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하나의 사치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너를 부르지만 우리 사이에는 이미 허물 수 없는 세월의 두께가 가로놓여 있다. 안개가 내리는 이 거리에서 수많은 얼굴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얼굴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목숨을 바쳐 사랑한 기억도 없이 벌써 40개의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2개의 로 다른 함성들이 나의 귀를 찢어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밀려드는 것은 회오리 바람. 그 회오리 바람 같은 흑백의 논리 속에서 나는 소리 칠 수도 없고 침묵할 수도 없는 데. 나의 순수를 너는 꼭 비겁이라고 해야 하는가 도피라고 해야 하는가