아요....엘...제발...
돌아와요....나.....]

엘라우드는 천천히 뒤돌아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흐느끼며 그를 보고있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그의 상처 난 입술의 가장자리를 만졌다. 멍이 들고 부
어 버린 입술을 한동안 만지던 그녀는 더 크게 울먹였다.

[당신이 아픈 건 싫어요...엘라우드...바보처럼 이게 뭐에요...강하던 당신은 어디로 숨어버리
고..이렇게 숨어 있는 거예요.....]

그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때어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돌아가 은조...아이들이 기다려.....우선은 요양이 중요해...]

[날 계속 피할 건가요?]

그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녀는 그를 한동안 보았다. 그리고는 그를 따라 나서다가 그를 앞질러 그의 앞을 막았다.

[뭐가 거짓이죠? 난 당신이 무슨 거짓을 말했던...그리고 그들이 무슨 거짓을 말하던 속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날 떠나려고 한다면...내 허락 하에서 에요. 알아요?]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마...나더러 떠나라고 할거야.....분명...]

그는 애매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휙 돌려 먼저 층계를 내려가 버렸다.

-44-

은조에게 연락이 온건 엘라우드를 만난지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그는 은조의 머뭇거리는 전화를 끊으며 멍하니 밖을 보았다.
은조와의 만남...만약 엘라우드와의 만남 전이였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은조...어떤 모습일까...그의 편을 맹목적으로 들까..아니면
미안하다고 눈물을 호소할까...어떻게 해야할까..그에게 돌아오라고 진실을 말해야 할까...
은조는 아무 것도 모르고 엘라우드의 곁에 있다. 그러니 진실을 말해 선택은 그녀가 하게
해야한다..
석현은 그녀와 함께 있던 아이들을 기억했다. 엘라우드가 웃으며 이야기하던 아이들....그 아
이들이 자신과 은조의 아이일수도 있었다. 석현의 마음에 쓴 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은조는 그에게 오겠다고 했었다. 만약 은조를 엘라우드가 납치하지만 않았다면 그녀와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석현은 그 대답을 알 수 있었다. 매일 은조가 멍하니 하늘만 봐도 의심했을 것이고
회장과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관계를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석현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조를 만나면 뭐라고 할까...우선 과거의 일을 이
야기해야 할 것이다 만약 엘라우드가 잘못된 선택이라면 그것을 돌려야 했기에...

석현은 뭐라고 이야기할지 망설이다가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은조는 헌화용 촛불이 밝혀진 귀퉁이에 2달러 짜리 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
를 하는 것을 한동안 보던 그는 그녀가 기도를 마치자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는 발걸음마다  자신의 불안한 심리가 반영되듯이 요란한 소리가 교회 안에 울려 퍼졌다.

[안녕...은조...]

은조는 우뚝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기억 속의 그녀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은조의 얼굴은 회사에서 본 그날의 행복한
모습은 사라지고 여리고 슬픈 모습이 가득했다.
그녀는 한동안 그를 보더니 머뭇거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손가락을 비트는 것으로 보아 심
기가 무척이나 나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은조의 상냥하고 귀여운 모습은 사라지고 거기에는 어색하고 어쩔 줄 몰라하
는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은조는 머뭇거리더니 그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는 그런 은조를 한동안 보며 그녀가 권한 자리에 앉아 처음 보는 것 같은 그 여자를 보았
다.

[저...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양해를 바래요...]

석현은 말없이 은조를 보았다. 당황한 은조의 모습에서 그는 예전의 은조를 찾고 있는 자신
을 발견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석현...그렇게 부르면 됩니다.]

은조는 자신의 전 약혼자인 이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뭘 기대한 걸까...
이 사람을 보면 마술상자에서 삐에로 인형이 튀어나오듯이 기억이 돌아올 줄 알았던 걸까...
그녀는 쓰게 생각하며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망설이며 이 남자를 보았다.

[미안해요....전...당신을 기억할 수가 없어요....정말. 마주 대하면 기억이 돌아올 줄 알았는
데....]

그녀가 손가락을 비틀며 이야기하자 석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은조는 얼른 그의 손에서 손을 빼며 그를 보았다.
은조의 거부반응에 움찔한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놀란 듯 피하는 은조에게 뭐라고 할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이 그는 무척 서글펐다.

[기억이...하나도 나지 않아...그런 거야?]

그녀는 그의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을 보았다. 이 사람이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졌다. 하지만....그는 엘라우드가 아니었다.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싶은 마음을 접으며 간신히 이야기했다.

[전...그래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한가지 알고 싶어요. 전...엘라우드가 한 이야기만
알고 있어요. 그는 당신이 나의 전 약혼자라고 했고...내가 당신을 사랑했으며 엘라우드를 피
했다고 했어요...난 진실을 알고 싶어요. 제가 정말 당신을 사랑했나요? 우리는 어떻게 만났
죠? 엘라우드는? 정말..엘라우드와 난 아무런..상관이 없는 사람인가요?...그런가요?]

은조의 간절한 눈망울을 보는 석현의 마음은 천 갈래로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엘라
우드에게 의지하는 그녀의 얼굴....그에 대한 사랑은 모두 그녀 속에 잠든 것인지...아니면 그
전에 죽어버린 것인지...

<아니야 은조...넌 그를 사랑하지 않아...넌 나의 여자야....넌...>

은조는 떨리는 자신의 손을 꼭 마주잡았다. 이 남자가 악의를 가지고 거짓을 말한다면...하지
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이 남자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막연한 미안함이 그녀를 내리누르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전 약혼자고...그에게 자신이 어떤 여자로 보일지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다.

[그렇게도...레귀자모씨가...중요한가...]

그가 뜨문 이야기하자 은조는 고개를 들어 석현을 마주보았다. 그녀의 눈에 나타난 서글픈
감정이 그의 마음에 화살이 되어 박혀 들어왔다.
진심으로 엘라우드를 사랑하는걸...이렇게 뼛속까지 느끼게 될 줄 몰랐기에 그는 더욱 마음
이 싸늘해지는 기분과 불구덩이로 빠지는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한동안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여자가 앞에 있는데...만나게 될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애태우던 여자가 옆에 있는데...그는 손도 잡을 수 없는 여자가 되어
돌아온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가슴속에 그와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양초가 아직 숨어있다면 찾아내서 다시 한번 불
을 밝히고 싶었다.
그는 눈을 감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당신과....대학 초년생일 때..만났어.....당신이..이곳에 온건..나와의 결혼 때문이었고...그리
고 나의 상사인 엘라우드를 만나게 된 거야...]

석현은 간신히 이야기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은조를 보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정말 그녀를 돌려 받고..그녀에게 미안함을 말하고 되찾고 싶었다.
은조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석현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 안 어디에도 그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자신이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엘라우드는.......그는...]

은조는 그의 머뭇거리는 말을 들으며 귀를 막고 싶은 마음과 싸웠다. 그녀는 엘라우드를 믿
고있었다. 석현이 나쁜 게 아니라 자신이 나쁘다고...자신이 엘라우드를 사랑하기에 석현을
두려워하는 자신이 나쁘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런 은조의 모습을 보던 석현은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뺨을 쓸어보았다.
그녀는 흠칫해서 멀어졌다.

[당신은...은조......홍콩으로 오지 않았어.....엘라우드를 사랑하면서...내게 오는 것이.....]

석현은 거기까지 힘겹게 이야기하며 미소지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그가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를 고통 속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그녀..그리고 그녀와 엘라우드....
그녀가 엘라우드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던 건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지금의 그녀가 엘
라우드를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를 되찾기 위해 그녀를 엘라우드로 부터 때어낸
다면 정말 고통스러운 건 그들 세 사람이라는 걸 석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조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를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은 순간은 이미 오래 전이잖아....
단지 그녀가 엘라우드와 함께 라는 것에 화가 난 거야..그는 자신에게 나직한 이야기를 하며
그녀의 모습을 새기려는 듯이 하나하나 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은...내가...그렇게 찾아 헤매던......날....만나러온 그 여자가 아니군....그렇지?]

그녀는 그의 흔들리는 눈망울을 보며 마음이 아파 왔다.
그녀는 뭐라 할말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자 그가 고개를 저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내가 알던 은조는...여리고...남의 말에 상처받고 슬프면 마구 울던 여자야...그리고 뭔가 일
이 생기면...나부터 찾던 여자야...당신처럼...자신의 사랑을 찾지 못하면 찾으려고 하는 여자
가 아닌......책임감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려고 하던 여자가 나의 약혼녀였던 여자
지....]

은조는 그가 자신을 보며 마치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듯이 자신들의 관계를 이야기하는걸 들
었다.
그의 눈에서 흐른 눈물은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어와 화선지에 물이 젖어 올라가듯이 퍼져나
갔다.

[은조...당신은 내가 알던 은조가 아니야.....이제 당신은 어리고 자신의 감정을 몰라 허덕이던
여자가 아니야...두 아이의 엄마고...사랑하는 남편이 있고....과거는 과거로 묻어두는 것이 나
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단지..그가 당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랐다는 것이..그리고
내가 당신의 사고를 몰랐다는 것이..난 너무나 마음 아파...은조..미안해..진작에 그에게 당신
을 보냈다면...그런 사고도 없었겠지.... 은조.....날...용서 해줄래...]

그의 눈에는 다른 언어가 지나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아 오해하고 떠
난 그녀..그리고 엘라우드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도 자신을 믿어준 그녀에게 그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왜....날 감싸주죠......난...당신이 날 감싸주고 있다고 생각해요...내가 아주 나쁜 짓을 한 건
뻔한데...두 사람다...나만 생각해요......난...정말.....]

그는 은조의 눈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마주보았다.

[난...이제 당신을 잊을 꺼야..내가 당신을 찾은 건 너무 화가 나서였어...내게 연락도 없이 사
라져버린 당신이 그리고 나의 연적이던 그의 품에 있던 당신이.....행복해...은조..그리고...날
용서해...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날...그리고 당신의 결혼생활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날...]

은조는 눈물로 흐린 그의 얼굴을 보았다. 말로 못할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녀의 눈에서 구슬
이 되어 흘러내렸다.

[미안해요...정말...당신에게는 뭐라 할말이 없어요...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올렸다.
이제 그녀와 마지막 이였다. 영원히 가슴에 숨겨야할 자신의 사랑이 이제 다른 이에게 가는
걸 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가 행복하도록 그는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퇴장해야 했다.

[아니...사고가 나지 않았다고 해도...당신의 선택은 엘라우드였을꺼야....항상 행복해...은조...영
원히....이제...난 다른 곳으로 가야해. 그러니 그를 찾아가 그리고 그를 용서해 당신을 사랑하
는 그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가기 전에...마지막으로 한번만...안아봐도 될까....]

그녀는 그의 젖은 미소를 보며 자신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는걸 느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한 체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가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이 사람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하는구나.....그건...엘라우드의 잘못이 아니야...내가....
그녀는 눈을 감으며 그의 등에 손을 둘러 안았다.
그의 흐느낌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간간이 쏟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가 그녀의 어깨를
밀어서 자신에게서 때어냈다.

[이제...널 기다리는 그에게 가야지.... 뒤 돌아보지마...그게 행복이면 잡아...그리고...나에게 정
말 미안하다면...정말 행복하게 살아...나도 이제 당신이라는 짐을 벗고...새로운 사랑을 할 꺼
야....]

그녀는 그가 억지로 미소지으며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요...당신은...정말 좋은 사람이에요...나보다 더 훌륭한 여자가...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꺼에요...행복...하세요...]

그는 은조의 가는 팔목을 잡고 한동안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살짝 대
고는 눈을 감았다.

[어서..가야지.....그를 떠나게 하지마...비록 그를 미워했지만...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이야...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마지막까지 잡고있는 그녀의 팔목에서 손으로 그
의 손이 미끄러졌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 매달린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고마워요.....석현씨....정말...고마워요..]

석현은 은조를 천천히 노아 주었다.
은조는 그에게서 빠져 나와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
더니 어느새 그녀는 뛰어서 밝은 밖의 공간으로 햇살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사랑을 찾아가기 위해 그렇게 그의 인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석현은 뒤에 남아서 말없이 자신이 7년간 찾아 헤맨 여자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삶에서 그의 마음에서.....
석현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45-

은조는 다급하게 반을 찾았지만 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은조는 작은아버지에게 대충 이
야기하고는 황급하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과거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 과거가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정말 그녀자신
이 그를 버리게 되는 결과라면...그래서 모두가 불행해 진다면 그런 과거에 매이고 싶지 않
았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니까....
그녀는 잭을 다그쳐 지난번에 갔던 뉴욕의 외곽 집으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녀
가 본 것은 건물을 철거하는 모습이었다. 은조는 놀라고 당황해 인부를 붙잡고 물어보았지
만 모두들 모른다는 대답뿐 이였다.

[그가 어디에 있는 거죠? 잭..]

잭은 난처한 듯이 그녀를 올려보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얼른 차안으로 이끌고는 뉴욕을 향
해 출발했다.

[회장님은...출장을...가신다고...]

은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드디어 이 남자가 자신을 버리는 구나 라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잭...언제요...언제...]

잭은 난처한 듯이 계속 우물거렸다. 은조는 자신의 울로 된 원피스 자락을 꼭 여며지며 눈
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그를 돌아오게 하고 말 것이라는 마음이 그녀의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잭은 은조의 여린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회장이 그녀가 힘든 상황이라며 그녀가 아프면
즉각으로 병원으로 대리고 가라던 말을 기억하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프시면 병원으로...]

[난 아프지 않아요...날 안 아프게 할 사람은 그이뿐이에요...알고 있죠? 그러면서...그럼 반에
게 전해요...이대로 차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리겠다고...만약 그와 만날 수 없다면...정말 죽어
버린다고.]

잭은 기절할 듯이 놀라 뒤에 앉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차 문을 꽉 잡고는 눈을 크게 뜨
고 잭을 보며 표독스럽게 이야기했다. 평상시에 보던 은조의 상냥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세스...]

[날 아이 다루듯이 말하지 말아요 잭 난 레귀자모에요. 한다면 할 수 있어요 지금 뛰어내려
요?]

잭은 어쩔 줄 몰라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곳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네었다.

[[은조씨 그러시면 회장님이 얼마나 힘드실 줄도 생각 하셔 야죠.]]

[그가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 고민 혼자 하라고 해요. 그는 항상 나한태만 떠나면 안 된다고
하죠...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 에요 그가 정말 출장을 간다면..난...]

한동안 전화기 넘어로 침묵이 흘렀다.

[[그분은...지금 친구 분 댁에 계십니다....은조씨를 만나기에 너무 고통스러우셔서...잠시....]]

[거기가 어디죠?]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워낙에 유별나신 분이라...]]

[반...]

반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잭이 압니다. 라 하르의 아파트라고 하면요...]

그녀는 약간은 희망적인 느낌이 드는 반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빨리 잭에게 말했다.
잭은 신중하게 차를 회전시키며 어두운 거리를 가로질렀다.

[쳇...나버리고 결혼해서 잘사나 했더니...이게 무슨 꼴이야.]

[그만 바가지 긁어 너도 지겨워진다.]

엘라우드는 건조하게 말하고는 어두운 뉴욕의 하늘을 보고있었다.

[ 저택은 뭐 하러 허물어? 나한테 팔라니까. 안 그래도 조카를 위해 하나 사두고 싶었는데.]

엘라우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리고는 술잔을 빙글 돌렸다.

[그 집은...더 이상 그 존재가....필요 없어서야..진작에 허물었어야 했어...그 집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 악마가 하나 풀려난 기분이었어...부끄럽고...죄스럽고...해야할 일이야.]

마노엘은 혀를 차며 자신의 대학동창인 유일한 친구를 보았다.

[죽을죄라도 지었어? 천하의 엘라우드가 그런 말을 하게? 그럼 나 같은 인간은 죽어? 왜 그
래? 그 집은 너의 어머니를 위한 집이라고 내가 팔라고 해도 안판 너야.]

엘라우드의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마노엘은 자신이 중심부로 다가가고 있다는 걸 느꼈
다.

[어머니의...집이었지...그리고 난 거기서 어머니의 아들로서 부끄러운 짓을 했고...난 나의 죄
에 대한 사죄로라도...그 집을 헐어야했어...내가 그녀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어머니와의 추억
도....보잘 것 없는 거야....]

마노엘은 엘라우드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다.

[자식..그러니 나랑 살자니까. 왜 여자랑 얽혀서...]

엘라우드는 기겁을 하며 마노엘을 때어냈다.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야. 왜 이래 밤의 제왕이...]

마노엘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는 고양이처럼 침대 위를 굴렀다.

[너랑 자기에는 침대가 비좁지. 줘도 안 해 여자보다 뻑새니까. 하지만 엘라우드 넌 여태 여
자에게 매인 적이 없잖아? 뭐...라몰이야 본디 마노아에게 뻑간 놈이라 뭐라 말할 수 없지
만....넌 안 그랬잖아?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겠다던 맹세는 거짓이군...]

엘라우드는 마노엘의 악의 없는 장난에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벽에 기대었다.

[보고싶지?]

마노엘이 나직하게 물었다. 엘라우드는 순간 눈을 감았다.

[보고싶은...정도가 아니야...제발..빌어도 좋으니...그녀의 얼굴을 멀리서라도 볼 수 있길 바
래...그녀를 만지지 못한다면...그녀가 스쳐지나간 곳에 내 손이 다을 수 있었으면 해....너무
그리워...]

마노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엘라우드를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엘라우드의 이
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떤 여자가 그의 사랑을 거부한 걸까....

[자도록 해 내일 정말 나와함께 러시아에 갈 생각이라면...약줄까? 불면증이 심하던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술을 마저 비우고는 마노엘을 보았다.

[아니..약에 의존하면...꿈에서도 그녀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하고싶지 않아...]

[이 미련퉁이 친구야...망설이지 말고 뛰어들어가 레귀자모 답게 굴라구. ]

엘라우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노엘을 침대에서 밀어냈다.

[그만 나가 자야겠어.]

마노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을 나갔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엘라우드는
자신의 왼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말없이 보았다. 이것과 같은 반지를 낀 여자가 그의 아내
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반지에 입술을 눌렀다. 미치도록 보고싶지만...그에게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석현
을 만났을 것이다...석현이 교회로 출발한 순간 그는 마노엘의 출장에 따라가기로 결정을 내
렸다. 러시아에도 물고를 트기 위한 동행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녀가 이혼을 요구할 때 멀
리 떨어져 있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석현은 뭐라고 말했을까...그녀는 기억을 찾았을까....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했을까....언제 이
혼해야할지 그를 찾고 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은조가 석현의 품에 안겨있는 꿈을 꾸기 시작한 이래로 잠들 수가 없
었다.
자신의 아내인 그녀가 석현에게 자신에게 보였듯이 반응을 보이고 안겨드는 모습이 그려지
면 처참할 정도로 우울해졌다. 얼마동안 이런 환상에 시달려야 할까...그녀가 자신을 매정하
게 차버리는 꿈과 석현에게 안겨있는 꿈...더 이상 그런 꿈은 꾸고싶지 않았다.

마노엘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밖을 보았다.

[뭐야?]

경호원이 놀란 듯이 그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웬 여자가 레귀자모 회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꼭 만나야 한다고...]

[엘라우드를? 흥...그는 피곤해서 잔다고 하거나 아니지 그는 이미 출장 갔다고 해.]

마노엘은 지겨운 듯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분명 짬보 노바라고 생각하며 진저리를 쳤다. 이
쁘면 뭘해...
그는 가운을 벗고는 바지바람에 음악을 틀었다. 엘라우드가 서성거리지 않는 저녁을 원하는
그였다. 그 부인이라는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여자이기에 엘라우드의 속을 그렇게 긁
는 건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

-46-

단호한 경호원들의 거부에 은조는 가만히 자리에 멈추어 서서 엘리베이터 문을 노려보았다.
라 하르는 대단한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거대한 아파트는 마치 요새 같아 보였다. 팬트하우스도 아닌 아파트를 한층 전채를 가지고
있는 남자...그 남자가 라 하르였다.
은조는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잭의 품에 안겨 망연자실해 서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그가
여기에 있는데...내일이면 러시아로 떠나는데....

[잭...반을 불러요...]

[반은 지금 이레네 아가씨와...]

[유모가 있어요 어서요 그는 라 하르와 알고 있어요. 반을 불러요.]

잭은 단호한 은조의 목소리에 바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은조는 눈을 감았다. 울면 안 된다....그를 만나 설득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불안한 그림자 따위...더 이상 가지고 살지 않아...더 이상...엘라우드...그래...그
만 생각하자. 내게 소중한 것만 기억하자.>

그녀는 몸을 바로 새우며 하염없이 엘리베이터를 보고있었다.
만약 오늘 만나지 못한다면...내일 아침에 만나야 하니까..기다려야 했다.

반은 황급하게 차를 새우며 넥타이를 당겼다. 회사 일이 마치자 마자 이번에는 은조의 일이
라니...잭의 말로는 은조가 아주 아파 보인다는 것이었다.
반은 만약 은조가 쓰러지는 날에 떨어질 불호령을 생각하면 아찔한 지경이었다.
반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며 진저리를 쳤다 마노엘의 성미를 건드리기도 싫고 은조의 우는
모습을 보고싶지도 않았다.
반의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은조의 여린 뒷모습 이였다. 은조는 흔들림 없이 계속 엘리베이
터만 보고있었다.

[은조씨.]

은조는 눈물이 가득 매달린 눈으로 반을 보고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반은 달려가 은조의
손을 잡았다. 은조는 무너지듯이 그의 품에 안겼다.
뭐 때문에 온 걸까...석현을 만나자 마자 엘라우드를 찾았다고 했었다. 혹시..석현이 무슨 말
을 해서...이혼을 결심한 건 아닐까...

[그를 만나게 해줘요...]

은조는 여리게 이야기했다. 반은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은조는 흐느끼며 그의 품에 안겨 한동안 있었다.

[뭐 때문 에요...회장님 출장가시면..근 6개월 정도 안 오실 겁니다. 나중에 말하셔도...]

은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을 보았다. 매정한 말에 질린 듯이...

[어떻게....6개월이라니......]

반은 차가운 표정으로 은조를 보았다.

[중요한 일이 아니시라면...]

[내겐 중요해요 반.]

반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팔을 꼭 쥐었다.

[사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을 겁니다. 요양모시고 가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그가 반도 없이 출장을 계획하다니...그렇다면 정말 멀리 간다는 말인가....

[요양 따위 개나 줘요! 반. 난 그를 만나야 해요.]

[여긴 라 하르의 아파트입니다. 만나고 싶다고 함부로 만날 수 없습니다. 집으로 가시죠.]

반은 어떻게든 은조를 막고 싶었다 만약 무너진 회장에게 그녀가 이혼을 말한다면 회장은
정말 일어서지 못할지도 몰랐다.

[놔요!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난 내 사랑하는 남편을 찾아올 거예요 여자인가
요? 그 라하르 라는 사람이 여자냐구요! 그래서 내게 보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반은 놀라 일순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찾으러...오셨다구요....기억이...]

은조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자꾸들 잊혀진 기억에 매달리죠? 은조는 나라구요 과거의 여자가 아닌. 난 내가 바라는
것이 뭔지 아는 여자라구요. 난 그를 원해요 내 아이들과 그와 함께 살기를 자꾸 의미 없는
말을 하는 당신들이 나보다 병원이 급한 것 같아요.]

은조는 화가 나서 마구 소리질렀다. 반은 놀라고 당황한 속에서도 마음이 푸근해 지는 기분
이 들었다. 무너진 은조를 집으로 대려다준 그로서는 그녀가 그 상처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았다. 만약 기억을 찾지 못했다고는 해도 대충 석현에게 들었을 것이기에...
그는 울고있는 은조의 어깨를 다정하게 쥐며 천천히 끌어안았다.

은조는 절망스러웠다. 고집쟁이 반에게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과거는 어떻든 현재의 사랑이 중요하다는 걸....
은조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는 흐느꼈다.

[엘....]

순간 다정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살짝 흔들어 주었다.

[쉿...진정해요...정말 당신의 마음이 그렇다면....회장님을 만날 수 있게 해 드리죠. 그리고 잊
지마세요 회장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영원히 사랑한다는 걸...]

그녀는 손을 내리고 반을 보았다. 반의 포근한 미소를 보던 그녀는 진심으로 반이 그를 걱
정해서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난 그와 행복하고 싶어요..반 도와줘요...]

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어깨를 보듬고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누가 올라오라고 했지?]

마노엘은 팩팩거리며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엘라우드가 겨우 잠든걸 확인한 그로서는 표독스
러운 마녀 노바를 만나게 하고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악담을 퍼부어 대던 노바
를 생각하며 그녀와 결혼한 남자가 세상최고의 바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상체에 아무 것도 안 입은 것도 잊은 체 팔짱을 끼고는 문을 노려보았다.

[전해. 올려보낸 녀석 이번 달 월급 없다고. 알았어!]

경호원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순간 문제의 여자가 보이자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반에게 의지해서 간신히 서있는 것 같은 여자는 무척 어리고 약해 보였다. 마노엘은 반을
보며 물어보듯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반을 뿌리치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마노엘은 이 자그마한 동양여자를 빤히 보았다. 무척 작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
다. 그는 속으로 자신의 동생과 이 여자를 비교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마노아 처럼 표독스럽
게 보이지는 않았다.

[라 하르 씨군요....]

마노엘은 거만하게 여자를 한동안 보았다.

[저의 남편을 찾아 왔어요 그이 어디에 있나요.]

그의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누굴 말하는 거야 반?]

반은 한숨을 쉬며 성질 사납고 다혈질인 마노엘에게 다가갔다.

[회장님의 아내 되시는 분입니다.]

마노엘이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리더니 그녀를 노려보았다.

[오호라...나의 사랑하는 엘라우드를 저렇게 만든 여자가 이 여자군.]

그녀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이....그이가 어떤가요..어디에...]

[흥 가소로워 하여튼 여자란....남편인 남자를 그렇게 불면증과 과로에 방치....이봐 어디가는
거야!]

반은 황급히 마노엘을 잡았다. 은조는 그 틈에 어느새 마노엘의 화려한 마노석으로 된 문을
밀치며 엘라우드가 잠든 침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반!]

[회장님을 위한 일이죠. 제발 오늘은 그 성질 참으십시오.]

마노엘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반을 한동안 보더니 기침을 했다.

[이봐. 내 몸이 여자가 반해서 뛰어드는 건 알지만 남자인 자네가 그러면 당황스럽지. 나 알
몸이야 그만 놓아줘.]

반은 놀라서 기겁을 하며 마노엘을 풀어주자 마노엘이 짓궂게 웃어 보였다.
아...이 인간은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구나...라고 반은 생각했다.
하긴...누가 마노엘 라 하르를 이길 수 있을까...가끔 회장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놀려대는
마노엘이야 말로 두려울 것이 없는 남자였다.
마노엘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은조가 들어간 방문을 보았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무슨 일로 싸운 거야? 난 남녀싸움은 지겨워. 으...송실증나.]

그는 마노엘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사랑하셔서죠. 두분 다...너무너무 예쁘게 사랑하고 계시거든요.]

마노엘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반을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짧은 몇
구절의 기도문을 외웠다.

[신은 남자를 여자에게 약하게 만들다...강철 심장 엘라우드도..사랑 앞에 무너지는가? 크크
크..내가 말해도 소름 돗아...흠..아무래도 출장은 혼자 가야 할 것 같군.]

마노엘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반에게 윙크를 했다.
반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마노엘을 보았다. 이 시한폭탄 같은 남자가 요상한 짓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빨리 은조와 엘라우드가 나오길 기다렸다.

-마지막-

은조는 어스름 밝혀둔 빛을 통해 잠든 엘라우드를 보았다. 그의 이마는 땀으로 홍건하게 젖
어 있었다.
은조는 그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뺨을 만졌다.

[엘...뭐 하는 거예요...]

그녀는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의 땀으로 젖은 이마를 쓸
어주었다.

잠결에 은조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은조는 오늘 석현을 만나..날 만나고 싶을 리가 없어...그리고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걸지도
않을 꺼야...그녀가 기억을 찾았다면...그리고 석현을 만났다면..날 부르지도 않겠지...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싶지 않아...>

그는 괴롭게 몸을 뒤척였다. 결코 그녀가 자신을 찾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의 손등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마치 눈물 같았다. 은조가 울어? 왜? 석현이 추궁한 걸까?
그런 거야?
엘라우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엘...]

그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
엘라우드는 당황해서 어둑한 방안을 보았다. 드디어 헤어지자고 찾아온 것일까...
그는 안겨오는 그녀를 밀치고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렸다.

[뭐.. 때문에 왔어...미리 말하지만...날 떠날 수 없어...당신도 적었지? 증인까지 있어 떠나지
않는다고...그러니 이혼 따위 꿈도 꾸지마.]

약간은 신경질 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의 불안한 행동을 보았다.
엘라우드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앉아있는 은조를 한동안 보았다 안고싶어서 손이 떨릴 지
경이었다.

[돌아가 이혼 따위는 결코...]

[누가 원하는 이혼이죠?]

그는 그녀의 드문 나온 말소리에 귀를 의심하며 은조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날...보고싶지 않았어요?]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긴장한 목 언저리를 보며 그녀는 그가 애써 외면한다는 걸 알았
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난 피곤해...]

[오늘...지난번에 갔던 그 집에 갔어요...공사 중이 더군요...왜 그랬어요?]

그는 입술을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엘...]

은조는 부드럽게 물었지만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턱이 꽉 쥐어지며 그는 말을 참고있었다.
그녀는 그가 손을 뻗으면 바로 만질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멈추어 그를 올려보았다.

[그곳이군요...그렇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견디기 힘들어요? 그 집이...아니면 내가...]

그가 고개를 휙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렇게 알고 싶어? 그래...말하지...차라리 다른 사람보다 내 입으로 들어...난 당신을 협박하고 강간했어.

그것도 모자라...집에 가겠다는 당신을 억지로 품에 안고 일주일을 보냈어 당신은 끔찍하게 울면서 날 거부했어...

이제 속이 시원해? 그래 그곳이 내가...내가 당신을 마구 다루고.....내가 사랑한 여자를 처참하게 밟아 버린 그곳이야.]

그녀는 그의 눈에 넘실거리는 눈물을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 한발 다가섰다.
그녀는 그의 아픔을 알 수 있었다. 계속 불안해했던걸....

[엘...그럼 몇 가지만 더 말해줘요...날...그렇게 다룬 것이.....자존심 때문인가요...아니면...그리고 날 찾은 것은 아이 때문인가요...

아니면 날 사랑해서인가요....결혼은 왜 한 거죠?]

엘라우드는 고통스러운 듯이 그녀의 슬픈 얼굴을 보았다. 그녀에게 칼을 쥐어주고 자신을 찌르라고 말하는 것이 속편할 것 같았다.

[자존심...때문은 아니야.......당신이...그를 사랑한다는 것에 상처를 입었어....난....당신의 마음을 영원히....나에게 올 수 없게 만든 거야....

차라리..그렇게 되어버렸으니...날 받아주길 바랬어.....무리인줄 알지만...내가 당신을 소유하고 싶었어...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어....

그리고 아이는 핑계일 뿐이야...동생 때문에 당신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아이가 생기자...난 내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있었어...

당신을 찾아서 협박을 해서라도 결혼할 마음이었어...그리고 살아가며 당신을 영원히 내것으로 만들겠다고...너무나...탐이 나서...미칠 것 같았어....]

그는 간신히 이야기하고는 자신에게 떨어질 다음 말을 기다리듯이 고개를 숙여버렸다. 은조는 다시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왜...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나요....차라리..당신의 마음을 말하지 그랬어요....]

엘라우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당신이 힘없는 여자라는 걸 알게 하고 싶었어. 당신을 통제해서 나만의 것이라고 못박고 싶었지....잘못된 방법인걸 알았다면...

진작에 그 정도의 이성이 있었다면....그렇게 하지 않았을 꺼야..믿어 줘 은조...]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쓸었다.

[그 집에서..오늘 사진을 주워왔죠..다락방에서 건진 거라고 했어요...당신과 당신 어머니...사진....그 집은 당신의 어머니 집이죠?]

그는 눈을 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집이잖아요.]

[아니...내게는 당신을 망쳐버린 지옥이야..그곳을 새로 만들 수 있다면...당신과 나도 새로 만들어 질수 있을까...하는 이기심이지...

볼 수가 없었어..그곳의 모든 것이 날 죽이려고 다가오는 기분이었어...]

그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엘라우드...나의 과거가 그렇게 중요해요? 여기에 있는 난 어떤 여자인가요...그냥 힘없이 당신에게 당하던 여자인가요...아니면 이레네와 헤르의 엄마인가요...]

그의 손이 떨리며 그녀의 뺨에 올려졌다.

[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어요...만약 다시 돌아간다면...우린 어떻게 되었을까요...엘...당신의 비밀을 몰랐던 것이...오히려 마이너스였어요....

난 당신을 믿어요...나의 전 약혼자라는 사람이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르던 사실을 알려주더군요....내가...그에게 가기 전에 흔들린 것...알아요?]

그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사고로 기억을 잃었지만...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만약...그렇게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난 과거의 망령 때문에 당신을 미워하며 인생을 허비했을 태니까...

당신에게는 사죄의 시간이 나에게는 당신을 받아들일 시간이 생겼으니까요...엘....이제 집으로 가요...이레네가 아빠를 찾아요...헤르도 요즘 아빠소리를 하는 걸요.]

엘라우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은조를 보았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간 당신...많이 괴로웠겠군요....난 그것도 모르고....]

[은조..당신은 과거를 잊어서 몰라..난 당신을 괴롭힌 아주 나쁜...]

은조는 그의 입술에 손을 올렸다.

[그래요 과거를 숨기고 결혼한 당신을 상식적으로 본다면 너무 나쁜 남자 에요 하지만...과거는 지워졌고...내게는 당신이 가장 필요해요

그리고 아이들에게도...그리고 무엇보다...난 당신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요...그리고 나보고 떠나지 말라고

한건 당신이 멀리 떨어지면 지킬 수 없는 약속이잖아요. 그러니....돌아가요..엘...]

그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날...용서하고...살아갈 수 있을까...내가...그런 짓을 했는데...]

그녀는 미소지으며 그를 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눈물이 흐른 자리마다 입술로 그 자국을 지워주었다.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서 좋은 건..바로 이런거에요...현실이 행복하면 뱀같이 불안한 과거는 꼬리를 숨기는 거죠.

그러니 날 행복하게 해줘야 해요 뱀처럼 과거가 머리를 들이밀어 날 슬프게 하지 않게....]

엘라우드 그녀의 허리를 꽉 안았다.

[은조...미안해..미안해...]

그녀는 눈을 감고 그를 꼭 안았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은조는 이제야 자신이 항상 걱정하던 한 부분이 사라지는걸 느꼈다. 그를 사랑하고 더 이상 그에게 고통을 주고싶지 않다는 마음과

함께 사라진 어떤 것에 안녕을 고하게 되었다.
그의 따스한 품에 안긴 은조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집으로 돌아온 은조와 엘라우드는 반을 때어 놓고 와야만했다. 이유는 바로 마노엘...혼자 밤에 있기 싫다면 예전처럼 둘이 논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녀에게 험악한 시선으로 엘라우드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그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먼저 아이들을 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 사람...뭐 하는 사람이에요?]

엘라우드는 싱긋이 웃었다.

[예전에 노바랑 결혼할 뻔한 사람. 한마디로 거절했지만...]

은조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가 먼저 말했는데...닉이 아들에게 물어보자 바로 마노엘이 가출을 했어 차라리 나랑 결혼하겠다고.]

은조의 눈은 놀람으로 커졌다.

[아아...동성애자는 아니야 단지...여자랑 결혼하는 건 바보짓이라 생각하니 문제지...]

그녀는 아까 본 완전히 댄디보이 같던 남자를 생각했다. 여러 여자가 목을 매고 따라다닐 인물...

[은조...정말...나랑 이렇게 있어도...괴롭지 않을 자신 있어?]

그가 조십스럽게 물어보자 은조는 그를 안았다.

[엘...마냥 두려워하며 살수는 없어요 날 사랑하죠? 그렇다면 날 괴롭히지 말고 날 안아요. 내 불안을 날릴 수 있게...]

엘라우드는 떨리는 손으로 은조를 힘주어 안고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눌렀다. 은조는 그의 머뭇거리는 입맞춤에 더욱 열렬한 반응을 보이며 그를 당겨 안았다.

[엘....]

그는 눈을 감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열정적으로 키스를 되돌리며 그녀의 원피스 밑에 단을 끌어올렸다. 은조는 그를 안은 팔을 풀어 그가 벗기기 좋게 해주었다.

그는 일순 머뭇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은조는 그가 무엇을 머뭇거리는지 알 것 같았다. 가여운 사람...매일을 이런 불안 속에서 그녀를 안았을 사람....

그녀는 그의 뺨을 쓸어 주고는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내가 원하는 거예요. 머뭇거리지 말아요..내가 기억을 잃어서 좋은 점이 있다면....그건 그때의 기억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하지만...

그때의 기억 때문에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면..그건 우리 둘의 불행이에요. 당신이 어서...자신을 용서해야 해요...엘...]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더니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안아들고 는 침대로 향했다.

은조는 그의 품에 안겨 가만히 그의 가슴을 쓸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엘라우드...하나만 맹세해요....만약..내가 기억이 돌아와서 당신을 노려보거나 하면...지난번에 내가준 서약서를 들이밀어요

그래서 절대 떠나지 못하게 해야해요 알았죠?]

그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그의 뺨에 손을 올려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하고는 미소지어 보였다.

[전에 들었어요 지난 기억이 돌아오면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은 후의 일들은 기억 못 할지도 모른다고...그러니 그런 일이 생기면 날 결코 보내지 말아요.

나중에 지난 시간이 기억나서 미안함 때문에 당신에게 오지도 못할 날 생각해서 말이에요. 맹세해요. 알았죠?]

그는 목이 매여와서 할말을 잃었다.

[어서요 어서.]

그녀는 그를 조르며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은조...당신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키스할거야..그리고 정 안되면 당신을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게 할께...왜냐하면...

난 당신을 다시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니까. 영원히...두 번 다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야...

내가 평생 당신 옆에서....사랑으로 당신의 모든 상처를 감싸줄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서리는걸 느끼며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의 눈에 나타난 그녀를 향한 사랑...그리고 그의 진실된 마음에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영원히 옆에 있어줘요....영원히....]

그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쓸면서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보았다. 그녀가 예전에 누굴 사랑했던 상관이 없었다.

이제는 그녀와 함께 할 시간만을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 후회로 그녀에게 죄스러워하지 않고 좀더 당당히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안으며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를 자신의 아래로 굴려서 눕혔다.

[그런데 은조 어디에 그런 용기가 있는 거야 내가 어떤 짓을 한지 알면서도 날 용서할 수 있었다니...그리고 날 찾아오다니...]

은조는 웃으며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부비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당신을 사랑하고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순간...나도 모르게...나 아까 너무 당돌했죠...]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주 그렇게 해서 날 사랑한다는 표를 해줘....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할 때는 항상 내 귀를 잡아끌어도 좋아.]

그녀는 웃으며 그의 귀를 깨물었다. 그는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의 나직한 웃음이 방안을 타고 집안으로 퍼져 나갔다.

-에필로그-

은조는 환한 햇살이 가득한 그의 서재에 앉아 편지를 적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상쾌함을 만끽하듯이...

그녀는 그가 헐어버린 집을 복원하길 바랬고 집이 완공되어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이였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큰일은 바로 레베카의 늦은 재혼 소식이었다. 그들은 디트로이트에 살며 자주 그녀를 찾아 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른 오전의 햇살 속에 뛰어 다니는 강아지와 아이들을 보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벌써 그 일이 있은 지 1년하고 5개월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는 헌신적인 남편이고 아이들에게는 상냥한 아빠였다.

아직도 한번씩 보이는 미안한 듯한 표정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반이 노크하는 것도 모른 체 앉아있었다.

[은조씨? 제가 방해 한 건가요?]

그녀는 놀라 얼른 편지를 치우다가 잘못해서 옆서 한 장을 떨어트렸고 반이 그것을 주워주다가 멈칫하고는 그녀에게 건네었다.

[무슨 일이죠? 주니어가 깨었어요?]

반은 싱긋이 웃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어깻짓을 했다.

[아주 큰아기가 깨어서 열심히 찾고 있어요.]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은조씨...언제까지 회장님에게 말하지 않으실 거죠?]

은조는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생긋이 웃었다.

[왜...그렇게 생각하죠?]

[아까 엽서...분명 모국어죠...은조씨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적을 수는 없죠.]

은조는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속이긴 무리군요 하지만 그에게는 비밀로 해요. 난 내가 기억이 돌아온걸 알고 죄스러워 얼굴도 들지 못할 그를 생각하면

약간의 거짓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언제부터 이셨습니까....]

그녀는 문고리를 돌리다가 그를 다시 보고는 웃었다.

[주니어 낳고 병원에서요 다행히 그가 출장중이였죠. 아마 그 시간에 도착했다면 난 그에게 마구 화를 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가 늦는 바람에 혼란한 머리가 정리되었어요.]

그녀는 문을 살며시 닫으며 나가버리자 반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제 회장은 은조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명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는 웃으며 창 밖으로 뛰어 다니는 개구쟁이들을 보았다.

[어디 있었어?]

그녀는 금방 잠이 깬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웃었다. 그가 허락 없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돌아온 날

그녀는 마구 화를 내며 눈을 흘겼었고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었다.

[음...내 재미가 사라졌어요...당신 머리카락...다시 생각해도 아까워...]

그녀는 짧아진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입술에 키스했다. 그는 미소지으며 그녀를 침대로 당겨 안았다.

[애들 올라와요 그만 엘.]

엘라우드는 꿈쩍도 않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에휴...난 이미 당신의 아이가 셋이나 주렁주렁 달린 여자인데...뭐가 그렇게 좋아요?]

그는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내 아이를 낳아준 여자니까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자니까...]

그녀는 그의 미소짓는 얼굴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덩달아 웃었다. 항상 그의 입술에 미소만 남겨주고 싶은 그녀였다.

[주니어 우는데? 아 당신 여기 있어 내가 가서 대려올게.]

그는 그녀를 살짝 눕히고는 육아 실로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녀는 비스듬히 누워 자신의 복사판을 안고 나오는 남자를 보았다.

아이는 그의 뺨에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배고픈가봐 이 녀석.]

그녀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벌렸다. 자신의 아이...그리고 그의 아이...
그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했다.

[아빠 엄마! 마노엘 삼촌이~~~]

이레네는 뛰어들어오다가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틈만 나면 저러고 계신다니까. 헤르 눈감아 저런 건 보는 게 아니란다.]

헤르는 누나의 말대로 눈을 두손으로 얼른 가리더니 함박 웃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아기를 안으며 자신의 딸을 보았다. 그의 뺨은 엷게 물들어 있었다.

[흠...이레네 뭐라고?]

이레네는 금방 자신이 본 광경을 잊어버리고는 마구 떠들기 시작했다.

[마노엘 삼촌이 이만~~한 상자를 안고...삼촌!]

마노엘은 방문에 기대어 과장되게 손을 올려 보였다. 그의 손에는 정말 이레네의 말처럼 커다란 상자가 들려있었다.

[여 보기 좋아. 우리 공주님에게 생일선물을 주지 않은 것이 생각이 나서.]

그녀는 웃으며 일어나 마노엘을 보았다.

[이레네의 생일은 이미 5달 전이였어요. 마노엘 그런 식으로 아이에게 선물을 너무 많이 주면 안된다구요.]

마노엘은 누구라도 녹일 수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녀에게 작은 상자를 주고 큰 상자는 엘라우드의 무릎에 올렸다. 그러더니 주니어를 안아들었다.

[오 잘생긴 아가야 너에게는 뭘 줄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마노엘이 생명보다 아낀다고 자부하는 린트 초콜렛 상자를 보았다.

[네가 웬일이지? 사업 때문이니?]

엘라우드가 웃으며 물어보자 마노엘은 웃었다.

[아니 질투 나서 감시하러. ]

이레네는 아빠에게 선물을 푸르라고 재촉하며 소리질렀다. 상자에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인형의 집이 나왔다.

[오...마노엘...]

마노엘은 손을 저었다.

[와~~삼촌 최고~~]

이레네는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환호성을 울렸다.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장식한 하얀 대리석 인형의 집에 그녀도 숨을 죽였다.

[그냥 이쁜 돌이에요 너무 부담 갔지 말아요 사실 나한테 따지라면..]

[초콜렛이 더 대단하지 안 그래 친구?]

마노엘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엘라우드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내가 너만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길 바랬는데...너무 잘생겼단 말이야 아 배고파 은조씨 밥 주실 거죠? 출장에서 바로 여기로 와서 배고파요.]

마노엘의 과장된 표정에 은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우드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아내를 번갈아 보았다.

더 이상 그녀를 의심하지도 그녀 앞에 당당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여자...그리고 자신에게 가정이라는 소중한 틀을 선사한 여자.
그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노엘의 품에 안긴 주니어의 옹알이를 하는 모습을...이레네가 상자 속의 보석으로

장식된 인형을 드는 모습을...헤르가 공을 가지고 강아지와 침대를 마구 뛰어 다니는 모습을....

영원히 자신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일상을 보는 그의 눈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노바와는 아직도 연락을 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노바도...

그와 그녀의 사랑을 이해해 주길 바라며...

[내려가요 엘. 모두 함께 아침을 먹어야죠.]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들과 마노엘이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그녀의 내민 손을 잡았다. 영원히 행복이라는 공간 속을 인도할 그녀의 작고 아름다운 손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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